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망친 친일파 개독(10) - 박인덕

일제하 기독교인들의 친일행각

한국을 망친 친일파 개독(10) - 박인덕

※※※ 0 2,669 2003.10.25 21:20

황국신민이 된 여성 계몽운동가


·朴仁德, 창씨명 永河仁德, 1896∼198?

1941년 임전대책협의회 위원. 1943년 조선교화단체연합회 부인계몽독려반

1945년 조선언론보국회 이사



박인덕은 반민족행위를 한 여성명사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1950년대 거의 모든 시기를 미국 등 외국에서 지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시기에는 김활란의 선배로서 '잘 생기고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재주를 갖춘' 인물로서 활자매체에 무척이나 자주 등장하던 여성이었다. 또한
그녀의 자서전적인 글 {________}(September Monkey)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여성 계몽운동가로서 화려한 활동


1896년 평남 진남포에서 출생한 그녀는 고등교육을 받은 대부분의 여성들처럼
기독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과부가 된 어머니가 기독교인이 되면서
하나뿐인 딸을 제대로 키우겠다는 신념에서 기독교계인 진남포의 삼성학교에
입학시킨 것이 그녀가 기독교와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박인덕은
선교사의 지원과 장학금으로 1912년 이화학당 중학과를 졸업하였고
1916년에는 이화학당 대학과를 졸업하였다. 아직 경성제국대학도 설립되지
않은 시기였으므로 이화학당 대학과는 국내 최고의 전문과정이었고, 학생수도
졸업생도 극히 적어 한 해 졸업생이 한 명도 없었던 적도 있었다. 이런
까닭에 졸업생은 이화학당 내에서만이 아니라 조선 사회의 주목과 기대를
한몸에 받게 마련이었다.

박인덕은 졸업과 함께 이화에서 기하, 체육, 음악을 맡아 가르쳤다.
서글서글한 눈과 이지적인 콧날에 사람을 거느리는 포용성까지도 뛰어났던
그녀는 '노래 잘하는 인덕', '말 잘하는 인덕', '잘 생긴 인덕'으로 이화학당
내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알려져 있어 프라이 당장(堂長)의 총애를
바도 있었다.

박인덕은 이 시기에 계몽운동적 차원에서 사회 참여 활동도 했다. 그러다가
3·1 운동 때에는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학생을 선동하였다는 죄목으로
동료교사인 신준려(申俊勵)와 더불어 경찰에 연행되어 4개월 동안 감옥생활을
했다. 그리고 출옥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그해 11월에 또 다시
대한애국부인회사건으로 투옥되는 고초도 겪었다.

연이은 두 번의 투옥 후에 그녀는 이화학당에서 교사생활을 하다가 1921년
그녀를 아끼던 아펜젤러(훗날 이화여전 교장이 됨)로부터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제안을 받게 된다. 즉, 미국 오하이오의 웨슬레안대학으로 유학할 수
있도록 주선을 해 주겠다는 것이었다(그의 유학 주선은 이화학당 대학과 5회
졸업생인 김활란*보다 앞섰다).

그러나 박인덕은 유학이라는 좋은 기회를 포기하고 결혼을 결심했는데, 그
결혼 상대는 김운호(金雲鎬)라는 부호였다. 박인덕이 결혼을 선택하였다는
사실은 당시로서는 주위 사람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다 주었다. 당시
이화학당의 선교사들은 자기 학교 출신의 학생들이 독신으로 남아 학교와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녀의 결혼 결심은 이화에서 절대적인 지지자들을 잃어 버리는 계기가
되었다.

결혼 후 박인덕은 1923년 9월 감리교 여자신학교에서 금주·금연운동을 주요
활동으로 하는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를 발족하여 회장으로 활동하는 등 사회
활동을 계속 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그녀의 결혼생활은 파경을 맞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두 딸을 거느리고 배화학교(1921∼1926. 9)와 여자신학교에서
영어와 음악을 가르치다 배화의 교사였던 루비 리(Rubie Lee)의 협조로
1926년 웨슬레안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녀는 그곳 웨슬레안대학에서
사회학 B.A. 학위를 받았고, 컬럼비아대학 사범대에서 교육학 M.A. 학위를
받았다.

미국에서도 그녀는 사회활동을 계속했는데, 민족주의단체인
근화회(槿花會)에서 활동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근화회는 1928년 2월
뉴욕에서 김마리아, 황애덕(黃愛德), 박인덕 등 여자유학생들의 발기로
조직된 것으로 출판이나 순회강연 등을 통해 국내정세를 외국인에게 소개하여
조국광복에 기여하려는 단체였다. 그녀는 미국에서 학생봉사운동에 호응하여
각지의 대학에 나가 강연하고 세계 유세계획을 세워 북아메리카는 물론 유럽
각지에 조선을 소개하는 활동을 벌였으며, 동남아와 중국을 거쳐 1931년
조국에 돌아왔다. 그녀의 귀국을 환영하는 모임이 명월관 본점에서 윤치호*의
사회로 각 방면의 지기 56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는 그에 대한 기대와
지명도를 잘 반영해 준다.

귀국 후 그녀는 교사모임으로 조직되었던 망월구락부를 황애덕,
최활란(崔活蘭)과 더불어 1932년 '단정한 직업을 가진 여성'들의 모임인
조선직업부인협회로 개편하여 여성들을 위한 경제학 강연을 여는 등의 활동을
폈다.

한편 그녀는 농촌여성에 대한 계몽활동에도 참가하였다. 그녀의 열성 덕분에
여자사업협회에서는 1933년 농촌부녀를 위한 이동학교를 개설하기도 했다.
그리고 감리교 농촌부녀지도자수양소의 일도 하였다.

1935년에는 {농촌교역지침}을 발간하여  종교활동의 일환으로서
농촌계몽운동을 하였다. 민족주의계열 내에서는 1920년대 후반 이후
협동조합에 대한 관심이 커져가고 있었는데, 이 영향을 받아 그녀의
농촌에서의 활동은 덴마크식 농촌을 이상으로 삼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녀가 농촌문제나 농촌여성들의 문제를 보는 시각은 식민지 현실에서
문제의 해결을 찾아나가는 식이 아니라 덴마크의 모델을 따라가려는
식이었다. 따라서 당시 농촌문제의 원인제공자인 일제와 지주소작관계의
문제는 그녀의 관심 밖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활동은 주로 농민을
계몽의 대상으로 파악하고 행해졌으며, 그들의 처지를 개선하는 것에 주요한
관심을 기울였고, 무지로부터의 해방이 생활 개선의 주요 수단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그가 주로 지식인 여성 중심의 여성단체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박인덕이 일제와의 투쟁적 관점을 결여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가 3·1 운동 때 집단적 행동보다 개인적 행동을 주장했었다는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리고 3·1 운동 전후의 성향은 1920년대 초반에도
별 변화없이 계속 이어져, 금주·금연을 운동의 목표로 내세우게 된다.
이것은 그녀의 민족운동·여성운동의 방향이 실력양성운동, 자유주의적
여권운동에 기반하고 있었다는 것을 잘 설명해준다.

이처럼 일제에 대해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합법적 공간에서 운동하는 데
익숙했던 그녀의 성향이 훗날 반민족행위로 나아가는 데도 거리끼지 않게
만드는 요인이 되지 않았을까.


녹기연맹 의원으로 덕화의숙 설립하며 급격한 변신


미국에서 조선 민족의 존재를 알리며 민족주의단체에 참가했던 그가 어떠한
계기로 반민족행위자가 되었는가. 이에 대한 분명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정세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으리라 추정할 수는 있다. 그가 벌인
여러 가지 활동은 1930년대 중반이 지나면서 일제 관제운동인 농촌진흥운동에
흡수되거나 중단되었다. 게다가 박인덕은 교회나 각종 사회단체들과 관련된
활동을 하였으나 안정된 직업을 가지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1935년경부터는 일제가 기독교에 대해서도 신사참배니 각종시책을 강요하여
강력하게 통제하였다. 이런 가운데 다른 활동가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박인덕
역시 자신의 입장을 결정할 시점을 맞이하였다.

국내의 민족족의계 인물들 대부분이 이미 일제에 대해 투쟁성을 잃어 버린 지
오래였다. 침묵할 것인지, 굴복할 것인지 그것만이 남아 있었다. 일제에
저항하기엔 그녀의 정치적·사회적 입장은 너무나 미약했다. 그녀의 개인적
야망과 왕성한 활동욕은 일제와 타협하여 비록 굴욕적이더라도 자신의 사회적
생명을 이어가는 쪽을 택하였다.  자신과 친분있던 많은 사람들----윤치호,
신흥우(申興雨), 김활란 등----이 이미 친일행각을 벌이고 있는 것을 보면서.

그의 반민족행위는 다른 여성명사들과는 다소의 차이를 보인다. 다른 이들이
이미 확보한 지위----교장이나 교사, 종교상의 지위 등----를 유지·강화해
가려는 데 있다면, 상대적으로 부평초같이 지내던 그녀는 자신의 입지를
새롭게 만들어 나가는 데 친일 행위를 이용한 것이었다.

박인덕의 친일행각은 덕화여숙(德和女塾)의 설립에서 시작된다.

덕화여숙은 녹기연맹(綠旗聯盟) 부설 청화여숙(淸和女塾)을 본떠
자매학교로서 만들어졌다. 후대의 기록에 의하면 덴마크의 실업학교를
본보기로 삼은 것이라고 하나, 덕화여숙은 음으로 양으로 녹기연맹의 도움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그가 녹기연맹과 관련을 갖게 된 것은 일본어를 배우게 되면서부터이다.
일제가 목조아 오는 가운데 박인덕은 1939년경 일본어를 익혀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1938년 교육령에 의해 교사들은 일본어를 상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학교와 달리 이화학당에서는 일본어 교육이 그리
중시되지 않았으며 박인덕으로서는 미국 유학으로 일본어를 충분히 익힐
기회가 없었다. 녹기연맹(綠旗聯盟)의  쓰에(須江愛子)에게서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하여 하시기타(橋北町)의 '국어강습회'를 거쳤다. 이러한 가운데
녹기연맹측은 자기 끄나풀로서 박인덕을, 박인덕은 자신의 입지를 강화해 줄
수 있는 학교설립의 지원자로서 녹기연맹을 선택한 셈이었다.

1941년 4월 18일 덕화여숙 설립일에 검사정(檢事正) 야마사와(山澤) 및
나가사키(長崎), 구라시게(倉茂) 보도부장, 이화여학교
신도순(辛島純:원이름은 辛鳳祚) 등이 축사를 읽었고, 교사진도 녹기연맹의
쓰다(津田節子), 청화여숙 교사가 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淸田美智子,
[덕화여숙을 방문하고], {綠旗}, 1941.6). 이런 점으로 미루어 덕화여숙
자체가 고등여학교를 졸업한 사람에게 1년 과정의 직업교육을 실시하는
것이라고는 하나 자율적인 교육기능을 갖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매일 아침마다 [황국신민의 서사]를 읊고, 청화여숙과 조선신궁에
합동참배하는 일종의 녹기연맹의 부설학교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 즈음하여  그는 나가가와(永河仁德)라고 창씨하고, 같은 해 8월에는
임전대책협의회의 결성에 참가하여 김활란과 더불어 위원이 되어 9월에는
김동환*, 신태악*, 신흥우, 윤치호, 이성환(李晟煥), 이종린(李鐘麟), 최린*
등과 함께 '임전대책 연설회'에서 '승전의 길은 여기에 있다'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그리고 전쟁비 조달을 위한 채권가두유격대로서 이숙종(李淑鐘),
송금선(宋今璇)과 함께 참가하였다.

그녀가 당시 행하고 다닌 친일행위들은 1941년 12월 20일 {매일신보}에 실린
[정전(征戰)을 뒤에 지키는 맹서]라는 글을 통해 명확히 드러난다. "대체 왜
영·미하고 싸우게 되나를 잠깐 생각합시다.……중대한 것 중의 하나는 남의
구역에 영·미가 침범을 하는 것입니다.……그것이 우리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대동아에 사는 전민족에게 끼치는 일이니까 우리는 정의를 위하여
굳게 싸우는 것입니다." 이제 그녀는 자신이 공부하고 강연하고 다녔던
미국을 적국으로 돌리고 자신의 조국을 짓밟고 있는 일본 제국주의를
비호하여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을 '정의의 전쟁'으로 미화하였다.

근대에 들어오면 전쟁시기에 여성정책이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일제도 이
시기에 와서 여성들을 역사의 전면에 부각시키고 여성의 역할이 중요함을
강조하여 여성들을 회유·동원하는 데 광분하였다. 박인덕은 이러한 일제의
요구에 대해 조선임전보국단의 평의원과 그 부인대의 지도위원로서 1941년
12월 27일 결전부인대회에서 사회를 맡아 "지금은 우리 1500만 여성이 당당한
황국 여성으로서 천황폐하께 충성을 다할 천재일우의 시기입니다. 이에 우리
반도 여성을 대표로 하여 '결전부인보국회'……를 조직"하자고 하였다.
그리고 목 조이듯 궁핍을 강조하였던 당시 가정생활에서의 절약, 간단화를
강조하여 "이때야말로 주부된 우리들이 모든 생활에 간단화하기를 생각하여
시간으로, 물질로, 금전으로 남은 것은 국가에 바치겠다는 이 한 정신을
가지고 생활할 때에 필승은 우리 앞에 오고야 말 것이다"([의식주에 관한
필승의 길], {신시대}, 1943. 4)라며 일제의 수탈과 착취를 합리화하고
군복수리작업 등을 활동으로 삼았다.

그리고 전쟁이 소모전으로 되면서 군인의 충원이 급해지자 일제는 징병제를
계획하고 학병을 끌고 갔다. 이를 위해서 우선적으로 선전대원으로서 각종
관제 단체들을 동원하였다. 이 때 박인덕은 '새어머니 될 우리의 감격과
포부'를 논제로 한 좌담회에 참석하였고, 학병을 동원하기 위해서
조선교화단체연합회 부인계몽독려반으로 파견되었다. 이외에도
조선언론보국회(1945. 6. 8 조직됨)의 이사를 맡는 등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각종 반민족적 단체나 각종 토론회·강연회의 연사로서, 그리고 사회자로서
맹활약을 하였다.

이러한 친일 행위 중에서도 그는 "(여성인----인용자) 우리는 배우고,
생각하고, 남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대표적 황국신민이 되어서 우리
스스로가 지도자로 되자"({대동아}, 1942.5)고 함으로써 매국적 행위
속에서도 여권신장에 대한 희망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바로 1920년대의
자유주의 여권론자 대부분의 모습이었다. 일제에 굴복하면서도 여성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고 본 것은 전형적으로 민족문제와 여성문제를
분리시켜 본 예이다.


해방 후 반탁·반공연사로 활약


해방 전에는 미국을 비난하던 입으로 박인덕은 일제가 패망하고 미군이
들어오자 돌변하여 미군정에 밀착되어 미소관계의 냉전이 시작되는 틈 속에서
다시 변신을 꾀하였다. 그러나 8·15 직후에는 반민족행위와 관련되어
우익민족주의자들이 별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1946년 신탁문제를 둘러싸고 우익여성운동도 바람을 타고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반탁운동체가 총집결될 때 여성단체도 독립촉성애국부인회로
결집되었다. 박인덕은 독립촉성애국부인회의의 전국부인대회에서 '민주주의와
여성'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는가 하면 회의의 사회자로 맹활약을 하고
정보부장으로 선임되어 전국적 무대에 재등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미군정청에
의해 제1회 국제부인대회에 남한대표로 미국에 파견되었고 미국에서
반탁여론을 조성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이후 미국에서 저술·강연에 열중하여 {____________}(September
Monkey)와 {______________}(寅時:The out of Tiger) 등 자서전적인 책을
썼다. 이 책은 각국어로 번역되어 수만 권이 판매되었고, 이외에도 격언집
{용의 지혜}(The Wisdom of Dragon) 등도 발행하였다. 그 인세와 강연료 등을
기금으로 1961년 이후 인덕실업전문대학 등을 설립하여 인덕학원 이사장이
되었다. 일제하 덕화여숙으로 왜곡되어 나타났던 그의 학교 설립의 포부는 그
후에도 이어져 학교의 이사장이 되었다. 그리고 일제시기 학교 설립자가
되었던 대부분의 인물들이 학교를 그들의 자손에 물려준 것처럼 그 역시
딸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 강정숙(영남대 강사·여성학)


참고문헌


淸田美智子, [덕화여숙을 방문하고], {綠旗}, 1941.6.

박인덕, [정전(征戰)을 뒤에 지키는 맹서], {매일신보} 1941.12.20.

박인덕, [의식주에 관한 필승의 길], {신시대}, 19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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