한국을 망친 친일파 개독(20)- 김성태

일제하 기독교인들의 친일행각

한국을 망친 친일파 개독(20)- 김성태

※※※ 0 2,717 2003.10.27 23:00

김성태(金聖泰 1910~ )
1942 경성후생실내악단 편곡, 지휘자로 활동
1944 신경교향악단에서 활동
1945 음악건설본부 작곡부 위원장, 고려교향악협회 지휘자
1947 서울교향악단 이사
1949 문교부 예술 위원회
1954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71 한국방송윤리위원회 회원
1973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이사
1984 예음문화재단 회장
1993 대한민국예술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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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양악계의 원로 김성태

현제명을 '양악사의 큰별'이라고 한다면, 그와 생사를 같이 하며 음악계를 주도했던 김성태는 양악사의 '다음별'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음악가이다. 국민학교에서 중고등학교 음악 교과서까지 그의 작품이 실리지 않은 교과서가 없을 만큼 우리의 귀에 아주 익숙한 이 작곡가는 현재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직 활동하고 있는 음악계의 원로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음악관과 지금까지 해왔던 음악 행위는 한국 음악계의 현실과 모순을 잘 드러내 주고 있으며, 일제 식만 통치와 분단의 역사 속에서 굴절된 음악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더구나 김성태는 한국 양악사를 서술하는 데 산 증인이 될 수도 있을 만큼 중요한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해온 사람이다.

서양 음악의 선구자라고 하는 많은 음악가들은 대부분의 경우 부유한 지주나 토호의 집안에, 기독교 출신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또 이들은 어려서는 교회에서 서양 음악을 접하고, 성장해서는 선교사들이 만든 연희전문학교나 이화여자전문학교의 음악부에 진학하고 동경으로 유학하는 코스를 밟는 것이 일반적이다. 김성태도 예외는 아니었다.

김성태를 비롯한 많은 음악가들은 일제 시기에는 조선음악협회와 같은 어용 조직에서 활동하여 일제 식만 통치에 기여했고, 해방 직후에는 잠시 일제 잔재를 소탕하자는 구호만 외치다가 다시 미군정과 협력했으며, 다음에는 이승만 정권부터 시작되는 독재권력과 밀탁하여 기득권을 유지해 온 것이 사실이다. 특히 김성태는 이러한 과정을 전형적으로 밟아왔으며 서울음대 학장으로서 많은 비슷한 유형의 음악가들을 배출시키면서 주도적으로 음악계를 이끌고 영향력을 발휘해왔다.

많은 음악 평론가들이 한국 음악가들을 설명하고 평가할 때 항상 그 경력의 화려함에 초점을 맞춘다. 어디로 유학하여 졸업을 했고, 어느 유명한 단체에서 활동했으며, 음악가 누구누구를 길러냈고, 어떤 유명한 곡을 썼다는 등의 사실이 주요한 평가 기준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음악가가 몸담았던 곳이 어떤 성격을 가진 단체나 기구였는지는 항상 관심 밖에 있다. 아니 의도적으로 은폐되고 왜곡되기까지 한다.

지금까지는 일반적으로 음악가의 행위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행위가 애국적이고 민중적이었는가, 아니면 친일적이었는가, 침략전쟁에 가담했는가, 친미적이었는가, 독재권력을 합리화하는 것이었는가는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 유의해서 한국 양악계의 원로라고 지칭되는 김성태의 행적과 작품활동을 살펴봄으로써 그가 일제 시기에 행한 친일적 활동과 해방 이후 한국 음악계에 미친 영향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를 규명해 보고자 한다.

 

●친일 경력 뚜렷이 보여 준 경성후생실내악단에서의 활동
 김성태는 서울 광희동에서 1910년 11월 9일에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가 동네에 교회를 세울 만큼 그의 집안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다 동네의 토호였다. 한국 양악의 선구자라고 일컫는 음악가들의 출신이 거의가 다 그렇듯 기독교와 관련이 있다. 당시 교회는 서양 음악을 습득하는 중요한 창구였다. 그도 할아버지가 세운 교회에서 성가대도 하고 성탄절 행사와 같은 때는 독창도 하고 바이올린도 배우면서 서양 음악을 자연스럽게 접하고 습득하였다. 특이하게 축구도 잘했던 그는 연희전문학교에 음악과 축구 특기자로 발탁되어 상과에 진학하였다. 당시 음악과 주임이었던 현제명의 눈에 띈 그는 음악부에서 채동선과 현제명에게 작곡과 이론을 배웠고, 졸업반 때에는 당시 유행했던 동요 작곡에 몰두하여 자신의 동요 작곡집 ≪새야새야 파랑새야≫를 발표하기도 했다. 연희전문학교에서 현제명과 운명적인 만남을 시작으로 이후 두 사람은 생사고락을 같이 하게 된다. 연희전문학교 졸업 후 1935년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일본 유학길에 오른 그는 정종길, 한평숙, 이인형, 박용구, 김순남, 이건우 등 당시 많은 음악가들이 유학 중에 있었던 동경고등음악학교 작곡부에 입학하여 1939년에 졸업하였다.

1939년 일본에서 귀국한 김성태는 귀국과 동시에 『동아일보』에서 주최하는 작곡발표연주회에서 홍난파(洪蘭坡), 현제명, 박경호, 채동선 등과 함께 작곡 발표를 한다. 이때 발표한 〈즐거운 우리집〉이후 그는 3월부터 경성보육학교 음악주임으로 근무하면서 다음해부터는 보성전문학교에 출강하였으며, 경성방송국 혼성합창단을 지휘했고 조선뉴스 제작소에서 음악을 담당하는 등 활발한 음악 활동을 하였다.

이러한 음악 활동을 벌이고 있을 때 조선총독부에서는 조선의 문예인들을 어용화시키기 위해 대단한 모략을 꾸미고 있었다. 그 일환의 하나가 조선음악가들을 묶어 자신들의 요구대로 움직이게 하고 민족적인 음악 행위를 제도적으로 차단하려고 하는 움직이었다. 결과 결성된 것이 바로 친일음악가들의 최대 어용 조직 '조선음악협회' 였다. 여기에 가담하지 않은 음악가들은 별로 없을 정도로 대부분의 음악가들이 망라되었다. 이 단체는 국민 개창 운동 등을 전개하여 조선인의 민족 의식을 마비시키고, 정서적으로 황국신민화시키기 위한 작업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또한 친일음악가들은 조선음악가들을 아주 일본음악가들로 만들려는 창씨개명과 일제의 요구대로 순응하겠다는 각서를 쓰는 것과 같았던 기예증 발급(이 기예증 발급에 현제명이 조선음악협회 이사로서 심사위원을 맡았다)에 협력했다. 김성태 역시 '조선음악협회'의 작곡부 위원으로 가담하였고, 일제의 창씨개명 정책에도 순순히 응했다. 그의 창씨명은 '카네시로 쇼타이(金城聖泰)'이다.

그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음악적 전문성을 가진 소수의 음악가들을 중심으로 전시하에 국민음악 보급 정신대로서 봉사하고 실천하는 정예 부대였던 '경성후생실내악단'에서 주도적인 활동을 하게 된다. 국민음악이라함은 곧 일본음악을 뜻한다.

1942년 5월에 결성된 '경성후생실내악단(이하 후생악단)'에는 김생려, 김태연, 김천애, 이인범, 김태연, 이유성, 이인형, 박평수, 안성교, 이강렬 등이 함께 활동했는데 그는 여기에서 편곡과 지휘를 맡았다, 그의 '경성후생악단'에서의 활동은 각각의 생산 현장과 연주회장에서 모범을 보이며 실제 악기를 들고 생생한 연주를 들려 주어 조선인들에게 일제의 군국주의적 야욕을 정당화시키고 설득시키는 데 기여했다. 『매일신보』의 1942년 4월 7일자 「국민음악 보급 정신대로 '경성후생실내악단'」이라는 제하의 신문기사는 이러한 성격을 잘 드러내 준다.

 반도의 중진 연주가들로 조직 결성하여 전시하에…..예능적 효과를 주로 한 대중성을 확인하여 국민적인 건전한 데로 매진하는 이때 음악의 사명은 더욱 중대성을 띠게 되어 반도 음악 연주가들은 총후(銃後)의 음악을 보급하자는 뜻에서 '경성후생악단'을 조직하고 학원, 광산, 직장의 생산 지역에 더구나 중앙에서 국민음악을 연주하기로 되었다.

 후생악단의 연주회 순서와 레퍼터리는 그 성격을 더욱 분명하게 해준다. 언제나 국민의례와 <君か代(기미 가요 : 일본 국가)>로 시작하고, <海行かぼ(바다로 가면)>로 끝내야 하는 절차가 있었으며, 초기에는 순수 독일 음악을 위주로 하였지만 차츰 <大日本の歌(대일본의 노래)>나 <대동아의 노래>와 같은 일본의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국민 가요가 빠질 수 없는 주요 레퍼터리였다. 이는 『매일신보』나 국민총력조선연맹 조선음악협회 등 일제의 어용 기관과 단체들이 주로 주최하는 소위 '국민가곡' '국민가요'로 당선된 조선 작곡가들의 일본의 전쟁을 찬양하고 징병제를 미화하는 일본 음계의 곡이 다수 쏟아져 나오면서 더욱 그러한 경행이 짙어졌고 후생악단은 국민총력조선연맹이나 조선음악가협회에서 주최하는 수많은 정치적 연주회에서 다양하고 폭넓은 활동을 했고, 국내 각지는 물론 국경을 넘나들면서(만주에서와 국내에서) 연주 활동을 했다. 또한 1943년 8월에는 징병제 실시 직후일에 '반도 개병(皆兵)의 노래 발표회'가 있었는데 후생악단이 찬조 출연하여 국민가 <대동아 아침이 오다>, 현제명의 <항공일본의 노래>, <대일본의 노래> 등을 반주하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후생악단의 다채롭고 적극적인 연주 활동에서 김성태는 지휘를 맡거나 편곡을 담당했다. 그 해에 활발하게 이루어진 국민 개창 운동의 일환으로 일본 음계로 된 국민 가요를 직접적이고 적극적으로 보급 계몽하는 '국민가창지도대' 라는 것이 각 지방마다 파견되었는데, 김성태는 강릉 방면으로 이흥렬(李興烈)과 함께 파견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일본의 대륙 침략 야욕을 부채질하고 정서적으로 정당화하는 데 주도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셈이다.

이 후생악단이 1944년에 일부는 만주에 있는 신경교향악단으로 흡수되고 일부는 현제명(이사장으로), 김원복, 이흥렬 등이 보강되어 새로 건설되었는데 신경교향악단 역시 당시 후생악단과 비슷한 성격을 가진 대화악단, 대동아악단과 유사한 단체였는데, 김성태는 신경교생악단으로 편입했다. 새로운 체제로의 전환은 더욱더 적극적인 활동을 위해서였으나 곧 해방을 맞이하여 단체의 외형은 해산되었지만 인적 구성원은 해방 후에 다른 조직으로 변모하여 활동을 계속하게 된다.



 ●해방 후 고려교향악단에서의 활동
 8.15해방을 맞이하자 다른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친일 음악가든지 저항 음악가든지 일제 잔재 청산과 민족 음악 건설을 외치며 음악단체를 속속 결성하고 나섰다. 김성태 역시 좌우익 합작 단체인 '음악건설본부(이하 음건)'에서 작곡부 위원장으로 있다가 이미 현제명을 중심으로 조직된 '고려교향악단(이하 고교협)'을 두고 현제명을 이사장으로 김생려, 계정식, 김성태 등 일제 시대 경성후생악단과 경성음악연구원에서 활동한 주요 음악가들이 망라되었다. 고교협은 발빠르게 제2대 미군정 장관 러치가 취임하자마자 그를 명예회장으로 앉히고 문교부 음악과 과장이었던 미 육군 중위 포크너를 객원 지휘자로 초빙하는 등 미군정의 지원하에 운신의 폭을 넓혔다. 고교협은 '조선음악예술'의 질적 행상과 이에 관한 사업 발전의 추진을 목적으로 하는 강령을 내세웠다. 그리고 연주회 곡목도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등이어서 순수음악지상주의를 표방하였고, 해방 직후 상황에서 역사적 과제였던 일제 잔재의 청산 문제나 민족 음악 수립은 외면하고 있었다. 당시 고교협이 어떤 단체였는지를 원로 음악평론가 박용구는 「원로 박용구의 삶에 비춰 본 한국예술사」라는 글에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해방 직후 음악계는 좌익의 음악동맹과 채동선이 이끄는 민족주의 음악가들, 그리고 현제명 등 일제 시대부터 음악계 중앙을 장악한 관변 음악가들로 크게 나뉘어 의견 대립이 계속되는 양상을 띠고 있었다. 현제명을 중심으로 한 일군의 음악가들은 일제에 협력하고 해방 후에도 주도권 장악 싸움이나 일삼는다 하여 좌익 진영과 민족 진영 양측으로부터 크게 비판받고 있었다. 음악계의 분열을 막아야 한다는 데는 뜻을 같이 했으나 특히 좌익 진영은 일제에 협력한 자들과는 손을 잡을 수 없다는 단호한 자세를 보였다(『객석』,1990년 5월호)

 이후 김성태는 '연합군 환영 준비를 위한 잠정적 기관'이던 '음건'이 해소되자 조선음악가동맹측의 신막 박영근 등과 함께 '전국음악가 단체 대회'를 열고 좌우익 합작 단체인 '조선음악가협회'를 조직했다. 이렇게 좌우합작을 했지만 각 단체는 독자적인 활동에만 치우쳐 결국 '전국문화단체 협회'로 흡수되었다. '고려교향악단'은 악단 내부 문제로 인해 점점 와해되어가고 몇몇 탈퇴한 사람들이 다시 조직한 '서울 교향악단'으로 흡수되었고 1947년 김성태는 이 악단의 이사가 되었다. '서울교향악단'은 여전히 미군정의 도움으로 유지되었으며, 1948년 정부 수립 후에는 이승만 정권과 밀착하게 된다. 실제로 그 해 8월15일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때 김성태의 지휘로 경축 공연을 하기도 했으며, 12월에는 '여수,순천 사건'과 관련하여 반공을 내세운 '민족정신 양양 전국문화인 총궐기 대회'가 열렸는데 이 준비위원회위원에 악단원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고, 김성태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결과적으로 김성태는 자신이 애써 부인하려고 해도 일제 이후로도 직접적인 정치적 행동을 보여 주었다.

그는 이후에도 1949년 2월에 '문교부 예술 위원회'로, 3월에는 '서울시 문화위원'60명 중의 음악인(12명)으로 선정되는 등 음악계의 거두로서의 길을 착실하게 쌓아 나갔다.



●교육가로서의 경력과 작품에서 보여지는 음악관
 1943년 4월 현제명은 경성 대화숙(大和塾)이 후원 아래 대화숙 내에 경성음악연구원을 개설하였는데 계정식, 김천애, 김영의 등과 함께 작곡과 교수로 작곡 및 이론을 맡았다. 경성 대화숙과의 밀접한 관계는 경성음악원의 친일 구조를 잘 설명해 주는 것이다. 이 경성음악원이 해방 후에 남산에 세운 경성음악학교로 발전되었다. 1947년 수많은 지식인과 학생들의 결사적인 반대 시위(국대안 반대투쟁)에도 불구하고 미국인을 총장으로 하는 식민적 국립서울대학교가 설립되자 예술대학으로 흡수되어 오늘날 서울 음대로 된 것이다. 경성음악학교의 교장이었던 현제명은 서울 음대 초대 학장을 맡으면서 교수진 확보, 재정난 등을 타개하기 위해 이승만과 손을 잡아 초기부터 권력구조와 밀착하였고, 미국 음악대학의 커리큘럼과 교육 내용 등을 배워와서 이 음대에 적용하는 노력을 해왔다. 이곳에서 줄곧 교무주임, 음악부장을 맡으며 현제명과 손을 잡고 뒤를 이었던 김성태는 1960년 현제명이 사망하자 음대 학장으로 취임하여 1969년까지 재직한다. 1955년에는 미국 인디애나 주립대학교 대학원에 수학하고 다음해 귀국했으며 1960년에 서울 음대 제2대 학장으로 취임하여 1960년까지 맡는다. 김성태의 미국행은 현대 음악이 성행했던 당시 미국 음악 경향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고, 귀국 후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서울대의 음악 경향을 이끄는 역할을 했다. 김성태의 경성음악연구원에서 서울 음대 재직까지의 경로는 김성태가 누렸던 기득권이 어떻게 탄생되었고, 음악계에 어떤 영향력을 미쳐왔는지를 짐작케 해준다.

교육가로서만이 아니라 작곡가였던 김성태의 작품과 작곡 경향은 그의 행위와 비교하여 어떠한지 살펴보자.

김성태의 작품에는 뚜렷이 친일적인 가사를 가진 국민가요 등이 발견되지는 않았다. 1940년대 초에 조선방송협회에서 '가정가요'라는 이름으로 전시 동원 체제를 찬양한 작품을 보급시켰는데 <희망의 아츰(홍난파 곡)>이나 <지원병장행가(박태준)>등 대륙 침략을 정당화하고 징용을 권유하는 내용의 곡이 수록되었던 '가정가요 1집'에 <즐거운 우리집>이 포함되었지만, 이 곡은 그러한 경향과는 달리 정치적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해방 후에 만든 해방가요 10여 곡 역시 민족적 내용을 담고 있다. 그 중에서 <아침해 고을씨고>와 <독립행진곡>은 1946년 5월 1일 발행한 《임시중등 음악교본》에 실렸고 <독립행진곡>의 경우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불려졌다. "어둡고 괴로와라/밤이 깊더니/삼천리 이 강산에/먼동이 튼다"로 시작되는 이 곡은 최근 1980년대에는 <해방가>로 곡명이 바뀌어 운동 가요로 다시 유행하기도 한 곡이다. 그런데 이 곡이 당시에 크게 유행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일제 치하에서 의도적으로 국민의 귀를 일본 음계에 익숙하게 했던 국민 개창 운동이나 전통 음악 말살 정책이 해방 후에도 그 진가를 발휘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그 내용이 민족적 동감을 자아냈을지라도 일본의 요나우끼 음계로 씌어진 이 곡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당시의 좌우익을 막론하고 비판되었는데 이것을 몇몇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제와 봉건의 잔재의 청소가 없이는 새로운 발전을 기할 수 없음은 물론임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가두에서 방송에서 해방 이전의 것들이 그대로 연주되고 있다. 이것은 곧 작곡가와 연주가들이 이 문제에 관한 과학적 해명과 철저한 실천의 부족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방송국에서 녹음지도 방송한 <독립행진곡>은 확실히 일본의 군국가요조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박영근, 「악단의 제문제-민족음악건설을 중심으로」, 『예술신문』, 1947년 8월 17일자).

 해방가요의 작품 경향에 비하여 가곡의 경향에 대해서는 또 다른 비판이 있었다. 김성태는 한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가곡 중의 하나인 <동심초(1946년작)>를 비롯하여 <산유화>, <이별의 노래>, <한송이 흰백합화(1952)>, 교성곡<빛나라 내 조국(1978)>, <향수(1984)> 등 수많은 작품을 창작해 오고 있는데 그의 가곡 경향은 서양 음악을 고답적으로 수용하거나 민족적인 것을 가지려 하되 역사적인 잔해로서의 시대 이념을 현대에 적용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평론가 노광욱은 1946년에 있었던 '음악가의 집' 주최 박은용의 '우리 가곡의 밤'을 보고서 '민족 음악의 두 가지 조류(김성태, 「음악건설의 제고」, 『혁명』, 제1권 창간호, 혁명동지사, 1946년 1월)'라는 글에서 김성태의 작품에 대해서 김순남과 비교하여 많은 박수를 받을 수 없었던 이유를 설명했다. 김성태 작품의 가사가 한시 번역이며 서양음악어법을 그대로 사용한 것에 대한 것은 창작의 원천을 시대적인 민족 원리인 민중의 심장의 고동에 두지 않았고 고전적인 음악에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1955년 미국에서 현대 음악이 거장 힌데미트(Paul Hindemith)의 제자 하이든 교수 문하에서의 수학은 현대 음악에 대해 눈을 뜨게 하였고, 1960년대 이후에는 그러한 작품을 생산해 내기 시작했다. 그는 결국 현대 음악을 받아들여 고전 낭만적 음악에 기초한 서양 음악의 고답적 수용을 탈피하려 했다. 그래서 결국 한국 음악계가 당면했던 민족적 양식에 기초한 주체적인 서양 음악 수용이라는 과제를 외면하고 말았다.



 ●순수예술지상주의자의 정치적 행위
 1950년대 이후의 활동을 보자면, 고려교향악단의 후신인 서울교향악단에서도 변함없이 지휘를 맡았고, 고려교향협회는 현재 한국음악협회의 전신이 되었다. 전쟁 시기에는 부산으로 이사간 서울 음대에 있다가 당시 음악가들이 자의든 타의든 동원된 문화공작대 등에서 활동하였는데 그는 공군정훈음악대의 대장으로 있었고 해군정훈음악대의 지휘를 맡으면서 반공을 기치로 한 군인들의 사기를 북돋는 데 한몫을 했다. 1954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1969년에는 연세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 음대를 정년 퇴임한 후에도 영향력 있는 요직을 맡아왔다. 1971년에는 한국방송윤리위원회 위원을, 1973년에는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이사를 지냈고, 1984년에 예음문화재단 회장을 맡아오고 있으며, 작년 1993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 원장이 되었다. 그의 화려한 수상 경력을 보자면 1962년 문화훈장 대통령장, 1976년 국민훈장 동백상, 1981년 3.1문화상, 1985년 5.16민족상 등을 수상했고, 이 외에도 제7회 아세아영화제 최우수영화음악상 등을 수상했다.

지금까지의 음악가들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김성태도 뚜렷한 자기의 사상적 근거와 역사 의식이 없고 자신의 행로가 사회 발전에 어떠한 기여와 부작용, 반작용을 할 것인가에 대해 잘 판단하지 못한 채 아무 의식없이 시대의 조류에 휩쓸려 살아왔다. 이러한 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순수지상주의' 이데올로기이다. 김성태의 나이 30대 중반이 되던 해방 직후에 그가 발표한 「음악 건설의 제언」같은 글은 그러한 점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의 순수예술지상주의 발언은 그의 일관된 생각이고 그 후로도 그가 살아가는 사상적 뒷받침이 되었다.

 건국의 대창업이 힘드는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정국은 말할 수 없이 뒤죽박죽이다. ….정치 행동과 예술 행동이 확연히 구분된다는 것이 자명의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왕왕이 예술 행동을 정치에까지 연장시키는 과오를 범하는 수가 많다. ……예술가(음악가)는 정치가의 이명동의가 아닐진대 정치에 넘나들 수 없는 예술적 한계 밑에서 깨끗이 살아야 할 것이며 이것을 어디까지나 사수하는 데 예술가로서 명예로운 것이다. ……예술가가 정치에 참가될 때 얻은 것이란 정치의 실패뿐이요, 잃은 것은 예술뿐인 것이다(김성태, 「음악건설의 제언」, 『혁명』, 제1권 창간호, 혁병동지가, 1946년 1월).

 그러나 앞에서도 본 바와 같이 일제의 군국주의 야욕을 북돋고 친일 음악 행위의 전위 부대였던 경성후생실내악단에서의 활동은 이러한 발언을 무색하게 하고 있다. 당시 왕성한 평론 활동을 했던 친일 음악가 박경호가 『매일신보』에 개재한 '경성후생실내악단 공연후감'이라는 다음과 같은 글은 경성후생악단과 그곳에서 지휘, 편곡 등의 중요한 역할을 했던 김성태의 정치적 지향성과 부일성을 뚜렷이 대변해 주고 있다.

 전시하에 후생 음악을 목적으로 하는 음악 행사라면 구체적 형식의 그것에 비하여 적어도 아래와 같은 대조의 조화가 있어야 한다.

。예술지상주의에서 국가지상주의로

。지휘 본위에서 대중 본위로

。개인중심주의에서 대동아공영주의로

。영리주의에서 멸사봉공주의로

등인 바 물론 이 네 가지 조건에 합당하지 못하는 음악 행사는 현시하에서는 용납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박경호, 「경성후생악단의 공연후감」, 『매일신보』, 1946년 6월16일자).

 『객석』음악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현제명의 미망인은 '경성후생악단'에 참여하게 된 동기를 "1940년부터 ……한국인으로서의 음악 활동이 불가능하자 모든 치욕을 무릅쓰고서 히라마 분쥬(平間文)와 손을 잡고 후생악단을 조직했다"라고 변명하는 내용에서처럼 김성태 자신도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을 하겠지만 그런 말로 무마하기에는 너무나 주도적인 일을 많이 해왔다. 그걸 부인한다면 꼭두각시처럼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김성태는 해방 공간에서도 많은 정치적 행동에 자의든 타의든,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가담하였다. 더구나 항상 정치 권력과 연결되어 살았던 현제명은 그가 가장 존경하는 스승이자 항상 행동을 같이 한 동료이다. 해방 직후에는 직접 한민당 당원으로까지 있었을 만큼 현제명은 적극적인 정치 활동을 벌여왔던 사람이고 1960년 4.19혁명 때에는 이승만 권력과 밀착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학생들이 그의 집 앞에서 시위를 할 정도였다. 현제명의 가장 가까운 음악 동료인 그가 '순수주의'를 주장해 온 것을 아이러니한 사실이다. 30대에 순수예술지상주의를 주창하던 김성태는 60대가 되어 좌우명이라고 주창하는 「중용의 길」에서 다시 그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중용의 길은 내 즐겨 걸어온 길이다. 남을 앞지를 이유도, 뒤질 이유도 없었다. 그러므로 뛸 필요도 늦출 필요도 없었고 그저 알맞게 걸어왔을 뿐이다. 중용의 생각, 중용의 행동, 중용의 실천, 이것은 내 삶의 어제를 즐겁게 했고, 오늘을 편안하게 하며 또 내일을 보람있게 하리라.

 음악가들을 비롯해서 예술가들이 흔히 범하기 쉬운 오류는 자신의 정치적 행동과 발언은 모르고 예술과 정치를 분리시켜 순수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자신들을 신성하게 분리시켜 놓으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 속의 일원이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참고문헌
「국민음악 보급 정신대로 '경성후생실내악단'」, 『매일신보』, 1942. 4.7.
「원로 박용구의 삶에 비춰 본 한국예술사」,『객석』, 990.5.
《서울대학교 30년사》.
노동은, 〈일제 ㄸㅒ 음악인들 어떻게 동원되었나〉,《한국민족음악의 현단계》, 세광음악출판사
박영근, 「악단의 제문제-민족음악건설을 중심으로」,『예술신문』, 1947.8.17.
계정식, 「먼저 일본색 일소」, 『조선일보』,1946.2.18.
『민성』 제5권 제1호, 고려문화사, 1949.1.
김성태, 「음악 건설의 제언」,『혁명』, 제1권 창간호, 혁명동지사, 1946.1.
박경호, 「경성후생악단의 공연후감」, 『매일신보』, 1946.6.16.
「중용의 길」, 1922.7.12 『객석』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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