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초대 교부들의 삼위일체 논쟁과 기독론 논쟁 - by 지기

저는 신입니다. 왠줄 아십니까?

제 일기장에 제가 신이라고 적혀있기 때문입니다. 제 말은 진리입니다. 왠줄 아십니까? 제 일기장에 제 말은 진리라고 적어놨기 때문입니다. -엑스

[펌] 초대 교부들의 삼위일체 논쟁과 기독론 논쟁 - by 지기

※※※ 0 4,717 2004.11.07 22:54

초대 교부들의 삼위일체 논쟁과 기독론 논쟁    
작성일: 2001/01/12 12:05:15
작성자: 지기
   

삼위일체 부분과 관련하여..
기독교인님들.. 공부 좀 하고 오세요..
앵무새처럼 되뇌이지만 말고..
공부할 줄을 모르나??
아니면 떠먹이는 것만 받아먹는 바보들인가??

참나.. 안티 하면서 안티 아닌 기독교인 공부까지 시켜가면서..
이렇게 해야 하나..
휴우..

**

1. 아리우스( Arius )

아리우스는 약 310년경 알렉산드리아의 장로이면서 안디옥의 루키안의 제자이었으며, 루키안은 사모사타의 바울 밑에서 배운 사람이었다.

아리우스의 주요 관심은 하나님의 유일성과 초월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존재의 시작이 없는 단 한 분, 출생되지 않는 하나님, 기원이 없으신 한 분의 실유만이 있을 분이라는 군주신론파의 단일신주의 원리(the monotheistic principle)였다.

아리우스의 견해는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고, 표현할 수 없으며, 이해할 수 없고, 절대적으로 유일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유한한 피조물과 직접적인 교통을 할 수 없다. 따라서 그 본성과 동일한 어떤 본질도 생산할 수 없다.

절대자는 세계를 직접 창조할 수 없기 때문에 창조전에 중간존재(middle being)가 필요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유로운 의지로 로고스 혹은 지혜를 창조하시고 이로써 모든 만물을 만드셨다. 이 중간 존재를 통하지 않고는 피조물이 신성과 직접 교통할 수 없다.

아들이 언제나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이는 만물이 무에서 나오고, 모든 창조된 본체가 존재하게 되었던 때에, 하나님의 로고스도 역시 무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아들에게는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으며 하나님은 로고스와 지혜가 없었을 때에도 홀로 존재하였다. 하나님은 자신이 로고스와 아들이라고 부른 자들을 먼저 만드셨고 우리는 그들을 통하여 창조되었다( Orationes contra Arianos,1,5.).

로고스가 만물보다 먼저 나셨다함은 곧 지음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시작이 없으나 아들은 시작이 있었으므로 아들이 지음을 받았을 때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셨다.

아리우스는 성령은 피조된 많은 능력들 가운데 아들 다음으로 제2의 독립된 위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성자는 성부에게, 성령은 성자에게 종속된다. 그 이유는 성령이 성자에게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의 가르침의 결과는 로고스를 반신 반인으로 깍아 내리는 것이었다. 로고스가 다른 피조물 보다 무한하게 초월할 지라도 로고스 자체는 성부와의 관계에서는 한갖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아리우스는 두가지 목적을 달성하려고 노력하였다. 즉 그는 교회와 더불어 로고스 기독론을 독립적 존재로 인정함과 동시에 군주신론자들과 더불어 기독교의 유일신 교리를 보존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두 가지 의도를 결합시킴에 있어서 그는 종속설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결과 성자를 성부에게 절대적으로 종속시키는 관념이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신성은 위태롭게 하였다.


2. 니케아 회의 ( The Council of Nicea )

아리우스는 알렉산드리아 감독이었던 알렉산더에게 318년 정죄를 받았으나 이 분쟁은 곧 동방교회 전체로 확산되었으며, 아리우스는 특히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로부터 후원을 얻게 되었다.

한편 콘스탄틴 황제는 이 분쟁이 교회의 통일성을 저해함은 물론 로마제국 내부의 힘을 약화시키는 사건으로 보고 이 일에 개입하여 분쟁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는 먼저 자신의 황실 감독인 호시우스(Hosius)를 중개자로 알렉산드리아에 보냈으나 실패하였다. 콘스탄틴은 325년 니케아에서 종교회의를 소집했으며 여기에 아리우스 문제뿐 아니라 기타 몇 가지 문제를 함께 취급 하고자 하였으며 이 회의에 300명이 넘는 감독들이 모였다.

회의가 시작하자 감독들은 세 파로 나뉘었다.

1) 동일론자들은 숫자적으로 약했으나 강한 신념을 갖고 있었으며, 알렉산더와 아타나시우스에 의하여 영도되었다.
2) 아리우스파는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에 의하여 영도되었다.
3) 나머지는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과 화평을 희망하는 자들 인데,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도 여기에 속하였다.

동 회의에서 최종적으로 채택한 신조는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에 의해 발표되었고,아리우스를 반대하는 신앙 선언문을 작성하였다.

니케아 신조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 하나님 곧 아버지"를 믿음과 동시에 "한 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즉 한 분 주님이시요, 같은 하나님이시다.
둘째, 성부는 불가견적이고 성자는 가견적이라는 말이 없다.
이것은 영지주의 이단을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터툴리안 보다 일보 전진한 것이다.
세쩨, 로고스가 언급되지 않은 것은 중요하다.
이것은 스토아 철학이나 신프라톤 등으로 혼동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네째,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독생자'이심을 강조한 점이다.
이로써 사벨리우스의 동질 동격설을 완전히 배격한 것이다.
다섯째, 이 독생하심이 아버지의 본질에서 나셨다는 것은 신성의 근원이 아버지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여섯째, "하나님으로 부터 나오신 하나님이여"은 무에서 지음받은 피조물과는 다르다는 것으로 아리우스의 피조설을 뿌리부터 제거해 버렸다.
일곱째, "아버지와의 한 본질"이란 말이 덧붙여진 것은 니케아 신조 전체를 나타내는 증표이다.
이 동질은 아리우스의 피조설이 밀고 들어올 수 없는 방파제도 되지만 중도파의 주장인 유사설도 막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신조에 포함된 이러한 문자들을 통하여 아리우스주의는 한 치도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였으며 신조의 끝에 가서 저주의 문구까지 첨부시켰다.

이 신조 속에 본질이라든가 동일본질이라는 말이 있다고 해서 철학적이고 사색적이라고 속단하는 것은 너무 피상적이다. 이 신조는 오히려 종교적이고 구원론적이다.

그러나 한편 니케아 신조는 성령에 대한 문제를 비롯해 삼위일체론의 문제는 앞으로 반세기 이상 논쟁이 계속되어야 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과 완전히 동일본질이시면, 그는 곧 하나님으로서 그 아버지와 '하나이심'을 강조하게되며 이와 같이 할 때 아들의 개체성은 사실상 희박해지며, 이것은 일종의 사벨리우스주의 경향이라고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니케아 신조는 성령에 대한 고백이 지나치게 간단하다. 성자와 성령이 서로 구별된다는 것만은 확실하나 동질인지 혹은 발출인지조차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아타나시우스와 세 갑바도기아 교부들에 의하여 더욱 발전하게 된다.

3. 아타나시우스( Athanasius )의  삼위일체

아리우스 주장에 대하여 심하게 반발한 인물은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알렉산더와 그의 집사 아타나시우스였다. 알렉산더가 죽은 후에 아타나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 되었고 그는 니케아 결정 사항을 끊질기게 주장했던 까닭에 그에게는 쉬임없이 박해가 뒤따른다.

그는 다섯 차례에 걸쳐 감독직에서 피신해야 했으며 거의 20여년 동안 망명 길에서 보내야만 했다. 이렇게 목숨을 걸고 아리우스주의와 싸운 것은 철저한 구원론적 입장에서 였다. 구원은 하나님에게서만 올 수 있으며 타락한 인류를 구원한다는 것은 반신 반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아타나시우스에게 있어서 원리는 근본적으로 두 개인데 유일신관과 기독교 구원론이었다.
그의  관심은 삼위일체 교리를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룩된 구원과 결합시키는 것이었으며, 그가 보기에는 이것이 모든 신학의 핵심이었다.

제 1 절  아타나시우스의  구원론

아타나시우스의 신학에 대한 설명은 그가 구원의 교리를 제시했다는 데서 시작하여야 한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육체적인 소멸에서 구원하셨다는 사상을 중요하게 취급한다.
아담과 하와는 본질상 부패할 수 있었으나 만일 그들이 계속 선하였다면 [로고스]가 참여로부터 나오는 은헤에 의하여 그들의 자연적인 상태를 피할 수 있도록 운명 지워졌다( de Incarnatione etc.Arianos 5 ).

그러나 그들은 타락하여 스스로 부패하게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합리적인 인간은 점진적인 부패의 과정에 의하여 소멸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인간을 창조하신 '로고스'가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성육신에 의하여 세상에 오셨는데, 이는 창조시 하나님의 의도가 좌절되지 않도록 인간을 재창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성육신한 '로고스'에게는 또 하나의 사역이 남아 있었다. 아담에게 내린 하나님의 선고로 인하여 사망이 권세를 획득하였다. 그러나 이 권세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의하여 소멸되었다. 이 사망의 소멸은 주님이 다시 부활하신 사실에 의하여 입증이 되었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그 부활을 통하여 썩지 않게 되었음을 안다.

성육신에 대한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은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되도록( ινα  θεοποιηθωμεν ) 그가 인간이 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구원 교리는 흔히 '육체적'(physical)이라고 부른다. 즉 죄와 죄책으로부터의 단순한 자유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인간 본성의 회복이며 불명성을 뜻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신격화(divinization)이다.

이레네우스와 마찬가지로 아타나시우스도 창조에서 시작하여 종국에 가서는 완성 단계에 이르는 구원의 질서를 분명하게 설명하였다. 아타나시우스는 구원과 창조의 근원을 같은 것으로 보았다.  그 이유는 타락한 인간의 구원이 어떻게 보면 재창조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죄란 창조의 질서 안에 들어와서 인간을 멸망으로 인도하는 붕괴작용이며, 새로운 피조 작업을 통해서만 쫒아낼 수 있다. 그러므로 구원이 새로운 창조라면, 창조자 한 분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제 2 절  성자의  동일본질

아타나시우스는 영지주의의 영향으로 종래에 있었던 우주론적 본체론과 기독교 신관의 혼합을 추방하고 아리안주의에 스며든 하나님과 세계의 이원론적 대립으로 인한 중간 존재들을 물리쳤다. 

아들은 그 기원과 본질에 있어서 피조물과 다르다. 그는 피조물과는 '상이한 본질'(ετεροουσιοs)이며  아버지와는 '동일한 본질' (ομουσιοs)이다. 이것이 곧 성부와 성자의 동일한 본질인 것이다.
아리우스는 로고스를 이 세계의 본질과 동일시하였고, 아타나시우스는 로고스와 세계를 분리시켜 하나님의 본질과 동일시 하였다.

아타나시우스는 ουσια(본질-낳으셨다)와  υποστσιs(위격-발출하셨다)을 동일시 하였다. 서방교회와 동방교회 사이에 이 용어 때문에 혼동이 일어나자 알렉산드리아에서 362년 회의가 개최되어 ουσια와  υποστασιs로 인하여 동서방이 더 이상 논의치 않기로 했다.
동방교회는 υποστσιs를 위격으로, 서방교회는 본질로 이해하면 되는 것이지 싸울 필요는 없다고 하였다 (Tom.ad Ant.5,6).

아타나시우스는 신격에서 위격들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특이한 방식으로 설명하였다.
아버지는 활동의 근원이시고, 아들은 아버지의 외형적 활동에 의하여 조건지워진 외형적 활동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이 때 성령께서도 함께 나타나셔서 각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수행하신다.

아타나시우스는 성령도 역시 동일본질에 속하신다고 가르쳤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외형적 활동은 분리되지 않는다. 다시말해서 성부. 성자.성령은 모두 함께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제 3 절    성령의  동일본질

교회가 약 3세기 동안 그리스도의 본성에 관한 논쟁에 모든 정력과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성령에 관해서는 별로 중요한 논쟁이나 저작물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부진한 가운데서도 초대교부들은 성령의 본질과 기원에 관하여 연구를 진행시켰다.

저스틴(Justin)은 다만 성령을 선지자나 사도들을 영감케하는 예언의 영으로만 생각하였다.

이레네우스(Ireneaus)는 창세이전의 영계를 사색지 않고 시공계의 구속사역에 관계하면서 성령에 대한 언급을 한다.  이레네우스는 명시적으로 성령을 하나님이라고 명명하지는 않았으나 그에 눈에는 분명하게 신적 존재로 보았다.

터툴리안(Tertullian)은 성령의 신성에 관해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하였다. 그는 성령은 아들을 통하여 나왔고 자신의 고유한 존재 형태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였다(Adv. Prax.4,7.)

오리겐(Origen)은 성령의 궁극적 근거는 성부 이지만 그 근거는 성자로 말미암아 성령에게 전달되고, 성령은 성자에게로부터도 구별되는 그의 모든 속성을 이끌어 낸다고 하였다.

니캐아 회의 때 감독들은 성자에게만 논쟁의 초점이 되었기 때문에 성자의 신성에만 모든 신경을 집중시켰으며 성령 문제에 대해서는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단순하게 "그리고 성령을 믿는다."라는 문구를 삽입하는 정도로 끝내고 말았다.

아타나시우스도 처음에는 성자의 동일본질을 단언한 니케아회의의 규정은 성령에까지 확대시키거나 확대 함으로 그의 삼위일체 교리를 공식적으로 완성하려고 하지 않는다. 아마 그는 성자에 대한 교리가 인정되면 그 결과로 성령의 신성도 인정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356년이 조금 지난 후에 {ad Serpionem}의 서신들을 쓰기 시작하였는데 여기에서 아타나시우스는 성령의 신성에 관하여 충분하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성령의 문제는 니케아회의 이후와 362년 알렉산드리아 대회 까지의 기간 사이에 몇몇 신학자들은 성령의 문제와 성령의 신성에 대하여 많은 신경을 쏟곤 했다.

아타나시우스도 물론 성령도 역시 동일본질에 속하신다고 가르쳤다. 아타나시우스는 {the Orations}에서 성자에 대하여 주장을 했듯이 {ad Serapionem}에서는 똑 같은 전개 방법으로 성령에 관하여 전개하고 있다. 그는 삼위일체는 실제적인 영원한 삼위일체임에 틀림없으며 그 안에는 어떤 피조물도 없다.

아타나시우스는 여기서 성령은 피조된 본체가 아니고 하나님에게 속하며, 성령은 불변하고, 편재이며, 유일하게 하나라고 주장하였다. 성령은 스스로 교류한다. 이렇게 함으로 아타나시우스는 성령도 하나님이며, 동일본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성령은  동일한 신적 본질의 일부분으로서 창조된 영이 아니시다. 인간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신격화되며, 만일 성령께서 하나님 자신의 본체에 속한 분이 아니시라면 갱신은 순수한 구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성령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면 그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성령이 우리를 거룩하게 만든다면 그는 사실 하나님의 신성을 가진 것이며, 성부는  말씀을 통하여  성령 안에서 모든 것을 이루신다고 말함으로써 삼위의 불가분열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당시에 유행하던 관례를 존중하여 성령을 직접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신중을 기하였으나, 성령이 말씀과 성부에게  속하여 있고 그분들과 더불어 동일본질이라는 것이다.

마게도니우스주이자 혹은 성령훼방론자(Pneumatomachians)들은 성령의 동일본질을 인정하지 않으며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는 자들이었으며, 성령은 하나의 피조물이며 단지 어느정도에 있어서만 천사보다 우월한 봉사하는 영들 중에 하나라고 한다.

이들 마게도니우스의 추종자들은 362년 알렉산드리아 대회 때 정죄를 당했다.

이렇게 해서 삼위일체론을 최종적으로 확정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이것은 엄격한 니케아파와 보수적 유사본질파 사이에 동맹을 가능케 했으며 성령의 동일본질을 포함시키는 문을 확대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령의 위치를 정통적 위치에서 회복시킨 사람이 아타나시우스였다.

만일 아타나시우스가 성령의 동일본질을 방어하는데 있어서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면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그 과제를 조심스럽고 용의주도하게 완성시켰다.

4. 결    론

삼위일체는 초대교회 때부터 세례 등의 신앙 속에서 성부,성자,성령으로 고백되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삼위일체론은 사변적이나 논리적인 신학논쟁이기 보다는 실은 실제적인 신앙의 문제였다.

아타나시우스가 생명을 걸고 아리우스와 싸운 것도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심장의 부분에 해당되며 기독교의 사활의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삼위일체 교리는 유대적 기독교,영지주의의 이원론, 아리우스주의, 양태론 등의 이단들과 싸우는 가운데 그 기초가 놓여져 있다.

이 논쟁의 중심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과 그 업적에 대한 해석이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신성이 부인되면 삼위일체가 무너지고 이 삼위일체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기 때문에 이점을 고수 하고 방어한점이 아타나시우스의 공로라고 할 수 있다.

아타나시우스는 일체로서의 삼위께서 본성에 있어서 한분이시며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고 명백히 하였다(the Orations ⅲ.15; ad Serapionem ⅰ.2 ). 그러나 하나님 내에서의 구별들의 성격은 잘 나타나 있지 못하다. 위격이라는 말은 아타나시우스의 신학적 용어에 속하지 않는다.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아타나시우스는 위격에 관한 문제를 좀더 깊이 다루지 못하였다. 그는 삼위일체의 용어를 정립하지 못했다. 객관적으로 신이 어떻게 하나인 동시에  셋인가에 대한 상호관계에 관한 언급이 미흡하다.

위격에 대한 문제를 소홀히 다루게 되면 그 사상적 경향이 사벨리우스주의적인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받게 된다. 그 당시 그가 사벨리우스주의자로 오해 받은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는 확실히 양태론자는 아니었다.

또한 아타나시우스는 성령의 발출(procesion)에 대한 정확한 교리를 가지고 있지 않는 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아타나시우스는 그리스도의 신성 및 삼위일체론의 정립은 기독교 신앙의 존폐가 결부되어 있음을 알고 그의 일생을 바치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영지주의의 영향으로 종래에  있었던 기독교에 스며든 신관의 혼합을 추방하고 아리안주의 속에 스며든 신과 세계의 중간존재(middle being)을 물리쳤다.

아타나시우스가 정립하지 못한 삼위일체론은 그후 갑바도기아의 세 교부를 거쳐 381년 콘스탄티노플회의에서 성령의 동일본질 문제가 확립되며 고대 삼위일체론은 서방교회에서는 어거스틴이 정립을 하고, 동방교회에서는 다마스카의 죤에 이르러 정립하게 된다.

질문 1. 삼위일체 논쟁과 기독론 논쟁은 사변적이고 논리적인 싸움이고 기독교를 더욱 헬라화로의 가속을 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는가?

질문 2. 니케아 신조에 들어간 동일본질이라는 용어 사용에 있어서 동서방 및 학자마다의 차이점이 있는데 동일본질이라는 용어는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아타나시우스의 동일본질은 양태론적인 요소는 없는가?

질문 3. 그외 삼위일체 논쟁이나 기독론 논쟁에서 나오는 용어들은 다른 용어나 다른 방법은 없었는가?
 
질문 4) 451년 칼게돈 회의 정립된 기독론은 최상의 결론이었나?
문제가 있다면 어떠한 문제가 있는가?

질문 5.  아타나시우스의 성령의 발출이론은 어떠한가?  이중발출 같은 요소는 후에 서방교회에서 "filioque" 논쟁으로 발전하고 급기야는 동서방 교회가 갈라지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는가?

**

위대한(?) 아타나시우스와 아리우스와의 싸움에서 이긴 아타나시우스의 견해가 받아들여져서 삼위일체론이 형성되었으며.. 이것도 하나의 '론'에 지나지 않는다..

쩝.. 기독교인들은 아니라고 강변하겠지만.. 어쩌겠는가.. 위에 열거한 바와 같이 기독교의 역사 속에 한 장면인 것을..

힘이 있는 자의 논리가 역사를 바꾼다..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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