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망친 친일파 개독(57) - 장지연

한국을 망친 친일파 개독(57) - 장지연

※※※ 0 5,730 2005.06.12 13:24
▲ 위암 장지연 (1864~1921)




위암 장지연의 친일 한시 공개...식민통치 찬양
[오마이뉴스 2005-06-01 22:42]
[오마이뉴스 조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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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위암의 친일시.
ⓒ2005 민족문제연구소
항일 언론인으로 알려진 위암 장지연(1864∼1920)의 친일시가 공개돼 파문이 예상된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위암이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1916년 12월 10일자 2면에 신임 총독으로 부임하는 하세가와를 환영한다는 제목의 시 환영 하세가와(長谷川) 총독을 썼다고 1일 공개했다.

다음은 위암의 한시 내용이다.

채찍 모자 그림자 수레먼지 끼고 오니

문·무관 분분히 새로 악수 나누네.

한강의 바람과 연기가 원래 낯이 익으니

차가운 매화는 예전처럼 기쁘게 웃으며 맞이하도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하세가와가 총독으로 조선에 다시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는 내용의 자발적 친일시"라며 "문학작품의 특성상 노골적 친일표현은 없지만 친일의 강도가 결코 낮지 않다"고 지적했다.

하세가와는 1905년 이등방문과 함께 고종을 협박하여 을사보호조약 체결을 강요하고 통감부의 임시통감을 지낸 인물이다. 특히 하세가와는 2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뒤 공포정치와 무단통치를 통해 3·1운동을 잔혹하게 탄압한 인물로 알려져있다.

위암, 항일 언론인에서 친일 언론인으로 변절...일제 식민통치 찬양

이번에 공개된 위암의 친일시는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가 지난 1987년 한국한문학회에 발표한 장지연 시세계의 변모와 사상(1987년 한국한문학회)에도 수록되어 있다.

강 교수는 이 글을 통해 위암의 친일행적과 친일시의 문제를 지적했다.

강 교수는 이 논문에서 "1897년부터 1910년 8월 합방 이전까지 위암의 삶은 시련과 고뇌에 찬 것이었지만 합방 이후 그 이전과 완전히 다른 행동과 의식을 보여주게 된다"며 "사망시(1920년 10월 2일)까지 술과 시, 실의와 좌절의 연속이었으며 한편으로, 친일이라는 모순된 행동을 보인다"고 지적했다.

강 교수는 또한 "황성신문 사장·논객으로 그리고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의 필자로 항일 언론의 선두에 섰던 그가 침략자의 대변지에 고정필자로 등장하는 이해할 수 없는 변신을 감행한다"고 밝혔다. 위암은 1914년부터 1918년 7월까지 매일신보에 친일 시와 논설 등을 730여편을 썼다.

위암은 이 당시 매일신보 사장 아베 미쓰이에, 매일신보 감독 도쿠토미 소호 등을 비롯해 여계형, 정만조, 최영년 등 친일파와 어울렸으며 특히 아베 미쓰이에 사장과는 매우 친하게 지냈다고 강 교수는 주장했다.

위암은 매일신보 1918년 1월 1일자에 대정육년시사(大正六年詩史)란 제목의 시를 썼다. 1917년 6월 순종이 일본왕 대정(大正)을 만나러 간 사실을 소재로 한 이 시는 일제 식민통치를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찬양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李王 전하 동해를 건너시니

관민이 길을 쓸고 전송했네.

오늘같은 성대한 일은 예전에 드물던 바

일선융화(日鮮融化-일본과 조선의 융화)의 서광이 빛나리라."

또한 위암은 1910년 10월 일본이 홍수로 재난을 겪고 있는 가운데 일본왕이 수재지원금을 내리자 "전에 없던 호우·폭풍 많아/ 홍수 지나가자 곳곳에 재해 입었네./하사금 내리심은 구휼하는 은전이라/ 조선 인민 한 가지로 파도 같은 그 은혜에 젖었네"라고 찬양했다.

한편 김경현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은 장지연 선생의 후손에 의해 명예훼손 및 허위사실 유포혐의로 검찰에 고발됐다. 김 위원은 연구활동을 통해 위암의 친일행적을 공개한 적이 있다.

/조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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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연이 개독인 이유>
아래는 기독교 대한감리회 소속 상동교회에서 퍼온 내용임


  상동인물 - 상동청년회 정순만과 장지연에 관하여

  상동교회 출신 정순만과
장지연


가령 前駐露韓國公使 였던 李範晉은,
현금 한국인으로써 외국에 체류하는 자가 북미에 약3만인, 하와이에 약 1만인이 있고, 북미 체류자는 공립신보를 가지고있고 하와이에도 역시 한 잡지가 있어 동포를 지도한다. 그러나 포항 (불라지보스또끄-필자주) 에는 4만5천의 한인이 있으면서도 아직도 하나의 신문도 없다. 표면으로는 노국인이 경영하는 하나의 신문을 세우고 국권회복에 공고한 사상을 가진
장지연
을 초빙하여 일본의 통감정치를 공격하고 한편으로는 지방 폭도를 선동해서 일본인의 구축에 힘써야 한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 ‘재러한인신문’ 중 ‘해조에 있어서 신문지 발행의 건’) 라고 하여, 불라지보스또끄에서의 신문간행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신문간행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인물은 정순만이었던건 같다.
그는 충남 청주 출신으로 일찌기 田愚 밑에서 공부한 한학자로서(대동공보 1909/5/5 ‘정순만씨의 역사’) 1895년 을미사변 때에는 류인혁과 함께 의병에 참여 하였으며(김현구 ‘檢隱遺傳’ 하와이대학 사회과학연구소 소장), 러일 전쟁시에는 이준, 이현석 등과 함께 적십자사를 만들어 일제에 대항하다 투옥되었고, 1904년 일제가 한국정부에 대하여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자 보안회를 조직, 이를 적극 저지하였다.

또한 남대문 상동교회 청년회 부회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일제가 우리 동포 1,300명을 멕시코에 팔아 넘길때 정부에 장서를 올려 이를 항의하였다.

또한 1905년 일제가 을사 보호조약을 강행하자 전국에 있는 지사들과 단합하여 정부에 상소를 올리는 한편 종로에 나가 직접 일병들에게 대항하기도 하였다.(한무규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 정순만은 상동청년회 서기였다고 한다. “상동청년회에 대한 연구, 1897-1914, ‘역사학보’ 126, 1990, pp 84-85)

이처럼 국내에서 의병, 또는 계몽운동을 전개하던 정순만은 1906년 6월경 러시아 불라지보스또끄로 망명, 그곳에서 먼저 망명한 이상설과 회합하고, 1906년 10월 북간도 용정촌에가서 서전서숙을 설립, 그곳 동포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위하여 노력하였다 (윤병석, ‘이상설전’ 일조각, 1884, pp49-56).

정순만이 다시 러시아 지역을 찾은것은 1907년 4월 3일경으로 이상설이 이준과 함께 헤이그 밀사로 파견될 때 이상설, 이동녕과 함께 연해주를 방문하였을 때이다.

다시 불라지보스또끄로 망명한 정순만은 그 곳의 주민들로 부터 크게 신임을 받았던 것 같다. 특히 그의 항일 경력은 그 곳 토착 주민 들의 신뢰를 받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불라지보스또끄 지역의 부호인 최봉준의 장조카로써 그 곳 주민들로 구성된 민회의 재무를 맡고있던 최예부와 민회의 회장인 양성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 결과 그는 민회에서 총무겸 서기로 실질적인 책임을 맡았던 것이다. (김현구, ‘검은유전’, p 87)

민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최봉준의 장조카인 최예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잇던 정순만이 그 지역의 유지이며 실질적인 민회 지도자인 최봉준(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1, 1968, p 986) 과 접촉하게 되는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이에 정순만은 최봉준의 경제적인 부를 이용하여 국권 회복 운동의 일환으로 신문의 간행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이는 1900년 후반 그와 함께 러시아에서 활동했던 김현구가 쓴 검은유전에, 차제의 검은의 주선으로 해삼위에서 해조신문이라는 일보를 간행하게 되었고, 암암리에
장지연을 청하여 편집을 전담하게 되었는데 라고 하고 있고, 불라지보스또끄에서 간행된 한인 신문, 한인신보 1917년 10원 7일자 기사중 ‘강동쉰해’에, 최봉준은 활자기계를 사서 노코 해조신문을 창간하야 매일보를 발행하니 아령으로 처음이라. 동포에게 조국사상을 넣어주며 이목을 새롭게하니 이에 신문 저술은 정순만, 장지연등이 주장하다. 라고 한 내용과 해조신문이 창간된 후 그 신문의 실질적인 책임자인 총무의 일을 담당하고 있는 점을 통하여도 이것을 확인할 수 있다.

       - 이글은 2002. 10. 24. 재미 역사연구가 [류기원] 선생님이 University of Oregon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 정리하신 후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상동교회 관련게시물 : http://sangdong.webchurch.co.kr/zeroboard/zboard.php?id=sh&page=1&sn1=&divpage=1&sn=off&ss=on&sc=on&keyword=장지연&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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