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망친 친일파 개독(16) - 박마리아

일제하 기독교인들의 친일행각

한국을 망친 친일파 개독(16) - 박마리아

※※※ 3 3,488 2003.10.26 20:26

박마리아 (1906∼1960)
1949 대한부인회 부회장
1952 이화여대 문리대 회장, YMCA 회장
1954 대한부인회 최고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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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유년에 배운 생존의 철학
 징병력이라는 것은 청화폐하께옵서 내리신 여간한 큰 은사가 아닙니다.

아직까는 어린애였지만 이제는 다 성장한 사람이라고 인정하시고 총과

칼을 메고 전장에 나가라고 하시는 것이니까 전장에 나가는 이상 황은

(皇恩)에 으거리짐 없이 충용(忠勇)하고 훌륭한 황국신민이 되도록 노력

하는 것이 이 혜택에 보은하는 최선의 길입니다(『징병과 반도 어머니의

결의』, 『朝光』 주최 간담회, 1942년 5월 23일).

 박마리아는 1906년 3월 26일 (음력) 강원도 강릉에서 출생했다. 가난한 농부의 외딸로 태어나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했다. 홀어머니 고대의(高大義)는 정춘수 목사의 가정부로 출발해서 독실한 기독교 신도가 되었다. 고대의는 정춘수의 주선으로 전도사 역할을 했지만, 생계를 잇기 어려울 정도로 생활고에 시달렸다. 어린시절 박마리아는 남의 집 어린아이를 봐주고 때로는 채소밭에 나가 일을 해준 품삯으로 근근히 연명한 것으로 알려져 이싿. 이 시절의 경험은 박마리아에게 두 가지 유산을 남겼다. 하나는 독실한 기독교도가 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증오에 가까운 가난 혐오였다. 출세와 입신양명에 대한 끈질긴 집념 역시 우울한 유년기에 다져진 것이었다.

13세에 보통학교를 졸업한 박마리아는 민며느리로 들어가라는 주위의 권고를 뿌리치고 정춘수의 주선으로 1919년 개성(開城)의 호수돈(好壽敦) 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호수돈 여고븐 1904년 미국남감리교계의 선교사가 세운 학교로, 과부나 기생을 대상으로 한미리흠(美理欽) 학교와는 달리 처녀 학생들을 위한 명문 학교였다.

박마리아는 교역사(敎役者)의 딸로 학비를 면제받았지만, 그 외의 생활은 개성 갑부인 친일파 윤치호(尹致昊)의 딸 윤봉희의 도움에 의존해야만 했다. 윤봉희와의 인연으로 박마리아는 해방 후 윤봉희의 친척들을 취직시켜 주는 등 각별한 보담을 했다고 한다. 졸업 후에는 한동안 경제적인 이유로 고향인 강릉에서 어머니와 함께 교회일을 하던 중 호수돈의 학우인 조현경의 도움으로 1924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에 입학했다. 박마리아는 이화여전 시절 4년간 반장을 하면서 '작은 영웅(體小英雄)'이란 뜻의 소영(小英)이란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활달했다고 한다. 그녀는 1928년 영문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국내에서 박마리아가 받은 대부분의 교육은 감리교 계통의 학교에서 이루어졌으며, 또 그것은 그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경건주의와 복음주의의 형태를 지니고 있던 개신교의 영향은 순수한 복음적 삶만을 인생의 유일한 목적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현실과 종교의 분리, 혹은 세속에 대한 무관심은 식민지 현실에서 정치적 중립의 표방, 나아가 반일 운동, 민족 해방 운동에 대한 의도적 무관심으로 이어질 공산이 컸다. 부분적으로 기독교 계통의 교육은 복음주의의 미명하에서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 대한 정치적 각성을 억압·불온시하여 체제 순응적인 지식인들을 양산했다. 또한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지역'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던 선교사들의 문화적 우월주의는 서구, 특히 미국에 대한 동경과 미화를 가져왔는데, 박마리아 역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이화여전 졸업시 기자와의 대담에서 박마리아는 공창(公娼) 폐지와 금주·금연 등 사회 운동에 몸을 바칠 것이며 "그 같은 봉사적 정신은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예수교회 전도사로 있던 어머니의 감화가 컸다"고 소감을 밝혔다. 공창 폐지는 당시 여성 운동의 일반적 주제였으나, 박마리아의 발언은 금연·금주와 함께 기독교적 금욕 윤리의 제창이었다. 이는 당시 YWCA (Young Women's Christian Association, 기독교 여자 청년회)의 방침과 같은 맥락으로, 졸업 당시 박마리아가 YWCA에 가입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이 단체 가입과 활동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이화여전 졸업 후 호수돈 여고보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이화여전 선교사 아펜젤레(Hernry Gerhard Appenzeller)의 추천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32년 마운티 홀리옥 대학과 테네시주 스카릿(Scallet) 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해 피바디(Peabody) 사범대학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32년 귀국하여 같은 해 9월부터 1935년 11월까지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수신(修身)과 영어를 가르쳤다. 1935년 이기붕(李起鵬)과 결혼한 후 학교를 사임했고, YWCA의 총무로 활동했다.

남편 이기붕〔호는 만송( 松)〕은 1896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후산리에서 출생했다. 이기붕 역시 몰락한 양반가의 독자로 태어나 과부인 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어려운 환경에서 선교사의 도움으로 중학교를 졸업하고 보성고등학교를 마쳤다. 그 뒤 일본을 거쳐 도미하여 아이오와 주 데이버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대한국민회 회장으로 있던 이승만(李承 )을 만났고, 허정(許政)과 함께 『삼일신문(三一新聞)』을 발간하기도 했다. 이승만과의 이 같은 인연은 해방 후 독재 정권의 최고 권력자와 2인자의 관계로 이어진다.

유학시절 신민회 집회에서 박마리아를 만나 1931년 약혼했다가 박마리아의 귀국으로 약혼이 취소되었지만, 1935년 이기붕이 귀국하면서 다시 재회했다. 귀국 후 이기붕은 가회상회(嘉會商會)를 운영했지만 실피했고, 중추원 참의 최남(崔楠)이 경영하던 종로 국일관(國一館) 지배인을 지냈다. 이 무력 강희(康姬), 강석(康石), 강욱(康旭)등 세 아이를 두었다. 다방 <종로>를 경영하기도 했고, 건축청부업사무소 개설등 잡다한 일을 거쳐 일제 말기엔 허정과 함께 광산을 경영하기도 했지만, 빛을 보지 못한 채 해방을 맞았다.



 ●징병제 실시에 감개무량함을 설파
 박마리아는 YWCA에서 잔뼈가 굵었다고 할 수 있었다. 일제 시기인 1934년부터 1940년 8월까지 서기, 1940년 8월에서 1941년까지 연합 의원을 지냈고, 해방 후 1947년부터 1952년까지 YWCA 서기로, 1952년부터 1960년 사망시까지 회장으로 활동했다. 그의 친일 경력 역시 YWCA와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조선 YWCA연합회는 일제 치하에서 창립되었고, 창설 과정부터 일본 YWCA와 말썽의 소지가 있었다. 그러나 조선 YWCA의 끈질기고 주체성 있는 노력으로 일본 YWCA의 양해를 얻어 세계 YWCA에 독립된 회원국으로 가맹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물론 세계 YWCA연맹의 보고서에서 제기하듯이 당시 조선 YWCA는 문명화 산업화된 나라와 동일한 활동 사업에 여념이 없었고, 조선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실정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들어 일본이 대륙 침략 전쟁을 본격화하고 황국신민화를 꾀하자 사정을 달라졌다. 일제는 조일(朝日) 기독교 일제화 운동의 일환으로 조선 기독교와 기독교계의 단체들을 탄압하며 전시 체제의 호라동을 강요했다. 이에 따라 애국 여성들 사이에서는 YWCA 참여를 중단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최이권(崔以權), 신의경(辛義卿) 등이 YWCA를 포기한 반면 박마리아를 비롯한 지도자의 상당수가 일제에 대한 타협적인 자세를 취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1938년 장병 위문금을 모금해 헌납하는 등 친일행각을 벌였다. 박마리아의 친일행각은 조선 YWCA연합회(회장 김활란)가 일본 YWCA연맹 산하로 흡수되는 과정에서 잘 나타났다.

1938년 6월 8일 조선 YWCA연합회는 '비상시국'에서 '내선일체(內鮮一體)의 깃발 아래로 무여' '황국신민으로서의 앞날의 활동을 예비'하기 위해 조선 YWCA의 독자성을 스스로 부정하고 일본 YWCA동맹 가맹을 가결했다. 여기서 박마리아는 김활란, 유각경(兪珏卿)과 함께 실행 의원으로 선출된다. 이들은 일본측 교섭위원들과 7월 15일 조선 YWCA 회관에서 회견하고 정식 통합을 결정했다. 이 자리에서 박마리아는 서기를 맡아 '일본 동맹 위원회는 만장일치로 조선의 열망을 받아들일 것을 결의하고 조선 YWCA연합회는 세계 YWCA 본부에서 탈퇴하고 일본 동맹에 가맹할 것, 외국과의 관계에 있어서 모두 일본 동맹을 거칠 것'을 결의했다. 이 같은 친일의 대가로 박마리아는 1939년 일본 YWCA동맹 산하 조선연합회 서기의 자격으로 학습 시찰차 일본에 '파견'된 바 있었다.

이후 박마리아는 식민지에선 손꼽히는 여성 지식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미국 유학과 기독교 여성 운동의 경험을 지닌 중견 지도자로서 활발한 친일 강연에 나섰다. 모윤숙(毛允淑), 김활란(金活蘭), 고황경(高凰京) 등과 함께 친일 강연의 단골 손님으로 등장한 박마리아는 '시국부인 대강연회(1941년 10월 18일)'의 연사로, 1942년 1월 5일 결성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朝鮮臨戰報國團婦人隊)'의 지도 위원으로, 임전보국단 부인대 좌담회(1942년 5월 25일)에선 '건국의 새어머니가 될 우리의 감격과 포구'에 대해 노천명(盧天命), 모윤숙 등과 함께 열변을 토하기도 했다. 문서로 대할 수 있는 박마리아 친일 언론의 압권은 『朝光』 주최로 열린 간담회(1942년 5월 23일)에서 허하백(許河伯), 배상명(裵祥明) 등 후일 한국 여성 교육의 대명사들과 주고 받은 부분이었다.

 허하백 : 우리의 젊은이들이 다 총을 메고 나라에 몸을 바칠 걸 생각하니 진실로

감개 무량합니다. 이로써 내선일체의 완전한 실천이며 이제부터 조선 사

람도 제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걸 생각하니 더없는 기쁨입니다.

박마리아 : 우리들은 가정에서 죽음을 너무 무서워한다는 점을 타파시켜야겠어요. 사람이 한번 나서 한번 죽을 것을 그리들 무서워할 게 무엇일까여. 나 라를 위해 한번 몸을 바친다는 것이 어떻게 떳떳한 일인가를 깊이 인식 시켜 주어야 되겠습니다. 중국에서는 'R상도 못되면 병정된다'는 말이 있지만, 우리 나라에서야 사나이로 나서 총검을 들고 전선에 나가는 것 이 곧 최고의 인간 가치를 발휘하는 줄 알고 있잖습니까?

 징병제 실시에 감개무량함을 설파하던 박마리아가 자신의 친일행각을 부끄러워하거나 반성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실상 식민지 시대 박마리아의 어떤 활동에서도 항일, 애국, 민족, 투쟁 등의 단어를 찾을 수 없음은 물론이다. 박마리아는 나름대로 기독교로서의 품위를 유지하면서 대세에 순응해갔다고 생각했겠지만, 그 같은 개인적 합리화가 무게를 방어해 낼 수는 없는 것이었다. 물론 해방 후에도 반성의 기회를 만들지 않았고, 때문에 박마리아는 반민주적인 독재 정권 하에서 식민지 시대 이래 계속 고통받아온 대부분의 사람들을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권력욕을 서슴없이 펼쳐 보일 수 있었다.



 ●서대문 경무대를 휘두르다
 경무대는 프란체스카가 휘두르고 서대문 경무대(그 당시 박 마리아의 거주지를 가 리킴)는 박마리아가 휘드란다. 암탈깅 울면 세상이 망하는 법인데 이래서야 나라 꼴이 될 리가 있나?

 자유당은 두 가지 암(癌)으로 죽었는데 하나는 프란체스카 암이요, 또 하나나는 박 마리아 암이었고, 최인규(崔仁圭)는 강심제 주사를 놓다가 바늘부터 부러진 격이다.

 유행가처럼 울려 퍼진 이런 말들은 이승만 정권 시절 화려했던 박마리아의 행적이 프란체스카와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시사한다. 일제 말기 국일관 지배인의 부인에게 불과햇던 박마리아에게 해방 직후 정계의 햄식으로 등장한 이승만과 프란체스카는 권력을 향한 튼튼한 동아줄이었다.

해방 후 박마리아의 사회 활동은 YWCA를 중심으로 한 여성 운동과 이화여대 교수로서의 호라동이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놀랄 만큼 수직 상승을 한 박마리아의 사회적 지위는 남편 이기붕의 정치적 입지 강화 및 프란체스카와의 돈독한 관계에 근거한 것이었다.

1945년 10월 이승만이 귀국하자 이기붕은 이승만의 서무담당 비서로 일하게 되었다. 박마리아 역시 YWCA 문화부장을 맡는 한편 이화여대 영문과 교수가 되었다. 이기붕이 이승만정권의 2인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기붕의 행정적인 자질에 부분적으로 기인하긴 했지만, 상당 부분은 박마리아가 공식·비공식적으로 프란체스카와 맺고 있던 특이한 관계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보다 늦게 남한에 들어온 프란체스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그때까지 이승만을 수발하던 임영신(任永信)과 윤치영(尹致映)의 부인을 돈암장(敦岩壯)에서 몰아낸 것이었다. 이승만과 임영신의 관계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론 프란체스카에게 비서 이기붕의 부인이자 이화여대 영문과 교수로 유창한 영어를 구사할 줄 아는 박마리아는 좋은 한국어 선생이자 개인비서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프란체스카는 한국어를 구사할 줄 몰랐기에 이승만과도 영어로 의사 소통을 했고, 영어를 모른는 사람과는 일체 접촉을 안했다고 한다. 박마리아 역시 권력에 이르는 지름길을 발견하고 프란체스카와의 개인적 유대를 돈독히 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이기붕의 정치적 입신에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심지어 박마리아는 프란체스카와 밀착된 관계를 유지했다. 한국 정치에서 남편 간의 수직적 위계질서가 부인들의 수직적 위계 질서와 정비례하게 된 것도 이승만 정권 시절에 형성된 특성인 셈이다.

9148년 7월 24일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이기붕은 대통령 비서실장이 되었고, 1949년 6월에는 서울특별시장으로 임명되는 등 출세 가도를 달렸다. 이에 정비례해 박마리아의 위치가 여성계와 정계에서 부상되기 시작했다. 1949년 4월 대한부인회 서울시 본부 창립식에 창설 위원으로 참가한 박마리아는 스스로 부회장을 자천해 선출되었다.

이기붕은 1951년 5월 국방부 장관에 임명되어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 사건을 수습했고, 이제 본격적으로 독재 정권의 철저한 하수인이 되어 나갔다. 이승만의 장기인 '쓰고 버리는 카드'활용에 적극 동참한 것이다. 이기붕은 1951년 12월 이승만의 지시에 따라 조선민족청년당(이하 족청)계와 함께 자유당을 창당해 발췌 개헌안 통과에 일익을 담당했다. 1953년 9월부터는 족청계 숙청에 나서 자유당 총무부장이 되었고, 같은 해 12월 자유당 중앙위원회 의장이 됨으로써 자유당의 제2인자로 자리를 굳혔다. 1954년 3월의 자유당 제5차 전당대회에서는 자신의 반대파인 배은희(裵恩希), 이갑성(李甲成)을 축출하고 당 조직을 장악, 5·2-선거에서 승리했다. 이기붕은 이승만이 한민당, 족청 등을 적절히 활용하다 용도 폐기하는 것을 주의깊게 관찰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그것을 적절히 이용한 것이었다. 박마리아는 1952년 4월 이화여자대학교 문리대 학장에 취임했고, 같은 해 자신이 식민지 시절부터 몸담아온 YWCA의 회장이 될 수 있었다.

1954년 이기붕이 명실상부한 권력의 제2인자로서 지위를 확고히 해 이기붕은 민의원 의장에 선출되었고, 이승만의 종신 집권을 위해 초대 대통령 중임 제한의 철폐를 골자로 한 세칭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안의 날치기 통과를 주도했다. 박마리아는 같은 해 9월 대한부인회 전국 대회에서 최고우원으로 선출되어 4백 만 회원을 가진 여성 단체의 지도자가 되었다.

1956년 제3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으로 출마했던 이기붕은 낙선했지만, 박마리아는 여성으로선 최고 정점에 도달했다. 당대 최고의 조직력을 갖는 대한부인회 대표 최고위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화여대 부총장이 되었고, 한편으로 명예 법학 박사 학위룰 수여받기도 했다. 당시 이대 총장은 김활란이었다. 김활란은 이대에만 40여 년 봉직했지만, 정작 명예 박사 학위는 이보다 10년 뒤인 1966년에야 받았다. 때문에 당시 박마리아가 부총장이 되면서 제10호 명예 박사를 받은 사실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지만, 이미 그 누구도 시비를 삼을 수는 없었다.

이 무렵부터 박마리아는 자신이 직접 정치에 발을 들여놓기로 마음 먹은 것으로 보인다. 1954년 5·20선거 때 전북 무주군(茂州郡) 출마를 강력히 희망한 바 있었던 박마리에게 민주적 절차나 과정, 민의는 소소한 일에 불과했다. 1952년 YWCA회장으로 당선된 이래 박마리아는 정치, 종교, 교육, 여성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를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박마리아가 살선 서대문집은 이제 '서대문 경무대(景武臺)'로 불리기 시작했고, 어용 문인들이 나서서 이기붕을 치켜 올리면서 소위 '만송족(晩松族)'까지 출현할 지경이 되었다.



 ●아들까지 권력의 제물로 바쳤지만
 박마리아 권력욕의 최고 상징은 아마도 아들 이강석을 이승만의 양자로 보낸 사건일 것이다. 원래 박마리아와 이기붕 사이엔 장년 이강희 , 장난 이강석 차남 이강욱 등 세명의 자녀가 있었지만 장년가 이화여중 재학중 요절했기 때문에 아들만 둘이 있던 셈이었다.

둘 다 재혼이었던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사이에 소생이 없었던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승만에겐 전처인 박승선(朴承善)과의 사이에 봉수(鳳秀)란 아들이 있었지만 미국 체류중에 병사했으며 이승만은 그 아들을 늘 잊지 못했다고 한다. 아들에 대한 이승만의 집착, 이강석에 대한 프란체스카의 애정이 박마리앙의 권력욕과 손바닥을 마주치듯이 일치한 것이 바로 이강석의 양자 입적이었다. 1957년 3월 26일 이승만의 생일에 맞춰 이강석은 정식으로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양자 입적후 이강석과 관련된 추문 역시 들끓었다. 가짜 이강석이 전국을 휘젓고 다니는 한편, 교육계의 아부꾼들은 이강석을 서울대 법대에 부정 입학시킴으로써 서울대 법대생들이 동맹 휴학에 돌입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해싿. 일제 말기에 천황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조선의 아들 딸들이 전장에 나가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 목청을 드높였던 박마리아가 이제는 자식을 권력의 대가로 바치게 되는, 비정상적인 시대상이었다.

박마리에게 더 이상 장애물은 없었다. 1959년 대한부인회 회장으로 재선된 박마리아는 부인회 간부진을 장·차관 부인들과 친여(親與) 성향의 기업체 사장 부인들로 채움으로써, 대한부인회를 완전한 정치 도구로 삼는데 성공했다.

1960년 3월 15일 제5대 정·부통령 선거가 결정되고, 이기붕이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자 박마리아의 활동은 더욱 노골화되었다. 제4대 부통령 선거에서 장면(張勉)에게 패배했던 이기붕은 경찰 행정 조직을 통한 광범위한 부정 선거를 계획했고, 박마리아 역시 상공장관 김일환(金一煥), 내무장관 최인규, 치안국장 김종원(金宗元)에게 강력한 부정 선거 압력을 행사했다. 또한 대한부인회 총본부, 지방 시도 본부장, 시·군 지부장들은 자유당 중앙위원 상임위원으로 채워졌다. 나아가 최인규의 부인 강인하를 대한부인회 서울시 본부장에, 김법린(金法麟)의 부인 박덕순(朴德純)을 대한여자청년단체장에, 쌍용 그룹 김성곤(金成坤)의 부인 김미희(金美姬)를 부단장에 임명하는 등 여성단체를 선거에 이용하기 위해 박차를 가했다.

1959년 7월 대한부인회 전국 대회에선 자유당의 정·부통령 후보인 이승만과 이기붕을 전면 지지한다는 결의를 채택함으로써 박마리아의 정치적 술수는 최고조를 이루었다. 여성 단체들의 정치 행동 부대화에 반발한 대한부인회 최고위원 임영신이 부통령 출마를 선언하자 박마리아는 대한부인회와 대한여자청년단의 이름으로 "대통령에 이승만 박사, 부통령에 이기붕 선생을, 임영신의 출마는 반동 행위이다"는 성명을 신문지상에 발표하기까지 했다(1960년 2월 17일자).

대대적인 부정 선거 결과 이기붕읜 제5대 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을 정점으로 한 부정 선거의 수혜자들은 십여 년 넘게 지속된 독재 정권을 향한 민중의 분노에 부딪혀야 했다. 절망의 심화와 빈곤의 악순화, 인간적 기본 권리와 초보적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이 모든 분노의 저류에 흐르고 있었다. 때문에 4·19혁명은 그 시발점이 어디였든 간에 용암처럼 분출될 수 밖에 없었다. 3월 15일 마산을 필두로 항쟁은 전국적 양상을 띠며 전개되었지만, 박마리아는 태연했다. 권력을 향유할 줄은 알았지만, 그것을 유지하거나 사용할 자질이나 판단 능력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지금 이 글을 쓰며 마산 소요 사건 재연의 비보를 들었다. 특히 군중의 앞장을 설 서 외치고 떠들던 사람이 학생이었다는 말을 들었다. 슬프고 마음 아픈 일이다. 신 의 섭리에 순종할 줄 알고, 신을 두려워할 줄 아는 국민이라야 위대한 국가를 건설 할 수 있다는 것은 역사가 웅변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신을 두려워하 는 국민을 기르느냐 하는 대답은 종교 교육을 잘 하여야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대학생과 종교』, 『이대학보』, 1960년 4월 15일).

 소요 군중 앞에 서서 외치고 떠들던 학생들을 신의 섭리에 복종시키기 위해선 종교 교육을 잘 시켜야 한다는 박마리아의 결론에 도달하게 되면, 진정 서글픔을 느끼게 된다. 이런 의식의 소유자가 한 시대를 풍미했고, 많은 이들에게 고통을 가할 수 있는 자리에 위치해 있엇다는 사실이 반증하는 어처구니없음과 암울함 때문이다.

결국 걷잡을 수 없는 대중의 압력은 박마리아의 이대 부총장 사임과 모든 공직 사퇴, 이기붕의 부통령 사퇴를 가져왔고, 나아가 독재정권의 주인공 이승만의 퇴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일단락되었다. 독재자는 하와이로 망명할 수 있었지만 그 하수인들의 말로는 비참했다. 서울 근교를 배회하던 박마리아의 일가는 1960년 4월 28일 경무대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비서가 쓰던 36호실에서 이승만의 양자이자 박마리아의 장남이었던 이강석은 두 자루의 권총으로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동생 이강욱을 차례로 쏘고 자신 역시 자살로 끝을 맺었다. 박마리아 일가의 자살은 이강석이 머리와 가슴에 총상을 입은 채 발견됨으로 타살의 의문을 남겼지만, 이승만 독재 정권의 몰락과 함께 곧바로 묻혀지고 말았다.

 식민지에서 교육 받은 극소수의 여성 지신인으로,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행세하면서 친일과 반민족·반민주의 길을 걸어간 박마리아의 최후는 그 자신이 신봉하고 있던 대로 신의 섭리이자 역사의 섭리였다. 그리고 박마리아와 영욕을 함께 했고, 서대문 경무대로 불렸단 그 집만이 4·19의거 학생 도서관이 됨으로써 잊혀지지 않는 교훈으로 남았다.



 ■ 참고문헌
정충량, ≪이화 80년사≫, 이화여대출판부, 1967.
민숙현·박해경, ≪한가람 봄바람에≫, 지인사, 1981.
박용만, ≪경무대 비화≫, 한국정경사, 1965.
≪만송 리기붕 선생≫, 국제 시보사, 1960.
≪친일파 군상≫, 국제시보사, 1960.
≪한국 YWCA 반 백년≫
≪한국 여성 운동사≫

Comments

반 아편 2003.10.27 17:35
열심이십니다. 많은 성과 기원합니다.
혹시 매국망령 함석헌에 대해서도 쓰시면 좋겠네요.
그개도 "뜻으로 본 한국사" 에서 일제의 한국침략을 한국의 죄값이라던데. 천벌을 받을 개놈들.
빨래거둬! 2003.10.26 23:47
안녕하세요! "날이 새면 언제나"님 흐흐..어째 쑥스럽네요!

감기 걸려서 콧물이 한도 끝도 없네요!  감기 조심하시길....
독립운동가였던 개독 "김마리아"랑 무척 헷갈렸습니당..ㅎㅎ 김마리아와 고황경(친일파)은 버젓이 국어 교과서에도 나왔었는데....
고황경의 평소 모습은 지척에서 자주 대했었는데..너무도 부드럽고 몽실몽실 토토실한 ...일반적 교육자의 모습이었지여....실망도 유분수입니다...죽은 개독 다시 보자! 친일판가 확인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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