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망친 친일파 개독(63) - 백선엽

일제하 기독교인들의 친일행각

한국을 망친 친일파 개독(63) - 백선엽

※※※ 0 6,591 2005.07.06 14:35
백선엽(白善燁 1920~ )



빨치산 토벌 지휘한 월남 반공 장교


1951 육군 제1군단장
1952 육군 참모총장
1960 연합참모본부 의장
1969 교통부 장관
1973 한국종합화합공업주식회사 사장




● 빨치산 토벌과의 숙명적 관계

백선엽. 만주에서 항일 세력을 토벌하던 만군 중위, 해방 후 체포를 피해 월남했던 청년, 그후 국방경비대에 들어가 빨치산 토벌에 깊이 관여했던 장교, 한국전쟁 때 1만 5천여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고향 평양에 1착으로 입성했던 장군, 전쟁중 ‘白야전전투사령부’ 사령관으로 ‘쥐잡기 작전'을 통해 빨치산활동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던 장성, 30대의 나이에 두 번씩이나 참모총장을 역임했던 입지적전인 군인, 그리고 전역한 이후에도 대사, 장관, 국영기업체 사장 등을 역임했던 대단히 관운이 좋았던 인물. 이상이 그의 화려했던 경력이다. 이러한 경력 중에서도 그가 월남한 반공 장교로서 빨치산 토벌과 맺었던 뗄래야 뗄 수 없는 숙명적 관계가 유독 돋보인다.


백선엽은 평양에서 진남포 쪽으로 28km떨어진 평남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에서 1920년 11월 23일 태어났다. 백선엽과 마찬가지로 남한에서 유명한 반공 장교가 되었던 그의 동생 백인엽(白仁燁)도 2년 후에 이곳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당시 그의 집안은 중간 정도의 지주로서 부근에서 비교적 명문 가문이었던 것 같다. 그의 아버지 백윤상(白潤相)도 일본 메이지(明治) 대학을 나왔다 한다. 그러나 그가 일곱 살 되던 해 부친이 사망함으로써 그의 가족은 평양 시내로 이사를 했고, 어머니가 생활을 꾸려야 했던 그때부터 생활은 어려워졌다. 약송(若松)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학비가 덜 드는 평양사범학교로 진학했다.



● 만주에서의 친일 활동

평양사범학교 졸업반 때 그는 후일 비행사로 이름을 날린 박승환(朴承煥)과 이상열(李相烈) 등 만주군관학교 학생들을 알게 돼 이들로부터 군인이 되는 게 어떻겠느냐는 권유를 받았다. 1940년 봄 그는 봉천(奉天)에 있는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만주에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부의(溥儀)를 황제로 하여 1932년 3월 수립된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이 있었다. 만주군관학교는 이러한 만군의 장교를 양성하는 사관학교였다. 여기에는 일본인, 중국인, 조선인 등이 입학했고 이들은 졸업 후 만군에 배치되었다. 사실상 관동군의 예하부대라 할 수 있는 만군은 주로 항일 세력의 토벌에 종사하고 있었다.


당시 만주군관학교는 처음에는 봉천에 있다가 나중에는 신경(新京)으로 옮겼는데, 다수의 조선인들이 여기를 거쳐 만군 장교로 임관되었다. 정일권(丁一權, 봉천 5기), 김찬규(金燦圭, 봉천5기로 이후 백일(白一)로 개명함), 김석범(金錫範, 봉천 5기), 최남근(崔楠根, 봉천 7기), 박임항(朴林恒, 신경 1기), 이주일(李周一, 신경 1기), 김동하(金東河, 신경 1기), 박정희(朴正熙, 신경 2기), 이한림(李翰林, 신경 2기), 강문봉(姜文奉, 신경 5기) 등이 그들이다. 이들 중 성적이 좋은 정일권, 박정희 등 일부는 일본 육사에 편입하기도 했다.


1941년 12월 만주군관학교를 제9기로 졸업한 백선엽은 만주 동북부의 자므스(佳木斯)부대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곧 그는 ‘간도특설대'의 조선인 부대로 전출, 이후 3년 동안 거기서 근무하게 된다. ’간도특설대'는 종래의 조선인 국경감시대를 폐지하는 대신 1938년 12월 1일 창설되었는데, 사령부는 간도성 연길(延吉) 부근 명월구에 있었다. 보병 기갑 혼성 부대로 출발한 이 부대는 당초 360명으로 발족되었으나 나중에는 800명 가까이 늘어났다 한다. 부대장은 일본인 장교였으나 중대장의 반 수와 소대장 이하 전 사병은 조선인이었다.


이 부대는 1938년 12월 창설 직후 간도, 길림, 통화 일대에 출몰하는 안창길(安昌吉), 양정우(楊靖宇), 진한장(陳翰章), 최현(崔賢) 등의 반만 항일(反滿抗日) 세력의 토벌에 투입되었다. 백선엽이 이 부대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는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는 ‘간도특설대'에서 김찬규, 송석하(宋錫夏), 김석범, 신현준(申鉉俊), 이용(李龍), 임충식(任忠植), 윤춘근(尹春根), 박창암(朴蒼岩)등과 함께 근무했음을 밝히고 있다(《군과 나》, 111쪽).


1944년 봄 열하성(熱河省)과 중국 북부에서는 팔로군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이에 일제는 만군 3개 여단을 파견하게 되었는데, 백선엽이 속한 중대도 여기에 차출되어 열하성에 진출하게 되었다. 그는 열하성의 팔로군 토벌에 종군하여 특수공작, 특히 정보 수집으로 공적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열하의 작전이 끝나자 그는 원대복귀명을 받고 휴가를 얻어 고향인 평양에 들러 결혼한 후 소속 부대에 귀대했다. 그러나 귀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일제가 패망하게 되었고, 그는 만주로 진격해 오는 소련군을 만나 명월구에서 무장해제를 당했다.



● 일제의 패망과 월남

일제의 패망은 그 밑에서 부일(附日)했던 친일파 조선인들, 특히 직접적으로 항일 운동의 진압에 종사했던 조선인들에게는 파멸을 의미했을 것이다. 백선엽은 이러한 파멸을 앞에 두고 신속하게 대처한다. 소련군에 의해 무장해제 당했을 때 그는 소련군을 따라온 한인 통역에게 조선 사람의 장래가 어떻게 될지 물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조선은 곧 독립된다. 국호는 동진(東震)공화국이 될 것이다. 당신은 여기 있으면 붙잡혀 시베리아로 유배된다. 빨리 고향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1945년 8월 하순, 그는 부인과 함께 그곳을 떠나 도보로 고향을 향했다. 그는 연길과 용정(龍井)을 거쳐 무산(茂山)에서 두만강을 건너 동해안 성진(城津)으로 향했다. 성진에서 평양으로 들어갈 교통수단을 찾았으나 해방의 혼란으로 말미암아 교통은 마비된 상태였다. 그는 계속 동해안을 따라 함흥(咸興), 고원(高原)까지 내려온 다음, 태백산맥으로 들어가 양덕(陽德)을 거쳐 9월 말 평양에 도착했다. 소련군을 피하기 위해 그는 1개월에 걸쳐 장장 800km를 걸어서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일단 평양으로 피신해 온 백선엽은 마침 고당 조만식(古堂 曺晩植)의 비서실장으로 있던 친척뻘인 송호경(宋昊經)의 소개로 고당의 비서실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당시 평양에서 김일성(金日成)이 급격히 부상되자, 백선엽은 만주국의 군관으로 만주에서 공산계 게릴라들을 추격해 다닌 사실이나 열하성에서 팔로군 토벌에 공을 세운 전력이 폭로될까봐 무척 우려했던 것 같다. 10월 하순에는 소련군의 지도로 창설된 적위대(赤衛隊)에 의해 그의 동생 백인엽이 맡고 있던 고당의 경호대도 해산되었다. 메이지 대학을 다니던 중 학도병으로 나가 일본 항공병 소위로 해방을 맞았던 백인엽은 해방 직후 고당의 경호를 맡고 있었다.


이때쯤 원용덕(元容德)이 백선엽을 찾아왔다. 일제가 패망했을 때 원용덕, 정일권 등의 만군 장교들은 신경에 모였다. 이들은 치안 조직을 만들어 '동북지구 광복군 사령부'라는 이름을 내걸고 소련군의 눈을 피해 국내로 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원용덕은 그 마지막 대열을 이끌고 국내로 돌아오다가 평양에 들린 것이다. 원용덕의 방문을 받은 백선엽은 불안하고 초조한 빛을 감추지 못한 채 자신은 감시당하고 있다며 지체없이 남하할 것을 권했다. 원용덕과 그 일행은 곧장 평양을 떠났다. 얼마 후 정일권도 백선엽을 찾았다. 정일권 역시 원용덕 등과 같이 국내 귀환을 준비하다가, 소련군에게 억류되어 시베리아로 끌려가던 중 수송열차에서 뛰어내려 도망쳐 오던 길이었다. 정일권도 백선엽의 동생 백인엽과 함께 그해 12월 초 남행길에 올랐다.


12월 말에는 김찬규와 최남근이 백선엽을 찾았다. 백선엽은 이들과 함께 남행을 결심했다. 장사꾼으로 변장한 이들은 한 작은 역에서 기차를 타고 해주에서 내렸다. 밀항선을 마련하지 못한 그들은 12월 27일 밤 청단(靑丹) 부근에서 38선을 넘었다. 도중에 소련군에 발각되어 총격까지 받았으나 무사히 38선을 넘을 수 있었다. 38선을 넘은 직후 논두렁에서 한숨 돌리고 있을 때, 김찬규가 “서울에 가면 새로운 마음으로 일을 해야겠다"며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이름을 ‘백일(白一)'로 고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후 김찬규는 김백일이라는 이름으로 활약하게 된다. 그들은 다음해인 1946년 1월 초순 서울에 도착했다.



● 국방경비대 참여와 제5연대 창설

당시 만주와 북에서 친일을 했던 사람들은 처벌을 피해 남으로 남으로 탈출했다. 그들 중 상당수는 군, 경찰, 반공청년단 등 반공 기구에서 활동하게 된다. 서울에 도착한 백선엽, 김백일, 최남근 세 사람도 곧 군에 참여했다. 이들은 이미 미군정의 국방경비대에 참여하고 있던 정일권과 백인엽의 권유를 받고 협의 끝에 국방경비대에 참여하게 됐던 것이다. 1946년 2월 26일 이들 세 사람은 군사영어학교를 거친 것으로 하여 중위로 임관, 연대 창설 요원의 보직을 부여받았다. 중위로 임관된 것은 만군에서의 과거 경력이 감안되었기 때문이었다. 다음은 그들이 이응준(李應俊) 군사국 고문에 의해 임관, 보직을 부여받던 장면(《한국전 비사》상권, 101~102쪽)이다.


제군들이 오기를 기다렸소. 젊은이들이 연대를 창설하는 데 몹시 고생하고 있으니, 최남근 중위는 대구에 가서 제6연대를, 백선엽 중위는 부산에 가서 제5연대를 창설해주게. 몹시 고생들 하고 있으니 곧 부임해 주기 바라네. 그리고 김백일 중위는 전라북도에 가서 제3연대 창설을 담당해 주기 바라네. 젊은이를 붙여 돕게 할 테니 잘 부탁하네.


즉 이들은 서류상으로만 군사영어학교 졸업생으로 되어 있을 뿐, 태릉(泰陵)에 있는 학교에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채 임관되자마자 임지로 발령을 받았던 것이다. 그 당시 국방경비대 창설을 막 시작하여 장교가 부족했던 미군정청은 과거의 군 경력만을 감안하였고, 그 경력이 어떠했던 간에 즉시 임관, 배치시켰던 것이다. 그리하여 만군 중위 백선엽은 하루아침에 국방경비대 중위가 되었다. 그리하여 해방 초두부터 친일파들은 다시 활개를 치기 시작한 것이다.


1946년 3월 1일 백선엽은 이후락(李厚洛), 백남권(白南權), 김익렬(金益烈) 등과 함께 부산 제5연대에 부임했다. 백선엽이 부임했을 때 박병권(朴炳權), 이치업(李致業), 오덕준(吳德俊) 등이 이미 연대 창설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으나 선배격인 백선엽이 대대장 겸 A중대를 맡게 되었다. 이때 부산지구 제5연대에 모병된 사람들 중에는 노재현(盧載鉉), 박진경(朴珍景), 김창룡(金昌龍) 등이 있었다. 김창룡은 이후 경비사관학교를 거쳐 장교로 임관된 후 군 내부의 좌익 세력 검거에 활약하게 된다. 백선엽은 이후 2년 동안 제5연대에서 중령까지 진급했다. 1947년 12월 1일 부산에서 제3여단이 창설, 제5연대가 그 예하에 들어가게 되자 백선엽을 제3여단 참모장으로 전보되었다가, 1948년 4월 11일에는 통위부 정보국장 겸 국방경비대 총사령부 정보처장에 보직되었다.



● 빨치산 토벌과 월남 반공 장교

정보국장을 맡게 된 백선엽은 그의 증언록 《실록 지리산》에서 직책상 폭동 진압과 빨치산 토벌에 적극 관계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아마도 폭동이나 빨치산 활동에 대한 정보 수집과 분석이 주된 활동이었던 듯하다. 4․3제주민주항쟁과 관련하여 그가 직접 행한 역할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그의 평가는 그가 4․3제주민중항쟁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시사해 준다.


요즘 들어 사회 일각에서 4․3사건을 미군정과 경찰에 대항한 민중항쟁으로 보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데 이는 당시 29만 제주도민을 모두 폭동 동조자로 내모는 일이 아닐 수 없다.
4․3사건은 … 가장 커다란 요인은 당시 제주도가 처해 있던 특수한 환경을 이용해 무력으로 목적을 달성하려 했던 좌익 세력들의 집요한 공작이었다(《실록 지리산》, 110~111쪽).


한편 여수․순천 사건과 관련, 선견대의 일원으로 광주에 내려갔던 백선엽은 송호성(宋虎聲) 사령관과 합류해 진압 작전에 깊이 관여했고, 미 군사고문관인 하우스만(James Hausman)과 밤을 새워 가며 전황을 점검하고 작전 계획을 짰다고 한다.


여수․순천 사건 진압 직후 일시 숙군 업무를 지휘했던 백선엽은 1949년 7월 22일 광주 주둔 5사단장으로 전직되어, 직접 호남 지역의 서남 지구 빨치산 토벌을 지휘하게 되었다. 당시 빨치산들은 7월 공세, 9월 공세 등 대대적인 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9월 중순 그는 자기 휘하 15연대 소속의 1개 대대가 광양에서 빨치산의 습격을 받아 그 중 수백 명이 생포되는 '광양 사건'을 당하기도 했다. 또한 휘하의 제15연대가 전남 보성군 문덕면 한천 부락을 통비(通匪) 부락이라 하여 3백 호를 불태워 버린 일도 있었다. 백선엽은 그 일과 관련,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이 직접 사죄했다고 했다.


1949년 겨울에 들어서면서부터 상황은 반전되었다. 식량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빨치산 세력은 진압군의 동계 토벌로 붕괴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백선엽이 담당했던 호남의 서남 지구에서도 빨치산 토벌이 본격화되었고, 10월에는 전남도당 유격대 사령관인 최현(崔賢)이 사살된 것을 계기로 백아산, 모후산, 조계산 등 서남 지구 빨치산 거점들이 쉽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군경 합동 작전으로 진행된 1949년의 동계 토벌은 빨치산들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입히고 1950년 3월 막을 내렸다. 호남 일대에도 1950년 2월 5일 계엄령이 해제되었다.


일제 말기 간도특설대에서 반만 항일 세력들을 뒤쫓던 경험과 열하성에서 팔로군을 토벌했던 백선엽의 경험은 서남 지구에서 빨치산을 토벌하던 이때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이와 관련, 그는 “군․관․경이 긴밀한 협조 체제를 갖춰야만 빨치산 토벌에 성공을 기할 수 있다는 교훈은 이미 만주군 시절 만주와 북간도, 만리장성 서쪽 기동(冀東) 지구에서의 토벌 경험에서 체득한 바 있다"고 밝히고 있다(《실록 지리산》, 284쪽). 1950년 4월 백선엽은 제1사단장으로 전보되었다.



● 최남근의 사형과 박정희의 구명

백선엽은 빨치산 세력과 이 같은 숙명적인 인연을 맺고 있던 중 숙군(肅軍)에도 깊이 관여하게 된다. 즉 여수․순천 사건은 군 내부에 숙군의 회오리를 몰고 왔고, 당시 정보국장으로 있던 백선엽은 전군적인 숙군 작업을 총지휘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숙군에 필요한 정보는 군 자체에서 수집한 정보와 경찰에서 넘겨 준 자료가 기초가 되었다. 특히 경찰에서 넘겨 준 자료에는 일제 당시부터 좌익혐의자로 지목받았던 사람들 중 국방경비대에 입대한 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숙군의 선풍이 불자 육군 본부 별관은 사실상 숙군사령부가 되었다. 2층에는 혐의자 체포를 맡았던 헌병사령부가 있었고 3층에는 정보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안일(金安一) 정보국 특별조사과(SIS) 과장과 제1여단 정보참모 김창룡 대위가 조사반을 지휘했고, 특히 일제 때 관동군의 정보 계통에서 근무했던 김창룡은 숙군 과정에서 악명을 떨쳤다. 조사반원 중에는 군의 요청에 따라 경찰 정보 계통에서 일하다 이때 정보국으로 전속된 사람들도 많았다. 또한 정보국은 김종필(金鍾泌), 이병희(李秉禧), 이영근(李永根), 이희성(李熺性) 등 당시 막 임관된 육사 8기생들을 조사관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여수․순천 사건 직후부터 이듬해 7월까지 진행된 숙군 과정에서 전군의 5%에 해당하는 총 4, 749명의 장병들이 처벌을 받았다. 재판 결과 90% 정도는 불명예 제대를 했지만 나머지는 사형 또는 유기징역에 처해졌다. 그렇다면 500여 명 정도가 사형 또는 유기징역에 처해진 셈이다.


숙군 과정에서 그와 함께 사선을 넘었던 최남근 중령도 여수․순천 사건과 관련, ‘지리산으로 들어가 김지회와 공모한 죄'로 걸려들었다. 이와 관련하여 백선엽은 당시 정보국 과장이었던 김점곤(金點坤)이 제출한 보고서를 읽고 “이제는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심정을 굳혔다고 밝히고 있다(《실록 지리산》, 219쪽). 결국 최남근은 사형 당했다. 그가 죽을 때 외친 소리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대한민국 만세!"였다고 한다.


한편 백선엽은 숙군 과정에서 검거되었던 박정희의 구명에 대해서는 적극적이었다. 당시 박정희는 육군사관학교 좌익 용의자의 한 사람으로 검거되어 사형 선고까지 받은 상태였다. 1949년 초 어느 날 방첩대의 김안일 소령은 백선엽에게 박정희 소령이 조사 과정에서 군내 침투 좌익 조직을 수사하는데 ‘적극 협조했다'는 점을 들어 박정희를 만나 줄 것을 부탁했다. 박정희를 만난 백선엽은 도움을 부탁하면서도 시종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았던 그를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 한다. 백선엽은 정보국 고문관인 리드 대위를 통하여 하우스만 대위와 로버츠(William Roberts) 준장에게 박 소령의 구명을 요청했고, 육군 본부에 재심사를 요청하여 박정희에 대한 형 집행정지 조치를 얻어냄으로써 그를 불명예 제대시키는 선에서 문제를 매듭지었다. 그후 그는 박정희가 문관 신분으로 정보국에서 근무하도록 배려했다.


무고한 사람들이 처벌됨으로써 말썽이 되었던 숙군 과정에 대해 그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옥석을 가리기 힘들었던 만큼 무리한 일이 없었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바로 1년 후에 터지는 동족상잔의 대 전란을 앞두고 적어도 군내의 좌익 조직을 일소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으로서도 다행이다(《실록 지리산》, 220쪽)."



● 백(白)야전전투 사령부의 ‘쥐잡기 작전'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백선엽은 제1사단장으로 문산 방면의 방어를 맡고 있었다. 그러나 국군이 후퇴하면서 제1사단도 같이 밀렸다. 인천상륙 작전 이후 유엔군이 북진할 때 그의 사단은 미 제1기갑 사단을 제치고 1착으로 평양에 입성하기도 했다. 그때의 감격을 그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일개 월남 청년이 장군이 되어 1만 5천여 한미 장병을 지휘하며 고향을 탈환하러 진군하는 감회를 어찌 필설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내 생애 최고의 날이 바로 이 순간이었다. 지나치는 부락에는 벌써 주민들이 내건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다(《군과 나》, 103쪽).


1951년 4월 7일 백선엽은 고 김백일 소장의 후임으로 제1군단장에 임명되었다. 타고 가던 경비행기가 악천후로 대관령 산중에 추락하면서 제1군단장이었던 김백일이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김백일은 백선엽과 ‘간도특설대'에서 같이 근무했고 38선도 같이 넘었던 동료였다. 제1군단장으로 근무하던 중 1951년 7월 그는 휴전회담 한국측 대표를 잠시 맡았다가 9월에 다시 군단장에 복귀했다.


그해 11월 백선엽은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을 소탕하는 토벌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부대 이름은 ‘백(白) 야전전투사령부(Task force Paik)', 작전 명칭은 '쥐잡기 작전(Operation Rat Killer)', 그 예하 부대는 수도사단과 제8사단을 비롯하여 서남 지구 전투 사령부 등의 3개 사단과 태백산 지구 전투경찰 사령부, 지리산 지구 전투경찰 사령부 등의 4개 전투경찰 연대 및 7개 전투경찰 대대 등 전체적으로 4개 사단 규모였다. 당시 지리산에는 이현상(李鉉相)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남부군단의 주력 3, 800여 명이 출몰하고 있었다.


12월 초 제1기 작전이 개시되었다. 제1기 작전은 지리산이라는 ‘거대한 독' 속에 갇힌 빨치산들을 토끼몰이식으로 포위, 압축함으로써 지리산 근거지를 분쇄하는 것이었다. 19일부터 시작된 제2기 작전은 지리산 외곽의 거점을 소탕하는 것이었다. 이듬해인 1952년 1월 15일부터 시작된 제3기 작전은 지리산을 재차 포위, 공격함으로써 잔존 세력들을 소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해 1월 말 지리산 빨치산 토벌작전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육본 자료에 따르면 토벌 결과 5, 800여명이 사살되고 5, 700명이 포로가 되었다. 미측 자료에는 9천여 명이 사살 또는 포로가 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숫자는 토벌 이전에 파악하고 있었던 지리산 3, 800명, 그 주변 4천 명이라는 예상 숫자를 훨씬 상회하는 것이었다. ‘쥐잡기 작전'은 지리산과 그 주변의 빨치산들에게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그럼에도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 작전 본부는 1952년 3월, 아직도 3천 정도의 빨치산들이 그 지역에 남아 있다고 추정했다.


예상보다 많은 빨치산들이 사살 또는 포로가 된 것은 빨치산들의 숫자가 예상보다 훨씬 많았거나 아니면 순수한 민간인들이 희생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토벌 과정에서의 진압군의 야만적인 비행은 아직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별로 없었을까? 아니면 엄청난 진상이 은폐되어 있을까? 이와 관련해서 백선엽 자신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지휘부의 지침과는 달리 말단 부대가 비행을 저지르고 허위 보고로 무마하는 경우, 그것을 완전히 확인해 진위를 가리기란 참으로 어렵다......당시로서는 내가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토벌 부대의 총사령관으로서 나는 혹시라도 부하 장병들의 비행으로 희생된 넋들이 있었다면 그들의 명복을 빌고 싶은 심정이다(《실록 지리산》, 78쪽).



● 승승장구의 관운

백선엽은 1952년 4월 제2군단장으로 보직되었고, 그해 7월에는 부산정치파동 과정에서 병력 파견 요청을 거부한 이종찬 총장의 후임으로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 32세. 그후 그는 1954년 2월 제1야전군 사령관으로 잠시 전직되었다가 1957년 5월 재차 참모총장에 역임되었다. 이와 관련, 이승만의 후원을 받았던 만군 출신, 특히 이북 출신의 젊은 장교들은 전쟁을 거치면서 군 내부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들은 크게 정일권이 이끄는 함경도 출신의 관북파와 백선엽이 이끄는 평안도 출신의 서북파로 나뉘어 있었고, 이승만은 이들을 경쟁시킴으로써 군의 충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백선엽과 정일권을 교대로 참모총장에 임명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의도에서였다. 1960년 5월 31일 연합참모본부 의장을 끝으로 그는 군에서 전역했다. 이후 그는 중화민국을 비롯, 각국 대사를 역임했고 1969년 10월에는 교통부 장관을 역임했다. 1970년대에는 충주비료주식회사 사장, 호남 비료주식회사 사장, 한국종합화학공업주식회사 사장 등을 지냈다.


이 같은 승승장구의 화려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백선엽 개인 자체에 대한 평가는 오히려 소박하다. ‘선천적인 재능이 있는 장군이라기보다 꾸준히 자신의 노력으로 쌓아 올린 후천적인 입지전적 장군' ’절대로 남을 궁지에 몰아 놓지 않는 사람' 또는 '남을 도와주는 것을 일종의 도락으로 여기고 있는 사람' 등등.


일제 치하에서 해방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자주적인 통일 국가가 만들어지기를 원했다. 그러나 현실은 남쪽에는 친미, 북쪽에는 친소적인 북단국가가 들어서는 반대의 결과가 되었다. 그러한 뒤틀린 역사 속에서 친일 장교 출신들은 친미적인 반쪽 분단국가의 반공 장교로서 빨치산들을 토벌, 말살시키는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친일의 매국은 반공의 애국으로 변신했다. 만군 출신의 월남 반공 장교였던 백선엽의 눈부신 성공 이면에는 이러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있다.

□ 정해구(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경희대 강사)



■ 참고문헌

백선엽,《실록 지리산》, 고려원, 1992.
백선엽,《군과 나》, 대륙연구소 출판부, 1989.
부르스 커밍스․존 할리데이, 《한국전쟁의 전개과정》, 태암, 1989.
佐佐木春隆,《한국전 비사》상중하, 병학사, 1983.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한국전쟁사 : 해방과 건군》, 국방부, 1967.
존 R. 메릴, 《침략인가, 해방전쟁인가》, 과학과 사상,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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