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망친 친일파 개독(7) - 김기창

일제하 기독교인들의 친일행각

한국을 망친 친일파 개독(7) - 김기창

※※※ 2 3,025 2003.10.25 21:05

스승에게 물려받은 친일화가의 길


·金基昶, 1914∼

1940년 '선전' 추천작가
1942년 반도총후미술전 추천작가


화풍만 아니라 친일행각까지 스승의 길 따라

김기창은 여러 면에서 친일화가의 선두주자였던 김은호*의 수제자격이다.
섬세한 사실 묘사 위주의 일본화식 채색화법을 고스란히 배웠을 뿐 아니라
친일행각까지도 착실히 스승의 길을 따랐기 때문이다.

김기창은 서울 종로구 운니동의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8세 때
장티푸스를 앓으면서 청각장애를 일으켜 정상적으로 학교과정을 마치지
못하였다. 그는 어머니 한윤명(韓潤明)의 정성으로 한글과 일어, 한문 등을
익혔고, 그림에 대한 재능이 일찍 발견되었다. 김기창의 어머니는 감리교
신자로 진명여학교를 졸업하고 한때 개성의 정화여학교 교사를 지낸 바 있는
신여성이었다.

김은호의 문하생이 되어 본격적인 화가 수업을 한 것도 어머니의 배려
덕택이었다. 그의 나이 17세 때(1930)의 일이다. 김기창은 김은호의 문하에
들어선 지 6개월 만에 제10회 '선전'(朝鮮美術展覽會)에
[널뛰기](板上跳舞)를 출품하여 입선하는 기량을 발휘하였다(1931). 이 때
어머니로부터 '운포'(雲圃)라는 아호를 받게 된다.

이후 계속해서 '선전'에 입선하다가 24세 때인 제16회 '선전'(1937)에
할머니의 옛얘기를 듣는 아이들을 담은 [고담](古談)을 출품하여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았다. 다음해에는 [여름날](夏日)로 '총독상'을 받고,
18·19회 '선전'에 계속 특선으로 입상되어, 연 4회 특선 경력으로
추천작가가 되었다. 약관의 27세였다. 16회와 17회 때에는 스승인 김은호가
직접 심사원으로 참여하였고, 19회 때에는 주변의 시샘과 방해가 있었으나
김은호의 주선으로 무난히 무감사 특선에 올라 추천작가의 '영예'를 안은
것이다.

이러한 김기창의 '선전' 출품작들은 대부분 향토적 내용에 장식적인 색채
감각과 호분의 사용, 섬세한 필치 등 일본인 심사위원들의 요구에 충실히
부응한 것이었으며, 스승인 김은호의 일본식 채색화풍을 전수받은 것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김기창의 뛰어난 묘사력이 뒷받침되어 있었다. 1938년에는
일본인 화가(失澤弦月, 野田九浦 등)를 만나 본토의 정통 채색화풍을 익히러
도쿄에 잠시 다녀오기도 했다.

'선전'에 추천작가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친일파 대열에 합류한 김기창은
자신의 탁월한 회화 기량으로 젊은 나이에 '추천작가가 된 영광'을 일제
군국주의에 동조하는 것으로 갚았다. 그 영광을 가져다 준 스승 김은호가
밟은 길을 따라 총독부의 전시 문예정책에 부역한 것이다. 화가로서 개인의
명예를 한몸에 얻게 되었으니 척박한 민족현실이 안중에 있을 리 만무다.

김기창은 '조선남화연맹전'(1940. 10)과
'애국백인일수(愛國百人一首)전람회'(1943. 1)를 비롯하여 김규진, 김은호*,
이상범, 이한복, 허백련 등 대가급 친일 미술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기금마련 전람회에 적극 협력하였다. 또한 그는 김은호, 이상범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일제 말 친일미술전의 핵심인
'반도총후미술전'(半島銃後美術展)에 후소회 동문인 장우성과 함께 일본화부
추천작가로 발탁되었다(1942∼44). 자연스레 친일파의 나락에 빠져든 것이다.

김기창은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고무하기 위한 선전 작업에도 앞장 섰다.
이는 우선 신문·잡지류의 대중매체에 실린 삽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매일신보}에 게제된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1943. 8. 6), 조선식산은행의
사보 {회심(會心)}지에 실린 완전군장의 [총후병사](1944. 4) 등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는 '축 입영(祝 入營)……'이라는 어깨띠를
두른 학도병 좌우에 갓 쓰고 안경 낀 연로한 아버지와 수건을 쓴 어머니가
수묵소묘풍으로 그려진 삽화이다. 이는 1943년 8월부터 시행된 조선 청년
징병제를 선전하기 위한 작품이다. 종군하게 되어 감격스러운 듯한 학도병의
진지함과 장한 아들을 굽어보는 아버지의 표정에 선전효과를 높이려는 의도가
다분히 배어 있다.

훈련병을 그린 [총후병사]는 펜화에 담채를 가한 삽화이다. 완전군장으로
간이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병사의 옆모습을 포착한 것으로 얼굴과 주먹
쥔 손에는 성전에 참여한 멸사봉공의 굳은 의지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또한
제21회 '선전'(1942)에 출품한 채색화 [모임]은 마을 부녀회의 반상회 광경을
연상시켜 주는데, 전시 후방에서 지원할 수 있는 여러 방안을  모색하고 있는
듯하다.


가증스런 점진적 식민잔재 극복론


젊은 나이에 '선전'의 추천작가가 된 '영예'와 기량으로 김기창은 일제
군국주의에 부화뇌동하였다. 김기창의 작업들은 당시 일본인 화가들의
전쟁선양 작품들에 버금가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친일 경향과 활약으로
김기창은 해방 직후 결성된 '조선미술건설본부'에서 스승인 김은호를
비롯하여 이상범, 심형구*, 김인승*, 김경승, 윤효중 등과 함께 당연히
제외당했다. 그러나 그 역시 미군정과 이승만 친미 파쇼정권의 등장 이후
친일행적은 감추어진 채 제도권 미술계의 중심으로서 일제 때 친일 하면서
누렸던 명예와 인기를 유지하게 된다.

김기창은 해방 후 나름대로 '눈 뜬 장님으로' 친일파가 된 자기 변명과
극복론을 폈다. 당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다는 환경지배론과 점진적
식민잔재 극복론이 그것이다.

원로화가가 된 김기창은 최근 한 일간지 기자와의 대담에서 친일의 변으로
"사람은 자기가 살아가는 환경에 영향을 받는 것 같아요. 물론 의지가 강한
자기 정신을 소유한 사람은 문제가 없지만 평범한 인간이면 누구나 환경의
지배를 받게 되겠지요"({경향신문}, 1991. 8. 3)라고 피력한 바 있다.
친일파의 반민족적 행위에 대한 자기 반성치고는 너무나 안일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그 대담에서 "내 살속의 과거를 깎아 내며 민족적인 것에 이르고자
신체적 장애를 딛고 끊임없이 정진해 왔다"는, 전혀 '평범한 인간'의 논리와
걸맞지 않는 발언에 이르면 가증스럽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는 자신의
의지대로 화가로 출세하기 위해 '선전'에 출품해서 추천작가의 영예를
안았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그리고 그 '환경' 속에서 더 출세하기 위해
스스로 친일행각을 벌였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해방 직후 어머니가 지어 준 아호인 '운포'(雲圃)의 '포'(圃)에서
'口'를 떼어 내고 '운보(雲甫)'로 바꾼 이유가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는 얘기와도 맞물려 있다. 어차피 형식적 자기 변명에 불과하다.
그의 형식주의적 경향은 점진적 식민잔재 청산론과 해방 후 변모가 큰
화풍에서도 찾아진다. 이런 논리는 해방 이듬해 화단활동을 본격화하면서 쓴
아래의 글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우리의 모든 문화면은 오랜 왜정 압박하에 자유를 속박당하며 가사상태에
빠져 그 향상력이 저지되어 왔고, 특히 미술에 있어서 그 영향을 지독히
흡수한 것이 동양화였다. 그야말로 눈 뜬 장님처럼 예술관념을 인식치 못한
제작을 했고, 그 작품에서 예술의 대명사의 대접을 받아 떳떳이 내놓을
무엇이 있었던가. 결국 환경적으로 왜놈의 탈을 쓰고 그들의 유행성을 모방만
하느라고 급급했기 때문이었으니, 일종의 고질적인 우리들의 비예술관념과
깊이 뿌리 박힌 일본적인 습관을 현재에 있어서 여하히 처리할 것인가. 단지
지금 와서 일본적인 것을 이탈하려고 성급한 초조를 하더라도 안 될 것이니,
차라리 그것이 일본적이라 하더라도 서서히 이탈하도록 자신을 다시 한 번
반성하고, 자기 실력을 가다듬어야 할 것은 물론이다. 해방 기분으로
가뜩이나 어리뻥뻥한 모호한 제작태도를 지닌 우리들이 '조선적, 조선적'
하기만 하고 날뛴다면 자신을 더욱 방황의 구렁텅이에 몰아 넣게 될 것이요,
그 작품이란 죽도 밥도 아닌 엉터리 작품이 될 것이니, 우리는 그런 태도를
청산하고 제일 먼저 화안(畵眼)의 양성, 즉 그림을 바로 인식할 줄 아는
교양을 쌓을 것이오…….(김기창, [해방과 동양화의 진로], {조형예술} 1호,
1946).


이 점진론은 결국 식민지 시절 벌인 반민족적 행각에 대한 반성의 핵심은
간과한 채 '현실'이 아닌 '그림을 바로 인식할 수 있는 교양'을 쌓자는
주장만 담긴 것이다. 그런데 그의 '그림 교양'은 또다시 해방 후 격변하는
시대현실과 무관하게 형식실험적 태도로 바뀌었고, 개인주의적 작업과
사회활동 그리고 화단정치에서도 점진론과는 정반대로 맹활약을 벌였다. 특히
다양한 화풍의 변화가 그것을 잘 말해 준다.

김기창은 '운보적이고 민족적인 것을 찾기 위해, 야성적이고 생명감 넘치는
격정적인 힘찬 화면'을 만들어 내기 위해 분방하고 '줄기찬
자기연소'(이구열, 1979) 과정을 거쳤다. 그 자신의 고백대로 김은호를
배우면서 형성된 일본식 채색화풍을 벗고, 1952년 전후로는 형상 변형이
반추상적인 입체파풍의 시기였고, 1964∼65년은 문자를 변용하거나 완전
추상에 빠진 시기, 1970년대는 수묵의 강한 선을 쓰는 시기, 그리고
1975년부터는 민화류 소재를 이용한 바보산수 시기 등으로의 변모가 그것을
잘 말해 준다.

그런데 이런 화풍의 변모는 개인적 갈등과 창작욕구에 의한 것이지만, 실제는
해방 후 우리 미술계에 물밀듯이 유입된 모더니즘의 조형논리를 그대로
답습한 데 불과하다. 이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화풍에 매몰되었듯이 해방
후에는 또 다른 서구 제국주의 미술에 기대어 자기 회화세계를 변모시켜 낸
결과이다.


왕성한 활동력과 정치력으로 친일행위 은폐


해방 후 김기창의 회화적 변모에는 여성화가로서 추상주의를 지향한 박래현의
영향도 있었다. 해방 다음해 결혼한 박래현과는 17회의 부부전을 열어 세상의
이목을 끌기도 하였다. {자유신문}의 미술기자, 민속박물관의 미술부장을
잠시 지낸 것(1947∼48)을 제외하고는 작업과 화단활동에 주력하였다. 그는
미협과 국전 운영에 깊이 관여하고 국전과 민전의 심사위원으로서 꾸준히
화단의 세력을 장악했다. 그리고 백양회 창립 주도, 해외전에 한국 대표로
적극 참여, 해외 여행, 홍익대 미술과 교수(1954)와 수도여사대(지금의
세종대) 교수(1962∼74) 역임 등 그의 정치력에 걸맞는 화려한 이력을
쌓았다.

또한 왕성한 활동으로 상복도 많아 여타의 친일 인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제12회 3·1 문화상(1971)을 받았고 3·1 문화상 심사위원(1972, 1977)에
위촉된 바도 있다. 이외에도 은관 문화훈장(1977), 국민훈장 모란장(1981),
예술원 정회원(1981), 중앙일보 중앙문화예술상 본상(1982), 예술원상(1983),
5·16 민족상과 서울시 문화상(1986), 색동회상(1987) 등 관민단체의 상을
두루 받았다.

한편, 화단과 사회활동도 국제적이어서 한독미술가협회 회장(1981), 후소회
회장(1985)을 비롯해서 세계문화자유회의 한국지부 실행위원(1967),
한국농아복지회 창립과 초대 회장(1979), 세계농아연맹 문화예술분과
부위원장(1985), 아시안게임 동남아채묵(彩墨)전 추진위원장(1986)을
역임하였으며, 88 올림픽 아트포스터 제작작가로 선정되는 등 다채롭고
의욕적인 면모를 과시하였다.

또한 박정희 군사 정권 아래서는 초상화나 기록화 제작을 도맡기도 하였다.
추사 김정호와 의병장 조헌의 영정(1974), 을지문덕과 신숭겸 영정(1975),
그리고 신라 태종무열왕과 문무대왕 영정(1974)을 제작하여 국가
표준영정으로 지정받은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공공건물의 벽화나
그림제작도 많았고 성화집 {예수의 생애}에서는 한복을 입은 기독교화를 그려
세인의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현재는 1979년에 착공한 청주 교외의 화실에서 노년의 작품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또 최근에는 {운보 김기창 전작도록} 간행위원회를 발족시켰는데, 63년
동안의 작품활동을 총망라해서 초대형 화집을 발간할 예정인 모양이다. 그
간행위원회에 참여시킨 문화계·미술계 위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역시
김기창의 정치력이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운보 화백이 한국 미술에 있어서 도저(到底)한 거봉이요, 또한 그의 작업이
장강처럼 맥맥히 이어져 왔음을 그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즉,
운보의 80년 생애와 그 방대한 작품이……특히 그의 삶이나 예술은 육체적
이중고를 초극한 실로 '위대한 실존상'으로 우리 모두의 삶의 귀감이 될
것이다.(구상 시인의 글, 발간위원회 두번째 소식지, 1993. 1)


이 글을 쓴 시인 구상은 {운보 김기창 전작도록} 발간위원장이다. 아직도
우리는 김기창의 친일활동은 철저히 밀쳐놓은 채 그를 '삶의 귀감'으로
삼자는 주장이 공공연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 이태호(전남대 교수·미술사, 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참고문헌


김기창, {나의 사랑과 예술}, 정우사, 1977.

화집 {운보 김기창}, 경미문화사, 1980.

{한국근대회화선집} 한국화 9권,'김기창/박래현', 금성출판사, 1990.


참고 작품사진

김기창,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매일신보, 1943년 8월 6일자 삽화.

김기창, <총후병사>, 조선식산은행사보 {회심}지, 1944년 4월호 속표지화.

Comments

날새! 2003.10.26 10:56
1987년 경이었던가...미국에서 벗는 스타로 부상한 "에이미 킴"이라는 여성이 운보의 조카딸이었음을 취재한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어요...운보왈,
"흐흐...얘가 브룩 쉴즈보다 더 낫네그랴..."
운보의 눈은 고작 브룩 쉴즈였던가 봅니다..ㅎㅎ...
빨래거둬! 2003.10.25 23:08
나! 돌아버리겠네요!

아 진짜, 미치겠네, 이 마음을 고스란히 전달할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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