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망친 친일파 개독(9) - 홍난파

일제하 기독교인들의 친일행각

한국을 망친 친일파 개독(9) - 홍난파

※※※ 0 2,678 2003.10.25 21:10

민족음악개량운동에서 친일음악운동으로


·洪蘭坡, 창씨명 森川 潤, 1898∼1941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1941년 조선음악협회 평의원



한국 근대양악사의 대변자


우리가 머리 속에 홍난파를 떠올릴라치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짚히는 것이
있다. 어린 시절 누구나 불러 보았던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고향의 봄])이랄지, 우리네 누님들이 서럽게 부르며 길게
늘어뜨린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봉선화]) 등의
작곡가라는 점이다. 더욱이 [봉선화]는 담 밑에 저만치 외롭게 피어 있는
꽃과 같은 일제하 조국의 비운을 상징한다고 음악선생에게 배운 바 있는
우리에게, 홍난파는 '민족적 수절을 지킨 음악가'처럼 여겨졌다.

실제로 1942년 2월, 일본 도쿄에 있는 무사시노(武藏野)음악학교(1929년
설립, 1949년부터 음악대학으로 직제개편)를 졸업한 소프라노
김천애(金天愛)가 같은 해 4월 도쿄 히비야(日比谷) 공회당에서 개최한
전일본신인음악회에 하얀 치마 저고리를 입고 출연하여 [봉선화]를
열창함으로써 열렬한 환호와 벅찬 눈물로 감동을 가져온 바도 있다. 그리고
그 날 이후부터 김천애는 귀국 활동을 통하여 [봉선화](때로는 봉숭아로
알려졌다)로 모든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더욱이 1943년 경성후생실내악단
단원이었던 김천애가 경상남도 삼천포 공연에서도 이 노래를 부를
계획이었는데, 일제에 의하여 이 노래가 '금지된 노래'로 처분됨에 따라
'봉선화=홍난파=민족음악가'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홍난파는 우리 나라 근대음악사 중에서 양악사의 가장 큰 산맥일 정도로 그가
우리 음악에 공헌한 것은 사실이다. 그의 전공은 바이올린이었지만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작곡가, 지휘자, 음악교육가, 음악평론가로서 큰 역할을
하였고, 때로는 출판사업가와 작가로서 여러 단편을 발표한, 말 그대로
전천후 만능 음악가였다. 그만큼 양악의 모든 분야에 우뚝 솟은 음악가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한국의 '근대' 양악사는 여명기나 다름 없어서 매우
열악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 근대사의 인물이다. 1898년 4월 10일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활초리에서 태어나 1941년 8월 30일 삶을 마감할 때까지 그의 44세의 삶과
예술이 바로 한국근대양악사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1912년에 황성기독교청년회 중학부를 졸업한 그는, 1913년부터 3년 동안
음악학교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과'에 다님으로써 바이올린 연주가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21세가 되던 1918년에 일본 '도쿄음악학교'(흔히
'우에노'로 줄여 말하는 학교)로 유학하였지만 그 다음해인 1919년에 3·1
운동이 일어나자 학업을 중지하고 귀국하여 음악활동을 열정적으로 펼쳐
나간다. 바이올린 연주가, 작곡가, 평론가, 음악교육가, 지휘자, 작가로
활동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1926년에는 사립인 도쿄고등음악학원에 편입하여 1929년에 졸업하였고,
1931년 7월에는 미국 시카고 셔우드(Sherwood) 음악학교에서 2년간
수학하기도 하였다.

한편 그는 경성악우회 주간(1919), 전문적인 음악연구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연악회(硏樂會) 창설(1922) 및 운영, 조선음악가협회 상무이사(1931),
이화여전 음악강사(1933), 난파 트리오 조직(1933) 및 활동, 경성방송국
양악부 책임자로서 경성방송관현악단 조직 및 지휘(1936), 경성음악전문학교
교수(1938) 등을 역임하면서 조선악단 전면에 우뚝 솟았다.


민족음악개량운동에서 친일음악운동으로의 급격한 변모


그러나 홍난파는 일본제국주의 식민지하의 민족현실과 무관한 음악가였다.
그의 화려한 음악활동은 일제가 3·1 운동 후 내세운 이른바 '문화정치'에
상응하여 '서양음악으로 민족의 힘을 키워야 한다'는 입장 속에서 진행된
것이었다. 즉, 민족개량운동 쪽에서 펼친 음악활동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중일전쟁이 일어나는 1937년 7월 이후부터는 지금까지 펼쳐져 왔던
그의 '민족음악개량운동'이 '친일음악운동'으로 급격하게 변모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변모는 두 가지 이유에서 비롯된 듯하다. 하나는
'민족음악개량운동'이 애초부터 식민지하에서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수양동우회' 사건이다.

"조선음악 대부분이 극히 지완(遲緩)하여(더디고 느려서----인용자) 해이하고
퇴영적인(뒤로 물러나서 움직이지 않는----인용자) 기분에 싸여 있지마는
서양의 음악은 특수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거개 경쾌 장중하다"([동서양
음악의 비교], 1936)라고 말할 정도로 조선음악을 비판하고 서양음악을
열정적으로 계몽·보급하려 한 그의 '민족음악개량운동'은 기실 조선음악의
역사인식이나 미학에 관하여 무지한 데서 비롯하였다. 또한 이러한 서양음악
계몽운동이 식민지하의 민족현실과 정면에서 부딪치지 않아야만 가능하였기
때문에도 그의 '민족음악개량운동'은 처음부터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1930년대 후반부터 일제의 탄압이 본격화되자
쉽게 친일의 길을 걸어간다.

홍난파는 1937년 4월 총독부 학무국이 주도하고 일본과 조선의 문예가 30여
명이 결성한 사회교화단체 '조선문예회'에 회원으로 가입한다. 조선문예회는
작가들과 홍난파, 김영환, 박경호, 윤성덕, 이종태, 함화진, 현제명* 등의
음악가들로 구성된 친일단체였다.

홍난파는 1937년 6월에 안창호 등 수양동우회 회원 150여 명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피검되는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한동안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는데, 그 이후 그의 친일화는 본격화된다.

1937년 9월 15일 조선총독부와 조선문예회가 '시국인식을 철저히 하며 사기를
고취'하기 위한 '시국가요발표회'를 이왕직 아악부에서 개최하자, 홍난파는
최남선* 작사의 [정의의 개가(凱歌)]에다 곡을 붙여 친일가요를 발표하였다.

1937년 9월 30일에는 조선문예회가 신작발표회로서
'황군위문조성----총후반도의 애국가요' 발표회 겸 '시국가요 피로의 밤'을
부민관 대강당에서 가질 때, 그는 [장성(長城)의 파수(把守)](최남선 작사)와
[공군의 노래](空軍の歌:________彩本長夫 작사)라는 친일가요를 발표하였다.
1937년 10월 3일에는 경성고등음악학원이 주최하고 경성군사후원연맹이
후원하는, 부민관에서 열린 음악보국대연주회에 출연하였다.

1938년 6월에는 앞서의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말미암아 전영택(田榮澤),
현제명 등 18명의 동우회 회원이 친일단체인 대동민우회(大東民友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수양동우회 사건은 1941년 최종재판에서 그 동안의
친일 전력이 참작되어 전원 무죄판결이 날 때까지 계류되어 있었다.


음악총력전의 기수


그는 1938년 7월 9일에 경성방송국 제2방송 '동요와 합창' 시간(오후 6시)에
경성방송관현악단의 반주와 경보(京保)합창대·경성보육학교생도합창대(지휘
이흥렬)의 노래를 지휘하여 친일가요를 방송하였다. 이 때의 노래들 중
중일전쟁(1937. 7. 7)의 산물로 나온 [애국행진곡]은 일본인에 의해 작곡된
노래로서, '천황폐하의 신민으로 일본정신을 발양하고 약진하자'는 내용인데,
일본 전통의 전형적인 2박자풍 작품이고, 더욱이 '일본의 제2 국가(國歌)'로
알려진 작품이었다.

1939년 10월 5일 9시부터는 경성방송국 제1방송을 통하여 홍난파가 지휘하는
경성방송관현악단 공연이 방송되었다. 프로그램 제목은
'애국가곡집'이었는데, 이 때의 '애국'은 '일본천황국가에 대한
애국'이었음은 물론이다. 그 곡목이 이를 반증하고 있는데, [황국정신을
되새기며](皇國精神にかへれ), [부인애국의 노래](婦人愛國の歌),
[애마진군가](愛馬進軍歌), [태평양행진곡](太平洋行進曲) 등이 그것이었다.

[애마진군가]의 경우, 일제가 동남아시아에서 전쟁을 일으킨 후 그 전선에서
전쟁용 말(馬)이 필요하게 되자, 조선과 일본 현지인들로 하여금
'애마사상'(愛馬思想)을 함양시키기 위해 일본 육군에서 가사와 곡을 공모한
작품이었다. 그 음악적 특징에 있어서도 이 노래는 요나누키 음계에다
2박자라는 일본 민족의 전형적인 음악이었다. 1939년 1월에는 6개에 이르는
일본의 레코드 회사가 이를 녹음하여 발매하기도 하였다.

[태평양행진곡]은 1939년 7월 20일 '바다의 기념일'(海の紀念日)을 제정한
직후 공모한 작품 중 제1위를 차지한 작품으로, '황국(皇國)의 생명선'인
태평양을 일본 영역화하자는 작품이었다.

당시 이러한 노래들은 '국민가요'로 불려졌다. [애국행진곡], [애마진군가],
[태평양행진곡], [흥아행진곡], [출정병사를 보내는 노래] 등은 태평양전쟁
직후부터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음악총력전을 펼치며 이른바 '국민개창운동'과
{국민가집} 발행을 통하여 '중점적으로 불러야 할 노래'로 선정하면서
강압적인 학습노래가 되어 있었다. 그 노래 내용은 어김없이 '일본
국민가요'로서 '천황폐하 중심의 일본 정신과 정서'를 드러내고 있는
반민족적인 노래들이었다.

이 노래들이 반민족적인 노래들이고 이 노래들을 전파하는 것 자체가
친일음악행위라는 것은, 그 노래들이 우리 민족의 정신과 정서를 일본정신과
일본정서로 바꿔 놓으려는 것이며, 결국 우리 민족이 오랫동안 역사적으로
합의해 온 바 있는 민족정신과 민족정서를 '해체'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홍난파는 친일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친일
가요와 글을 계속하여 발표하였다. 연대 미상이지만 중일전쟁 이후에 발표한
친일가요 [희망의 아침]은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고, 1940년 7월 7일자
{매일신보}에 발표한 [지나사변과 음악]은 그의 대표적인 글이다.

[희망의 아침]은 사단법인 조선방송협회가 펴낸 {가정가요} 제1집에 발표한
노래로 가사는 춘원 이광수*가 지었다. 가사에서 "일어나거라 우리 임금의
분부" 받아 "새로운 세계를 이룩"하고 "대아시아 대공영권"의 "우리 일장기
날리는 곳이 자자손손 복 누릴 국토"라는 것은 말할 나위 없이 '천황폐하에게
몸과 마음을 바쳐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자'는 일본정신, 곧 황국정신의
구현이었다. 음악 특징으로는 전형적인 일본 민족음계인 '도레미솔라'라는
요나누키 음계에다, 역시 일본 음악의 특징인 2박자 계통으로 작곡되었다.

따라서 홍난파가 1930년대 벽두부터 주장한 순수음악운동은 일제
식민지하에서 민족현실을 외면할 수 있었던 자기도피와 자기기만의
음악운동이었다. 그가 조선양악계의 대부라는 점에서도 그의 두 마음과 두
정서는 일본 마음과 일본 정서가 중심이었다.

한편, [지나사변과 음악]이라는 글에서 그는 더욱 분명하게 일본인이 되어
있었다.


성전(聖戰)도 이제는 제3계단에 들어가서 신동아(新東亞) 건설의
대업(大業)이 ○○○ 더욱 견실하게 실현되어 가는 이 때에
총후(銃後:후방----인용자)에 있는 여러 음악가와 종군(從軍)했던
악인(樂人)들의 뇌리에는 용용히 넘쳐 흐르는 감격과 ○○적 감흥이
감발(感發)해 갈 것인즉, 이번의 성업(聖業)이 성사되어 국위를 천하에
선양할 때에 그 서곡으로, 그 전주적 교향악으로 '음악 일본'의 존재를
뚜렷이 나타날 날이 1일이라도 속히 오기를 충심으로 비는 바이며, 우리는
우리의 모든 힘과 기량을 기울여서 총후국민(銃後國民)으로서 음악보국운동에
용왕(勇往) 매진할 것을 자기(自期:마음속에 스스로 기약함----인용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 글을 보면 홍난파는 이미 제국주의를 펼치고 있는 일본 '천황'의
신민(臣民)이 되어 있었다. '음악 일본'이 하루라도 빨리 본궤도에 올라 서
있기를 바라는 그에게 '음악 조선'은 처음부터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1940년 9월 1일자 {매일신보}에서 창씨개명한 이름 모리가와 준(森川
潤)을 사용하고 있는데, 창씨개명한 이름조차 성도 이름도 완전하게
일본식으로 바꾼 것이다. 같은 해 10월 16일에 홍난파는 국체본의에 바탕을
두고 내선일체를 획책하며 신동아질서 건설에 매진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국민총력조선연맹의 문화위원으로 선정되었다.

또한 1941년 1월 25일에는 '악단을 통하여 직역봉공을 하고 신체제운동을
하기 위해' 결성된 조선 최대의 친일음악단체 조선음악협회(회장은
조선총독부 학무국 학무국장 시오와라鹽原時三郞)의 23명의 평의원 가운데
7명밖에 안 되는 조선음악인 평의원 중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1941년 홍난파는 악화된 늑막염으로 경성요양원에서 회한의 삶을 마감하였다.
그의 죽음은 난파 개인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의 죽음은 민족현실
없는 순수음악운동이 왜 식민지하에서 허구이며 죽음인지를 드러내고 있으며,
우리가 그를 통하여 기대했던 희망이 좌절된 것을 의미한다. 한국근현대사의
음악역사가 스스로 제기하고 있는 목숨 같은 질문, '음악과 음악을 다루는
사람은 이 땅에서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가 부각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 노동은(목원대 교수·음악학)


참고문헌


홍난파, [지나사변과 죽음], {매일신보}, 1940. 7. 7.

      , [희망의 아침], {가정가요} 제1집, 조선방송협회.

希望의 아츰


이광수 작사
홍난파 작곡


씩씩하게


1. 밤이  새엇다  희망의아  츰  東편--  하늘에  솟는햇발--  은
2. 이러  나거라  우리임금  의  분부--  받자와  一億一心--  히
3. 大陸  二萬里  大洋十萬  里  大亞--  細亞의  大共策國--  의

  다들  받--으라  듬뿍받아  서  소리소리  높여서  萬歲불러  라
  넓은  天--地에  八紘一宇  의  새--론--  세계를  일욱하랴  고
  우리  日--章旗  날리는곧  이  子子孫孫  萬代의  복누릴國  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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