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는 노는 날 (크리스마스, 그 계절병에 몸살을 앓는 벗들을 위해 3)

크리스마스는 노는 날 (크리스마스, 그 계절병에 몸살을 앓는 벗들을 위해 3)

신생왕 0 4,983 2006.12.07 11:36
크리스마스 노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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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는 미국의 가장 큰 명절임이 틀림없습니다.

모든 은행의 가장 큰 거래명목이 정령 크리스마스적금일 것입니다.

이 명절에 쓰기 위해서 사람들은 열 달 동안 돈을 모읍니다.

추수감사절이 지나자마자 사람들은 모아 온 크리스마스 적금을 타서 상점으로 몰려들지요.

상점들은 12월이 되기도 전에 이미 크리스마스를 겨냥한 상품으로 가득 차 있고, 호화찬란한 장식과 귀청 떨어지는 캐롤로 사람들의 정신을 홀랑 뽑아 어떻게든 주머니를 탈탈 털어낼 온갖 계교를 다 짜냅니다.

아, 과연 크리스마스는 장사꾼 최대의 명절입니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예수가 태어나자 강보에 싸아 구유에 눕혔다고 썼습니다.

굳이 은유를 찾고자 하는 분들은 베들레헴이 ‘밥 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구유는 가축의 밥그릇이니까 예수의 탄생을 인류에게 영혼의 양식을 제공하는 하느님의 사랑의 표현으로 그렇게 태어나신 것이라고 합니다.

 

루가복음서의 저자는 좀 더 솔직하게 설명합니다.

“여관에 머무를 방이 없었더라.”

아무리 세상 인심이 각박하고 이웃 돌아볼 여유가 없이 바쁘다 할지라도 해산하는 여인에게 방 하나 내어줄 수 없었다니!

루가는 그런 삭막한 세태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를 아름다운 모습으로 찬양합니다.

비단을 칭칭 감은 마리아와 요셉의 영접을 받으며 보화를 들고 경배하는 왕(동방박사)들을 그려 붙여놓고 바라보면서 “왕이 나셨다”고 찬양합니다.

참으로 낭만적으로 크리스마스를 축하합니다.

그 낭만 속에서 외양간에서 아이를 낳고, 누더기를 벗어 태어난 아이를 싸, 짐승의 오물을 피해 구유에 눕힌 후 엄습한 산고와 추위에 몸서리치는 산모의 고통과 서러움은 찾아볼 수가 없게 되고 맙니다.

아, 과연 크리스마스는 낭만주의 크리스천들의 최대의 명절입니다.


상업성과 낭만적 축재의 합작으로 이루어낸 북새통에서 과연 우리는 아기 예수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을까요?


크리스마스는 일년에 한 번일지라도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 덕분에 잊었던 사람들을 기억하여 인사를 나누고, 버려진 사람들, 고통 받고 신음하는 사람들을 찾아 위로를 전하고 사랑을 나누는 날로서 충분히 가치가 인정되는 날이지요.

모든 일이 그렇듯이 크리스마스도 원래의 의미와는 너무 멀어져서 있습니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지극히 겸허한 사건이 크리스마스입니다.

따라서 이 날은 진정으로 우리가 겸허해져서 많이 가진 것을 가지지 못하거나 덜 가진 자들과 나누는 평화와 사랑을 실천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가 메마른 형식으로 굳어져버리고 우리의 이기적 욕망을 부추기고 내보이는 날로 변질되고 만 것입니다.


가장 일반적으로 여러분이 보내는 크리스마스카드에 과연 얼마나 진실한 여러분의 마음이 깃들어 있습니까? 

거기에 과연 여러분의 손 떼가 묻어있습니까, 아니면 인쇄 잉크 냄새만 자욱합니까?

여러분이 받는 크리스마스카드에서 여러분은 얼마나 절실하고 진실하게 보낸 이의 마음을 읽고 있습니까, 아니면 얼마짜리 누구의 그림을 더 재미있게 구경합니까?

물론 나 자신도 여러 사람에게 보내는 크리스마스와 신년 하례엽서를 일일이 내 손으로 써 보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신체불구자들이 발가락이나 입으로 붓을 물고 그린 엽서를 비싸게 사서 대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받는 사람들은 그림이 시원찮다든지, 종이가 싸구려로 보인다든지 반응이 섭섭해요.

또 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한번도 그런 신체불구자가 입으로 그린 엽서를 받아보지 못한 대신 엄청나게 비싼 여러 장 겹친 고급스런 엽서들을 받습니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나는 그런 사치스런 엽서들을 보면서 보낸 이의 정성과 사랑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카드 값과 그림, 그리고 인쇄된 누군가의 멋진 시 구절이 보낸 이의 마음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리바리 사 들이는 선물에 과연 여러분의 정성과 사랑이 얼마나 묻어 있습니까?

일년 내내 모은 적금을 털어 사들이는 선물은 바로 그것을 받을 사람들을 향한 지극한 사랑과 정성의 표현이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물질적 부의 과시이자 경쟁이 되고 덜 가진 자들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수반한다면 과연 그것이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일이겠습니까?

나는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는 물론 다른 기념일에도 선물을 받아본 일이 별로 없습니다.

섭섭한 게 아니라 그렇게 가르쳐왔습니다.

나에게 가장 큰 선물은 그 아이들이 즐거운 날에 다른 사람들의 슬픔을 기억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라고.


여기 저기 보내는 구호성금에 과연 그들에게 향하는 여러분의 관심이 얼마나 깊이 새겨져 있습니까?

교회다니는 친구들이 우리 집에 와서 ‘이웃 사람 보기에 창피하니까’ 장식전구 몇 줄이라도 걸지 그러냐고 한 것처럼, 선물과 구호성금에 내 이름이 남의 눈에 띄게 하기 위해서라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깃들어 있다면 그것이 과연 인간으로 오신 하느님의 겸허를 기념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한 때라도 그늘 속에 신음하는 이웃을 생각한다는 마음은 귀한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의 정신은 한 때 정신 바짝 차리고 이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아픔과 서러움, 고통과 외로움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신학자들은 입을 모읍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크리스마스의 의미라고 합디다.

하늘에서 땅 위의 인간에게 동정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동참한다는 것은 그들의 어두운 처지를 밝은 처지로 바꾸기 위해 공동으로 투쟁하는 구체적인 일상의 삶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장식으로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고 선물과 구호성금으로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려 하는 크리스천들의 낭만적 신앙은 상혼을 부추길 따름입니다.

상혼에는 예수의 정신, 예수의 사랑이 깃들지 못합니다.

루가복음의 저자가 고발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 세상은 돈벌이에 너무 바쁩니다.

자기의 이기적 욕망과 안일무사한 삶을 만족시키기 위해 너무 바쁩니다.

자기를 들어내고 인정받고 다른 사람 위에 올라서서 지배하기에 너무 바쁩니다.

그래서 가장 기본적인 인간으로서의 윤리마저도 외면하고 맙니다.

내가 개를 기르면서 그리고 집 주위의 새들을 관찰하면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만, 의식이 없다는 짐승들도 새끼를 낳는 암컷에게 모든 편의를 양보합디다.

그런데 예수를 낳은 마리아는 산모의 모든 편의로부터 소외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진실로 겸허하게 이 고발을 경청하지 않는다면 기독교 최대의 명절은 장사꾼들의 최대의 대목이 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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