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안티님 보세요~

저는 신입니다. 왠줄 아십니까?

제 일기장에 제가 신이라고 적혀있기 때문입니다. 제 말은 진리입니다. 왠줄 아십니까? 제 일기장에 제 말은 진리라고 적어놨기 때문입니다. -엑스

초보안티님 보세요~

버벅이 2 4,064 2004.10.31 12:33

백범선생이 기독교로 개종하셨다는말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선생은 매우 자유로운 종교관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작금의 편협한 기독교 종교관을 가지고 그분의 종교사상을 평가한다는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백범선생이 백범일지에서 하신 말씀을 언급하자면,

'어느 한 학설을 표준으로 하여서 국민의 사상을 속박하는 것은 어느 한 종교를 국교(國敎)로 정하여서 국민의 신앙을 강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옳지 아니한 일이다. 산에 한 가지 나무만 나지 아니하고 들에 한 가지 꽃만 피지 아니한다. 여러 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위대한 삼림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백 가지 꽃이 섞여 피어서 봄들의 풍성한 경치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에는 유교도 성하고, 불교도, 예수교도 자유로 발달하고, 또 철학으로 보더라도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 다 들어와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니, 이러하고야만 비로소 자유의 나라라 할 것이요, 이러한 자유의 나라에서만 인류의 가장 크고 가장 높은 문화가 발생할 것이다.'
-「나의 소원」중에서 -

그리고 기독교와 관련해서 백범선생의 활동근거자료는 거의 없습니다.
지금까지 백범김구(金九, 1876∼1949)와 기독교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선생이 1929년에 쓴 자서전《백범일지》(白凡逸志) 상권에 나오는 사실- 그 내용은 선생이 27세이던 1902년 친구 우종서(禹鍾瑞) 조사(助事)의 권유로 입교하기로 결심하였으며, 1903년 2월 황해도 장연읍 사직동에 이사한 후 교육에 전력하다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진남포 Epworth( 懿法) 청년회 총무로 서울 상동교회에 와서 상소운동 등 구국운동을 했다는 것- 그리고
 한국 장로교 선교사들이 발행하던 선교잡지 The Korea Field의 1904년 11월호와 1905년 8월호에 나오는 기사정도입니다.

(참고로 the korea field의 번역자료를 같이 올립니다)
," The Korea Field(1904. 11), p. 217.
"안악 시찰 보고서에 의하면 작년에 개종한 김구와 오순형이라는 두 청년은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 사업과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일로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한다. 그들은 좋은 집안 출신들로서 경제적 형편도 안정되어 있으므로, 많은 시간을 성경 공부와 전도에 바칠 수 있다. 김씨는 작년 가을에 개종하였고, 평양 겨울 사경회를 비롯하여 여러 달 동안 사경회에 참석하였다. 올해 2월에 해주에서 장연읍으로 이사하였는데, 그곳에서 쉬지 않고 가르치고 전도하고 있다. 오씨는 장연 사람인데, 작년 가을 숭실학당에 입학하였다. 당시 그는 기독교를 고백하는 교인은 아니었으나, 성경에 관심을 가지고 읽고 있었다. 그는 숭실학당에서 공부를 잘 했고, 처음부터 예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평양 시내 전도대회 기간에는 처음으로 가두 전도를 시도하였다. 일본군이 평양에 진격하자 그는 고향집으로 돌아갔고, 김씨와 함께 기독교 복음에 대해 아는 것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는 이 일을 위해 자신의 집을 제공했고, 그밖에 장터들을 찾아가 전도하고 길거리와 농부들이 일하다가 쉬는 들판을 찾아가 전도하였다. 곧 여러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들은 오씨 집에 모여 주일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예배 참석자는 약 40명 정도이다. 오씨는 다가오는 가을에 숭실학당에 가서 과정을 마치기를 원하지만, 이 일이 너무 중요하여 떠나지 못하고 있다."

"숭실학당 진보 : 1904년 9월 베어드 박사 개인 보고서," The Korea Field(1904. 11), p229. 나는 고무적인 많은 경우들을 쓸 수 있지만 지면상 한 가지만 언급하겠다. 황해도에서 온 학생 오씨는 작년 가을 초신자로 입학하였다. 그는 지방 양반의 부유한 집안 자제였다. 그는 학교의 일반적인 영향과 가르침에 의해 기독교가 진리임을 확신하게 되었고, 집으로 돌아간 뒤 고향 이웃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열심히 전도하였다. 러일전쟁으로 학교에 돌아올 수 없게 되자, 집에 남아서 사랑방에서 친구들과 이웃 사람들에게 전도하고 길에 나가 장날에 모인 군중들에게 전도하였다. 그 결과 한 무리의 신자가 모여 자신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는 이미 교인이 된 한 친구 [김구]와 함께 집 근처에서 학교를 시작했다. 그 두 사람은 함께 [평양에서 열린] 교사 사경회에 참석했고, 여름 영수 사경회까지 남아서 참석하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들은 숭실학당을 올해 졸업하고 학교 교사로 있는 최광옥에게 함께 가서 전도해 줄 것을 부탁했다. 최씨는 이를 받아들여 갔고, 가는 길에 배에 탄 사람들에게 전도하였다. 이때 신천에서 온 두 사람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 장연 집에 도착하여 최씨는 매일 저녁 사랑방에서 전도하고, 모인 신자들의 믿음을 강하게 하였다. 얼마 후 그는 평양으로 돌아왔는데, 오씨의 형 집안 사람 다섯 명이 새로 믿기로 결심하였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다."

"한 해의 회고 : 1905년 7월 샤프 목사의 개인 보고서," The Korea Field(1905. 8.), p. 269. 장연읍 : 이 교회는 작년과 동일하게 계속되고 있지만 영적으로 거의 침체되어 있다. 나는 올해 가을 그들과 함께 며칠을 보내면서 그들의 처지에 적절한 진리들을 가르치기를 희망한다. 지도자는 좋은 사람이다. 그는 매일학교에 아주 많은 소년들을 모았는데, 대다수가 불신자 가정 자녀들이다. 그는 연료비와 같은 운영비를 충당할 수 있을 만큼의 학비는 받고 있다. 성경 공부가 이 학교의 중요한 한 특징이다. 그는 이 학교를 통해서 읍의 젊은이들에게 다가가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는 이 일을 자신의 주도로 하고 있는데, 이 정책이 현명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그의 정신만큼은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이상이 기독교 역사학회에서 주장하는 백범선생의 기독교관련 자료입니다.

판단컨데, 백범선생의 기독교 개종은 종교적 교리의 선택이 아니라 신교육운동의 한 방편이였다고 보여집니다.다시말하면 선생이 1897년(22세)에 감옥에서 신서(新書)들을 읽고 개화사상을 갖기 시작하여, 탈옥 후 한때 불승(佛僧)이 되었다가 신교육운동에 종사하게된것과같은 맥락으로 이해할수 있는 문제라고 보여집니다. 
백범은 동학농민혁명운동 실패 후, 안중근 의사의 부친 안태훈(安泰勳)의 집에서 유학자 고능선(高能善)선생의 강의와 훈도를 받고 크게 깨우친 바가 많았는데, 1895년 8월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만행이 자행되자, 국모시해(國母弑害)에 복수하고 일본을 한반도에서 몰아내려고 만주 삼도구(三道溝)에 건너가 김이언(金利彦)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활동하였고 김이언 의병부대는 강계(江界)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다가 현대화력에 눌려 패전하였고, 백범은 의병운동에 실패한 후, 개화,현대화,신교육에대한 필요성을 절감했고, 그러한 맥락에서 기독교를 택한것으로 보여집니다

(이하 백범연구2집에실린 논문 "백범의 정치사상과 통일노선")

1. 머리말

1945년 광복 직후, 우리 민족 앞에는 세 개의 대표적인 민족노선이 제시되었다. 김일성을 통해서 나타난 공산주의라는 소련식 민족노선, 운남 이승만 박사가 제시한 미국적인 민족노선, 白凡 金九 선생이 제시한 자주적이며 민족적인 민족 노선이 그것이었다. 엄격히 말해서 김일성에 의해서 제시된 노선은 분열 대립적인 외래조사와 그 세력에 얹혀온 것으로서 굳이 민족노선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것이었는지 의심스러운 것이었고, 운남이 제시한 노선도 유사한 종류의 또다른 외래사조에 스스로 편승한 것이었지만, 白凡이 제시한 노선은 민족 통합적이며 자주독립적인 것이었다. 본질적으로 공존이 불가능했던 이 세 노선의 경쟁에서 운남과 김일성의 조선이 반쪽씩의 승리를 거두었고, 白凡의 노선은 참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당시에 승리 혹은 선택되었던 이 두 노선은 그 이후 40여 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어느 것도 민족문제를 해결하기에는 타당하지 못하다는 것이 증명되었고, 오늘날의 대안은 오히려 그 때 실패로 끝나던 그 민족노선에 접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냉전 초기에 실패로 끝난 白凡의 민족노선은 재조명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白凡 金九선생에게는 구체적인 연구결과에 의해서가 아니라 세인들의 표피적인 사고에 의해서 붙여진 몇 가지의 상징적인 관점이 있어왔다. 그 첫째는 白凡은 정치를 모르는 테러리스트의 괴수이고, 한 사람의 단순한 극열 항일투사라고만 보는 견해이다. 첫 번째 관점은 주로 白凡이 세련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선입관과 항일독립투쟁기의 그의 독립운동 성격 및 형태에 대한 평가로 보인다.  두 번째의 관점은 반탁운동, 단독정부수립 반대 및 남북협상 참가 등을 국제정세에 대한 몰이해와 공산주의 및 공산주의자들의 전략전술에 대한 인식부족이나 무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광복이후 그의 활동에 대한 평가인 듯이 보인다.

1919년 이후 독립 쟁취를  위한 한국민의 민족운동은 상해 임시정부의 탄생으로 구심점이 되었고, 이로부터 임시정부는 한국독립운동의 중추세력이요, 최고지도기관이었다. 따라서 임시정부의 활동은 1919년부터 1945년까지 한국 민족주의의 전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가장 중요한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고, 그 속에 내포된 임시정부 최고지도자의 개인적인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白凡은 임정 초기 경무국장으로 출발하여 1923년 내무총장, 1927년 국무령, 1940년 주석으로 실질적인 임정의 최고지도자였다.  따라서 白凡의 개인적인 정치에 대한 사고 내지 성향과 임시정부의 모든 정책 및 존립양식과는 밀접한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白凡의 정치사상에 관한 연구는 항일민족투쟁기 대표적인 민족지도노선의 사상적 기반에 관한 성격 규명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 된 것이다.

필자는 본고에서 白凡의 정치사상을 구명하기 위하여 먼저 그의 독립운동 성격을 개관하고, 이와 관련하여 민족 주체성의 바탕 위에 전개된 그의 정치사상을 검토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토대 위에서 광복이후 그의 정치적 활동, 즉 반탁운동, 단독정부수립 반대, 남북협상 참가 등으로 나타난 그의 민족노선이 논리적으로 어떠한 내재적 일관성을 견지하고 있는가를 알아보고자 한다.  물론 이 연구를 진행하는 필자의 입장은 앞에서 언급된 白凡에게 붙여진 상징적 관점들은 오류라는 가정을 전제하는 것이다.  또한 그의 민족노선은 미완의 비원으로 남아있는 민족문제 해결에 적실성 잇는 교훈과 시사를 줄 것이라는 기대가 깔려있는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2. 白凡 獨立運動의 自主的 性格

白凡 金九선생은 그의 일생을 완전.자주.독립.민족국가의 건설을 위해 받쳤고, 이 일과 관계없는 일은 그에게 있어서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의 생애 전체는 논리적으로 앞뒤의 연장선상에서 독립운동 그 자체였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의 독립운동과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의 전 생애를 통한 여건과 그 자신의 성장 및 변화 발전 과정을 동시에 분석하고 검토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지만, 본 연구에서는 그의 임시정부 투신 이후의 독립운동 방법론을 중심으로 그 성격을 살펴보고자 한다.

1) 항일독립운동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전, 미주의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운동에 관한 방법론상의 견해 차이로 외교독립론을 주장하는 이승만계, 무독립론을 주장하는 박용만계, 실력양성론을 내세우는 안창호계로 분열.대립되어 있었다.  임시정부 수립 이후에는 지연에 의한 파벌과 이데올로기적 분열이 가세되어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독립운동의 방법과 사상적 대립이 계속되는 가운데서 白凡이 시종일관한 방법론은 자주적인 무력투쟁론이었고, 사상적으로는 반공산주의적인 입장이었다.

독립운동계에서 白凡이 가장 핵심적인 지도자로서 확고한 위치를 구축한 시기는 1932년 이봉창 의사의 일황에 대한 투탄의거 이후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임시정부는 심각한 재정난에 봉착하여 독립운동의 지도적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독립운동의 침체상태를 타개하기 위하여 실행된 것이 이의사의 일황투탄의거였다.  이 일을 계획하고 준비한 白凡의 의도는 남에게 도움을 청하기 전에 참혹한 사선(死線)을 헤매고 있는 민족이 "최소의 역량을 가지고 위대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은 이 길밖에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최소한일 망정 스스로의 힘으로 투쟁하여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태도는 그의 일관된 신조였다. 그 후 일본의 상해 침공이 있었는데, 이의사의 의거가 그 한 원인이었다는 설도 있다. 이 싸움의 전상병을 실은 트럭이 피를 떨어뜨리며 상해 시내를 왕래하는 장면을 본 白凡은 "언제 우리도 왜와 싸워 본국 강산을 피로 물들일 날이 올까"하고 눈물을 흘렸다. 白凡은 본래 폭력이나 전쟁을 좋아하는 성품은 아니었다. 다만 독립운동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입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남의 도움이나 구걸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白凡은 이러한 독립운동의 성격을 누구보다 철저히 인식하고 있었고, 이러한 성격에 가장 적절한 방법, 즉 자체적 역량을 기반으로 스스로 투쟁하여 쟁취하려는 강력한 자주정신으로 무장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자주정신은 바로 민족주체성이었고, 그의 정치사상이 자아준거적으로 되는 씨앗이었다.

자주적인 무장투쟁론은 그 논리적 귀결로 임정 혹은 白凡 자신의 군대를 가져야 한다는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혼란과 분열을 거듭하던 독립운동계에 정당 통합이 있었다. 1940년 4월 1일 민족진영의 3당, 즉 金九의 한국국민당, 이청천의 조선혁명당, 조소앙이 재건한 한국독립당이 통합되어 白凡을 주축으로 민족진영 본래의 당명인 독립당이 결성되었는데, 그 당책의 제 3항에는 "장교 및 무장 대오를 통일훈련하여 광복군을 편성함"이라고 하여 임정 초에 계획되었던 관복군의 명칭과 그 결성의 뜻이 나타나 있으며, 제 4항에는 "적 일본의 침공 약탈세력을 말살하기 위하여 일체의 수단을 운용하며 또한 대중의 반공(反攻)인 무장적 전투와 국제전선 등의 독립운동을 전개한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자체의 군대를 조직하여 대일항쟁을 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남의 나라 영토 내에서 군대를 창설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白凡은 결국 광복군 창설에 성공하였고, 훈련과정에도 지대한 관심을 쏟았다.

白凡은 광복군의 역할과 조국 독립의 함수관계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광복과 독립이 같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白凡의 독립운동을 성격지우는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광복의 소식을 들은 것은 본국 수복을 위하려 광복군 제 2지대가 미군에게 특수훈련을 받고 있던 서안(西安)에서였다. 본국 침투의 희망에 부풀었던 白凡에게 광복의 수식은 "기쁜 소식이라기 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그 이유는 그렇게 조국의 관복을 염원하던 그였지만 "이번 전쟁에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일본의 항복이 바로 우리의 독립이 아니라는 상황인식때문이었다. 이렇게 볼 때, 白凡의 자주적 무쟁투쟁론은 국제정치나 외교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뿌리였다고 볼 수 있다.

무력항쟁과 더불어 白凡 독립운동의 자주적 성격을 더욱 분명히 한 것이 반공산주의적인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초기에 白凡이 반공산주의적인 입장을 취한 이유는 이동휘(李東輝)와의 대화에 잘 나타나 있다.  그 당시 白凡은 공산주의 그 자체보다는 공산주의를 독립운동이나 혁명의 이념으로 할 경우에 제기될 "국제공산당의 지휘와 명령"을 문제시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자주적 무장투쟁이라는 방법론과 논리적으로 긴말한 내적 일관성을 갖는 것이다. 이것은 만약 공산혁명으로 독립이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본을 몰아내고 다른 지배자를 또 다시 불어들이는 것으로 진정한 독립의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후 白凡의 반공산주의적인 입장은 1923년의 국민대표대회, 1927년 11월에 시작되어 1928년에 실패로 끝난 유일독립당(唯一獨立黨)운동의 평가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난다.

2) 새로운 차원의 독립운동

광복 전후, 국내의 정국은 연합군이 즉시 진주하고 임시정부가 곧 귀국하여 정권을 담당할 것을 기대하는 송진우 계통과 연합군이 진주할 때까지 민족대표기관을 설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여운형 계통으로 분열되었다. 전자가 임정의 귀국시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는 사이에 후자에 의하여 조직된 것이 건국준비위원회였다. 그러나 이 건준에 가담했던 민족주의자들은 얼마 후 여기에서 탈퇴했다. 국내의 정국이 이렇게 분열되어가는 가운데 미군은 9월 9일에야 인천에 상륙하여 남한 일대에 진주하기 시작한 반면, 소련군은 이미 8월 9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한.소국경을 넘어와 8.15 이후에도 계속 진군하여 북한의 주요 도시를 점령하고 소의 5도 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군정하에 행정을 담당케 하다가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하였다. 뒤늦게 남한으로 진주한 미군도 군정청을 설치하고 남한의 모든 행정을 담당하면서 소의 인민공화국은 물론 중경의 임정까지도 한국의 주권행사기관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행정을 담당한 미군은 한국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무한 상태여서 한국인의 여망에 전혀 부응하지 못했다. 게다가 북한과는 달리 정치적 자유가 허락되었으므로 한국 민주당, 국민당, 조선 인민당, 조선 공산당을 위시한 50여개 정당이 난립하여 정치적 통일을 기대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한편 국제정세는 미.소 양대 세력에 의한 이데올로기적 양극화로 치닫기 시작하여 白凡이 그렇게도 우려했던 "해방조국의 장래에 대한 국제적 모순의 개입"은 점점 현실로 나타나 국토의 분단과 이데올로기적 분열이 심화되어 갔다. 이러한 와중에서 남한에 난립한 정당들의 통일운동이 일어나 이승만을 중심으로 공산당까지 포함하여 10월 13일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를 결성키로 하였으나 공산당이 탈퇴함으로써 이승만 중심의 정당통일운동은 벽에 부딪쳤고 정국수습의 기대는 白凡과 임정의 환국에 걸게 되었다.

이상과 같은 상황에서 11월 23일 白凡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다. 白凡은 이미 9월 3일에 발표한 [임시정부 당면정책]에서 독립국가, 민주정부, 균등사회의 원칙을 천명하였으나, 광복 그 자체가 바로 독립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통일된 독립 자주의 민주국가를 완수하기 위하여 여생을 받칠 결심"을 했고, 이 [통일된]이라는 말은 우리 민족 앞에 가로놓인 문제의 핵심이 무엇이며,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통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단서라고 볼 수 있다.

혼란한 국내정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 여러 지도자들과 주요정당의 대표자들이 협의하여 민족통일을 위한 단일 정당 내지 단일협의체를 형성한 후 민족독립을 성취하려는 정당통합 및 독립정부수립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던 12월 27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영.소의 3상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좌.우익 정당들의 관심은 신탁통치 반탁운동으로 집중되었다.

온갖 수모를 무릅쓰고 개인의 자격으로 귀국한 白凡이었지만, 이 소식을 듣자 그는 "새로운 출발로서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동원 위원회를 결성하고 반탁운동에 앞장서는 등 이승만이나 그 밖의 민족진영 지도자를 보다 훨씬 격렬한 반응을 나타낸 것"이었다. 白凡이 신탁통치에 대하여 이러한 반응을 보인 이유는 일본이 물러간 상황에서 우리 만족에게 자치능력이 없는 후진민족이라는 딱지를 붙인 신탁통치는 새로운 상전을 모시는 것, 즉 새로운 식민지적 상황을 만드는 것과 같은 의미로 보았기 때문이다.  신탁통치는 생사를 걸고 임시정부를 지켜온 白凡의 자존심을 깡그리 짓밟는 것이었다. 白凡은 이것을 지배국의 이름이 바뀌었을 뿐이지 식민지 상황의 연장으로 인식했다.

12월 29일 신탁통치반대투쟁위원회가 결성되고 31일에는 대대적인 반탁 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1946년 1월 3일 좌익에서 돌연히 태도를 바꾸어 3상회의 결정지지운동을 전개하게 되자 좌·우익은 정변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사태진전이 이렇게 되자 白凡은 "남의 손에 기대할 것 없이 우리 손으로 신속히 강공(强鞏)한 과도정권을 수립하기" 위하여 입정을 중심으로 한 각계 각층 대표를 소집하여 [비정치회의](뒤에 비상국민회의로 개칭됨)을 열고 과도정권을 수립한 뒤 여기서 다시 국민대표자 대회를 소집하여 임정의 법통을 계승하고 헌법을 제정하여 정식정권을 수립해서 신탁통치를 사실상 배격코자 했다.

그러나 공산당을 비롯한 좌익단체들은 이 비상정치회의를 처음부터 반대하고 별도로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결성하여 죄.우익의 분열은 더욱 심화되었고, 비상국무회의의 최고정무위원회는 [미.소공동위원회]의 개최를 앞두고 민족진영의 통일적 조직을 기대한 미군정 당국의 주선으로 미군정청의 최고자문기관인 [남조선 민주의원]을 탄생시켰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로 끝나고 김규식과 여운형이 미군정 당국의 지원을 받으며 좌·우익합작운동을 추진하고 있을 무렵 白凡은 광복은 연합국의 힘으로 되었으나 독립은 민족이 뭉쳐서 우리의 힘으로 해야 한다는 원칙을 견지하면서 계속 반탁운동을 지도하였다.

白凡에게 있어서 반탁운동은 항일 무장독립투쟁과 동일한 논리적 기반 위에 있는 것으로 단지 투쟁의 대상과 방법이 바뀌었을 뿐인 독립운동 그 자체였다. 그의 민족적 자주정신은 민족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어떠한 형태의 외세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3. 白凡의 政治思想

Daniel Bell이 자본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국가의 중간형태로 생각되는 복지국가의 출현을 염두에 두고, 정치 경제적인 측면에서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선언한 지도 4반세기를 지났지만, 이데올로기적 대립과 갈등은 그 쟁점과 양상 그리고 강도는 달라졌을지언정 그 근본적인 골격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 와서는 탈 이데올로기론 그 자체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고 있다고 비판받는 실정이다. 비록 이데올로기적 양극화의 세계구조가 국리(國利) 추구의 다극체제로 변모되었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이데올로기의 퇴조현상이 아니라 기존의 양대 이데올로기 보다 그것에 다양한 형태로 부착되어 있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전면으로 부상되고 있음을 반증하는 사실이다.

냉전시대의 양극화 구조가 그대로 존속되고 있는 한반도의 상황에서 이데올로기의 문제, 특히 민족주의 문제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애초부터 우리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남.북한에 각기 들씌워진 외래의 정치 이데올로기는 그 어느 것도 궁극적인 민족문제의 해결책이 못된다는 것은 이제 자명한 사실이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조류와 우리의 상황은 우리의 민족주의를 민족문제 해결을 위한 전면으로 부상시키고 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白凡의 정치사상(민족주의)도 새로운 이미지로 부각되어지는 것이다.

1) 민족주의

민족주의는 그 개념이나 종류가 원리적으로 말해서 민족의 수만큼이나 많고 복잡할 것이다. Hans Kohn은 민족주의를 "개인의 최고 충성심이 민족국가에 귀착되는 마음의 상태"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마음의 상태' 그 자체가 바로 민족주의일 수는 없고, 거기에 민족의 전통, 민족의 이익, 민족의 사명감이라는 구성계기가 주어져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민족주의란 "한 민족이 민족의식을 가지고 그 민족의 대외적 독립, 대내적 통일, 발전을 지향하는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 유럽의 민족주의는 중세의 보편적인 통일질서의 붕괴과정에서 그 자신의 존재 이유를 내세우는 복수의 개별국가로 분열되면서 형성된 것이 특징이고, 이것이 근대국가를 형성한 동기이며 이러한 복수국가의 등장이 민족주의 발생의 전제조건을 이루었다. 프랑스혁명을 계기로 일어나기 시작한 민족주의는 자국의 국력배양을 위하여 타국에 대한 침략 및 해외의 식민지 개척과 같은 제국주의적 요소를 내포 또는 용인하고 있었으며, 자본주의의 발전과 동시적으로 발전하면서 자본주의 체제를 돕거나 혹은 자본주의 팽창의 도구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유럽민족주의의 피해 지역에서도 자기 생존 내지 방어적인 민족주의가 대두되었는데, 이것이 소위 말하는 저항민족주의이며, 白凡의 민족주의도 이와 같은 발생 기원을 갖는다.

白凡이 정치.사회화 과정에서 처음으로 대중적 구국운동에 참여한 것은 동학혁명이었으며, 역사적 견지에나 白凡 개인에게 있어서나 이 운동은 실패로 끝났지만 동학의 척양척외 만민평등사상은 완전 자주 독립국가 건설이라는 그의 민족주의 내용의 길잡이가 되었다. 白凡이 민족의식을 표출한 행동으로 볼 수 있는 동학과 의병운동에의 참여는 양(洋)과 왜라는 이민족에 대한 강한 종족적 적개심이 동기가 된 종족민족주의적 성격이 농후한 것이고, 신민회 사건이나 교육문화운동은 저항민족주의의 준비단계로, 임시정부에 투신한 민족 광복투쟁기 동안은 본격적인 저항 민족주의 단계로 볼 수 있다.  또한 환국 이후의 민족 통일투쟁기는 그의 정치활동과 그가 남긴 많은 성명서, 발표문, 특히 [나의 소원] 등을 분석해 볼 때, 완전한 자주 독립국가 건설이라는 저항민족주의와 우리의 역사.전통,문화의 주체성에 우월성을 부여하는 문화민족주의가 그 근간을 이루고 있다.

白凡은 계급이 주로 사회생활의 모순과 대립을 나타내는 것이고, 민족은 주로 그 결합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분단 직전에 있던 남북의 현실을 계급관념으로 이해하고 통일의 희망을 민족에다 걸었다. 남북협상에 참가하기 위해 북행을 결심한 후 기자회견에서 白凡은 공산주의자나 여하한 주의자들을 막론하고 동일한 피와 언어와 조상과 도덕을 가진 한민족이지 이민족이 아니므로 "동족끼리 마주 앉아 최후의 결정을 보러" 간다고 민족의 정의와 그에 대한 기대를 보여주고 있다. 白凡에게 있어서 국가와 민족은 지상의 가치로 "한국이 있고야 한국 사람이 있고 한국 사람이 있고야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또 무슨 단체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또한 그는 계급이나 철학, 사상은 물론 종교까지도 일시적인 것이고, 민족은 영원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외래사조를 맹신하여 일시적인 것을 영원한 것보다 우선시하는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훈계하였다.

일부 소위 좌익의 무리는 혈통의 조국을 부인하고 소위 사상의 조국을 운운하며 혈족의 동포를 무시하고 소위 사상의 동무와 프로레타리아트의 국제적 계급을 주장하여 민족주의라면 마치 진리권 외에 떨어진 생각인 것 같이 말하고 있다. 심히 어리석은 생각이다.  철학도 변하고 정치.경제의 학설도 일시적이거니와 민족의 혈통은 영구적이다. 일찍 어느 민족 내에서나 혹은 종교로 혹은 학설로 혹은 경제적.정치적 이해의 충돌로 두 파 세 파로 갈려서 피로써 싸운 일이 없는 민족이 없거니와 지내어 놓고 보면 그것은 바람과 같이 지나가는 일시적인 것이요, 민족은 필경 바람 잔 뒤에 초목 모양으로 뿌리와 가지를 서로 걸고 한 수풀을 이루고 살고 있다.  오늘날 소위 좌·우익이란 것도 결국 영원한 혈통의 바다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이 모양으로 모든 사상도 가고 신앙도 변한다. 그러나 혈통적인 민족만은 영원히 성쇠흥망의 공동운명의 인연에 얽힌 한 몸으로 이 땅 위에 나는 것이다.

놀랍게도 위의 인용문에서 白凡은 정치적 지혜나 도덕성에 대한 절대적 확실성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이데올로기에 내재된 "과학적 도덕적 확신에 관한 허위성"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양극시대의 출발점에서 이미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다극화 시대를 예측하는 선견지명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영원한 운명공동체인 민족이 "남의 절제도 아니 받고 남에게 의뢰도 아니하는 완전한 자주 독립의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철저히 주체적이고 자력적인 그의 민족주의는 기존의 종교를 초월한 최고의 가치로 승화된 또 하나의 종교형태로 나타난다.

나는 공자, 석가, 예수의 도를 배웠고 그들을 성인으로 숭배하거니와 그들이 합하여 세운 천당, 극락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닐진대 우리 민족을 그 나라로 끌고 들어가지 아니할 것이다.

이와 같은 白凡의 민족지상 사상은 민족의 자존심과 자기절대의식의 소산이고 이러한 자존과 절대외식은 경우에 따라서는 교만과 광신에 빠지기 쉬운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그러나 白凡의 민족적 자존심은 누구보다 강했으되 교만하지 않고 겸허하여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고 타의 자존을 인정했다.  이것은 자민족의 절대와 더불어 타민족의 절대성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민족주의는 그 논리적 귀결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세계 민족의 평등과 국제평화주의로 귀착되는데, 이것은 후진국 민족주의의 일반적인 특징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白凡의 세계 평화주의는 자기를 망각한 감상적인 코스모폴리타니즘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종족민족주의에서 출발하여 저항민족주의를 거친 白凡의 민족주의는 그 구성계기와 연결시켜 볼 때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된다. 완전자주통일독립 국가 건설이라는 민족의 현재적 최고 이익은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를 창조하여 이제까지 그 어느 민족도 해 내지 못한 "인류 공영의 터전을 마련해야 한다는" 미래의 민족적 사명으로 연결되는 창조성으로 나타난다.

이상과 같은 白凡의 민족주의를 일관하는 기저에는 유고사상이 광범위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가 `48년 남북협상에 참가하기 위해 북행하기 전에 '남북협상은 비현실적인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이 일어나자 이에 대하여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정도(正道)이냐 사도(邪道)이냐가 생명이라는 것을 명기해야 한다.… 우리가 망명 생활을 30년이나 한 것도 가장 비현실적인 길인 줄 알면서도 민족의 지상 명령이므로 그 길을 택한 것이다. 과거의 일진회(一進會)도 '현실적인 길'을 가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라고 답했다.

이것은 위정척사론자(衛正斥邪論者)들의 주장에서 [衛]해야 할 [正]의 대상과 [斥]해야 할 [邪]의 내용이 변했을 뿐이지 유교의 대외명분론과 충의관을 벗어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논리는 白凡 민족주의의 제 차원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이다. 그의 민족주의는 종족관념이나 투쟁적 측면에만 치우친 것이 아니라, 초기의 [斥]해야 할 대상이었던 양과 왜에서부터 그 애상이 탐관도리, 국민의 문맹, 일본제국주의, 외국 주둔군, 신탁통치, 단정수립 등으로 변하여 감에 따라 그의 민족주의 차원도 종족민족주의에서 문화민족주의, 저항민족주의, 통합민족주의, 창조적 민족주의로 발전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2) 자유 민주주의

앞에서 우리는 白凡의 민족주의를 검토해 보았다. 일반적으로 민족주의는 그 자채만으로 현실정치에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그 민족의 이익을 최고로 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다른 이데올로기와 결합되어 그 기능을 수행한다. 따라서 자유주의, 보수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심지어는 공산주의와 전체주의와도 결합할 수 있다는 데 있다. 3.1운동 이후 한국의 민족주의는 그 한 원리로서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하였고, 白凡의 민족주의도 자유 민주주의가 매우 중요한 원리였다.

白凡은 "나의 정치이념은 한 마디로 표시하면 자유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야 한다"고 [나의 소원]에서 못박고 잇다. 이것은 白凡 민족주의의 내용, 즉 인류공영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한 완전.자주.독립의 민족국가는 어떠한 이념, 어떠한 제도로 통치되어야 하며, 민족구성원의 개인적 유대와 국가생활의 원리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白凡은 자유가 구속으로부터의 해방 그 자체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길을 통해서 만이 개인의 창의와 발전이 촉진되고, 사회전체의 조화와 번영이 이룩되며, 인류의 보다 크고 높은 문화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고귀한 가치를 지녔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자아실현과 인류의 진보는 자유의 바탕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白凡의 자유사상은 그의 성장과정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어린 시절 그가 양반이 아니었기 때문에 감수해야 했던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분개와 동학에서 배운 만민평등사상은 그의 일생을 통하여 "자유 민권 신장과 평등사상에 헌신하는 잠재력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는 남에게 불편을 주거나 남의 자유를 침범할 우려가 있는 '멋대로 사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나온 법으로 제한되는 한계를 가진 것이라 했다.

자유를 정치이념으로 하는 그에게 "정권에 참여하는 계급 하나를 제외하고는 다른 국민은 조예가 되고 마는" 독재정치는 그 논리적 구조로부터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 중에서 주의 철학을 기초로 하는 독재를 가장 위험시했다. 여기서 白凡이 지적한 독재는 단순한 독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주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가 말하는 '주의 즉 철학'은 바로 전통적 독재와 전체주의를 구별하는 '전체주의 교의'(Totalitarian doctrine)와 동일한 개념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白凡은 이 범주에 이태리의 파시즘, 독일의 나치즘, 일본의 군국주의는 물론 소련의 공산주의와 주자학을 기초로 한 조선까지 포함시켰다.

白凡이 생각한 자유의 필요성과 그 핵심적인 내용은 조선조를 비판하는 대목에서 지극히 명료하게 나타난다.『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발달하지 못하니 이 영향은 예술.경제.산업에까지 미쳤다. ......국민의 마음속에 아무리 좋은 사상과 경륜이 생기더라도 그가 집권계급의 사람이 아닌 이상, 또 그것이 사문난적이라는 범주밖에 나지 않는 이상 세상에 발표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싹이 트려다가 눌려 죽은 새 사상, 싹도 트지 못하고 밟혀버린 경륜이 얼마나 많았을까. 언론의 자유가 어떻게나 중요한 것임을 통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오직 언론의 자유가 잇는 나라에만 진보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전체주의의 폐단이 사고의 자유를 억압하고 표현의 자유를 규격화 시켜서 자아실현과 진보를 가로막는 것이라는 白凡의 통찰을 엿볼 수 있다.

白凡은 공산주의를 비판함에 있어서도 자유라는 관점에서 조선조의 비판과 맥락을 같이 한다. 임시정부 초기에 이동휘와의 대화에 나타난 그의 공산주의 거부 원인은 소련의 간섭 때문에 자주적인 독립운동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였지만, [나의 소원]에 나타난 공산주의 비판은 그 차원을 달리하고 있다.

『시방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이러한 독재정치 중에서도 가장 철저한 것이어서 독재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으로 발휘하고 있다. 즉 헤겔에서 받은 변증법, 포이엘 바하의 유물론, 이 두 가지와 아담 스미스의 노동가치론을 가미한 맑스의 학설을 최후의 것으로 믿어 공산당과 소련의 법률과 군대와 경찰의 힘을 한데 모아서 맑스의 학설에 일점 일획이라도 반대는 고사하고 비판만 하는 것도 엄금하여 이에 위반하는 자는 죽음의 숙청으로써 대하니 이는 옛날의 조선의 사문난적에 대한 것 이상이다.』

전체주의라는 정치현상이 20C에 나타난 '독특한 현상'임을 고려할 때 조선조를 이 범주에 포함시키는 걸은 다소 문제점이 있지만,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원천과 당시 소련의 국내정치 상황을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계속되는 문장에서는 뉴톤, 아인슈타인 등의 학설로 마르크스주의의 모순성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공산주의 비판은 Friedrich와 Brzezinski가 분석한 전체주의의 구조적 특징들-행위와 가치의전면적인 통제하에서 이루어지는 엘리트 지배, 경찰 테러, 무기의 독점, 커뮤니케이션의 독점, 통제경제 등과 상당히 유사한 아니 오히려 선구적인 견해를 보여주고 있음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미국의 민주주의를 찬양하는 가운데서 "미국은 이러한 독재국에 비겨서는 심히 통일이 무력한 것 같고 일의 진행이 느린 듯 하여도 그 결과로 보건대 가장 큰 힘을 발하고 있으니 이것은 그 나라 민주주의 정치의 효과이다"라고 평하고 이어서 민주주의의 절차와 본질 문제에 관하여 "민주주의는 국민의 의사를 알아보는 한 절차, 또는 방식이요 그 내용은 아니다. 즉 언론의 자유, 투표의 자유, 다수결에 복종-이 세 가지가 곧 민주주의다"라고 하여 민주주의의 본질적인 이념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을 혼동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白凡은 미국의 민주주의를 찬양하면서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련의 체제와 비교하여 우열을 가렸을 뿐이지, 결코 그것이 이 지상에서 유일무이한 최고형태의 정치제도로서 어느 나라에서나 미국에서와 동일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白凡의 이러한 인식은 2차대전 후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등지로 이식된 서구정치제도가 산출한 결과에서 그 타당성이 십분 증명되는 선견지명이었다. 그는 아무리 좋은 정치제도일지라도 그것을 그대로 우리 나라에 옮겨 놓는 것을 반대했다. 그는 우리의 환경에 맞는 것은 과감히 수용하고, 거기에다 우리의 역사와 전통 속에서 민족주체성을 살릴 수 있는 것을 찾아 보태는 그 자신의 독특한 제도론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반만년 이래로 여러 가지 국가 형태를 경험한 나라에는 결점도 많으려니와 교묘하게 발달된 정치 제도도 없지 아니할 것이다. 가까이 이조 시대로 보더라도, 홍문관(弘文館), 사간부(司諫府), 사헌부(司憲府) 같은 것은 국민 중에 현인의 의사를 국정에 반영하는 제도로 맛있는 제도요, 과거제도와 암행어사 같은 것도 연구할 만한 제도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白凡이 계승해야 할 우리의 훌륭한 제도라고 언급한 것들이 모두 왕과 조정의 부패를 견제하기 위해 고안된 언론기관이라는 사실이다. 언론의 자유를 자유의 핵심으로 본 그의 자유사상은 구체적인 제도론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논지는 비록 초보적이지만 민족 주체성의 바탕 위에서 제시된 비서구적인 통로를 통한 토착적 민주주의 수립에 관한 방법론으로 평가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白凡이 자유.민주주의를 인간의 진보를 위해 필요하다고 본 논지는 타당하지만, 그의 사상의 내재적  흐름으로 보아 그는 민족의 가치와 자유의 가치가 항상 일치되는 것으로 가정한 것 같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의 사상 속에는 다소의 논리적인 오류가 있는 것이 된다. 논리적으로 보아 그에게 있어서 민족의 가치는 모든 가치에 우선하는 것이므로 자유의 가치는 민족가치의 하위개념으로 보아야 할 것이고, 이 경우 자유가 민족의 최고 이익에 항상 일치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3) 문화·교육사상

白凡은 민주주의의 특성을 국민의 의사를 알아보는 절차로 파악했다. 따라서 내용으로서의 올바른 국민의사는 무엇이며, 어떻게 그것이 형성되는가라는 문제가 당연히 제기된다. 白凡은 "백성들의 작은 의견은 이해관계로 결정되거니와 큰 의견은 그 국민성과 신앙과 철학으로 결정된다"고 보았다. 이것은 형식과 절차로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알맹이로서의 국민의사를 결정하는 요인으로 문화를 지적하는 것이다. 白凡에게 있어서 민주주의는 더 높고 새로운 문화창조를 위해 필요한 정치적 절차와 수단에 불과한 것이었고, 정치이념의 핵심인 자유도 개인주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문화적 진보를 위한 주체적인 단위체로 민족국가라는 상위개념을 갖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관점은 변할 수 없는 하나의 신념과 진리로서 그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음을 다음에서 볼 수 있다.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어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고 돕는 일이다. 이것이 내가 믿는 민주주의요 이것이 인류의 현 단계에서는 가장 확실한 진리이다.』

白凡은 자유라는 그의 정치이념에 의해서 독재 정치체제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과 꼭 같은 논리로 국교나 사람의 사고를 규격화하고 혹은 할 수 있는 모든 문화양식을 거부했다.

『산에 한가지 나무만 나지 아니하고 들에 한가지 꽃만 피지 아니한다. 여러 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위대한 산림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백가지 꽃이 섞여 피어서 봄들의 풍성한 경치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에는 유교도 성하고 불교도 예수교도 자유로 발달하고 또 철학으로 보더라도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 다 들어와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니 이러하고야만 비로소 자유의 나라라 할 것이요, 이러한 자유의 나라에서만 인류의 가장 크고 가장 높은 문화가 발생할 것이다.』

이렇게 극대화된 白凡 문화주의의 포용성 속에는 몇 가지의 논리적 가정이 내재되어 있다. 그 첫째는 각 민족이 이룩한 최선의 문화는 인류의 진보를 위하여 상호보완적이든지 안면 최소한 적대적이 아니라 공존이 가능하다고 보는 점이고, 둘째는 종교간의 갈등이나 이데올로기적 대립 등의 문제는 민족이라는 통일적 개념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 신념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이 그렇게 간단하게 처리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역사적 교훈을 생각할 때, 그의 사상적 단순성 혹은 미숙성을 볼 수 있다.

白凡의 모든 사고 속에 일관되게 깔려있는 민족 주체성은 문화도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높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타난다. 白凡 민족주의의 최고형태요 민족지상의 사명이라고 할 수 있는 수준 높은 문화창조의 열망을 그는

『나는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中     略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만 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라고 토로하였다.

그는 경제력과 군사력에는 지극히 모호하지만 그 한계를 설정하면서도 문화의 소유욕은 끝이 없었다.

그는 한없이 갖고 싶은 문화의 모델을 [인]으로 삼았다. 그는 우리 민족이 [인]을 좋아하는 민족이라 기자(箕子)가 동래(東來)하였고, 공자도 우리 민족이 사는 곳에 오고 싶어한 것처럼 오늘날 세계의 인류가 [인]에 바탕을 둔 우리 민족문화를 사모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이렇게 중요한 문화는 어떻게 배양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白凡의 대답은 한마디로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白凡의 사상은 정치적 균권, 경제적 균부, 교육적 균지를 국민의 기본권으로 하는 삼균주의가 한국 독립당 강령, 임시정부의 기본정책, 건국강령에 채택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그가 설정한 국가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적절한 방법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白凡은 자신이 설정한 국가의 최고 목표인 문화창조에 필요한 교육의 내용을 생활에 필요한 기술을 가르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정치에 대한 철학"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건전한 철학의 기초 위에 서지 않는 지식과 기술교육은 개인이나 국가에 해가 될지언정, 인류의 복지 증진에 이바지할 수가 없다고 보았다.

白凡은 최고형태의 문화로 [인]을 설정했고, 교육의 기반으로 건전한 철학을 강조했지만, 인의 내용이나 본직, 건전한 철학의 내용, 누가 그 교육을 담당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 단지 그가 생애를 통해서 받은 교육의 내용과 그의 사상에 내재된 논리적 맥락 그리고 민족 구성원 전체를 [성인]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는 점등을 미루어 보아 [인]은 유고의 [인]을 말하는 것이고 건전한 철학이란 유학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그의 문화.교육사상은 유교철학을 바탕으로 한 이상국가 건설의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관점에서 보면 그가 그렇게 신랄하게 비판을 가한 주자학은 조선조시대의 그 배타적인 작풍이었지 결코 그 본질에 대한 비판이 아니었음을 할 수 있다. 白凡은 유학을 외래사상으로 본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라고 생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4. 白凡의 統一路線

1946년 3월 20일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게 되자 신탁통치를 반대해 오던 우익정당들의 입장이 미묘하게 되었다. 게다가 민주의원은 의장인 이승만의 사임 표명으로 사실상의 활동이 부진상태에 빠졌고, 또한 AP통신이 미군정의 미·소공동위원회가 진전되지 않을 때에는 남한만이라도 독립정부를 수립할 계획이 있다고 전하자 정국은 매우 긴장되었다. 이 보도에 접한 白凡은 즉각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한독당을 강화하기 위하여 4월 18일 국민당(안재홍), 신한민족당(권동진)을 비롯하여 급진자유당, 자유동지회 등을 합당하였다.

그런데 지방 순회 강연 중에 있던 이승만이 6원 3일 정읍(井邑)에서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이 필요하다는 의사를 비친 내용의 강연을 했다. 이승만이 4일은 전주, 5일은 이리에서 같은 내용의 강연을 계속해서 반복하자 민전, 한독당, 비상국민회의 사무국은 일제히 이 연설을 비난하고 반대하였다. 그 후 이승만은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서 1946년 12월부터 '47년 4월까지 국민외교를 전개한다는 명목으로 도미하여 한국의 정세를 국제여론화 시켰고, 이승만의 이 단정조선에 임정귀국 후의 후원과 지지를 위하여 조직되었던 한민당이 적극 호응하기 시작하여 임정계와 한민당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白凡은 정부수립에 대한 이승만과의 명백한 노선차이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근본의사의 차이"는 없고 "다소 방법이 다르다 해도 길은 같은 것"이라고 단결을 강조했다. 이러한 백범의 태도는 이승만으로 하여금 후퇴할 수 없을 정도로까지 단독정부수립 노선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다. 그러나 이승만과 金九, 이 두 지도자는 출생과 성장과 독립운동의 과정 및 방법에서 이미 화합하기 어려운 길을 걸어왔다. 독립운동이란 세계의 여론에 호소하고, 특히 미국의 동정을 얻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이승만과 단결된 민족의 자주적 역량을 바탕으로 하여 스스로 피를 흘리는 주체적 투쟁으로 쟁취하는 것이 독립운동이라고 생각한 白凡 사이에는 건국의 이념과 방략 사이에도 엄청난 괴리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이 미국의 한반도 정책을 자기의 견해와 일체화시키면서 단독정부수립을 주장하고 있을 때, 白凡은 UN위원단이 우리에 대한 "정당한 인식"을 갖도록 국민적 노력을 촉구하면서, 그것은 바로 "자주.독립의 통일정부"수립이라고 강조하였고, 소련의 방해로 UN위원단이 그 임무를 수행치 못함을 직무 때문이라고 꾸짖었다.

1947년을 맞은 白凡은 건국사업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이유를 "남만 믿고 희망만 하고 있는데 있다"고 반성하고 강력하게 건국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을 5월17일 군정청 한인기관을 남조선과도정권이라 개칭하고 6월27일 입법의원은 보통선거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단정수립 준비를 착착 진행시켜 가고 있었다. 白凡은 자신의 건국이념인 완전·자주·통일·독립국가 건설이라는 염원과는 달리 국내·외 정세는 점점 조국의 분열 쪽으로 기울어져갈 뿐만 아니라 자신이 유엔한위에 제출한 의견서에 대하여 혹심한 비난이 일어나자 그때까지 애써 단결을 강조하며 남을 비난하지 않던 태도에 변화가 나타났다. 백범은 자기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남북에서, 외력에 아부하는 자만은 혹왈 남정 북벌(南征北伐)하면서 ......중략...... 이로써 그들은 새 상전의 암지(闇志)를 부를 것이요, 옛 상전의 귀염을 다시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白凡의 이러한 반박은 소련을 등에 엎고 있던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은 물론 미국의 한반도 정책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여 단도 정부를 수립하고 그 다음 통일을 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승만 지지자들과 한민당 계통의 사람들)을 동시에 겨냥한 것이었다. 단독선거에 의한 단독정부의 수립이 통일 독립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것은 마치 죽을 줄을 모르고 "구갈(口渴)을 풀려고 독약을 마시는 것"에 비유한 백범의 민족노선을 "현실경영의 미숙성"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은 독립운동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주체성과 민족사상에 바탕을 둔 대단히 정확한 현실인식이었고, 이 현실인식 위에서 내려진 민족사의 앞날에 나타날 불행에 대한 예견은 그가 간지 안 365일 만에 현실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눈에 보이는 동족상잔이라는 민족의 불행을 막고, 진정한 민족독립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需要)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받칠" 결심이었고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데 협력하지 아니 하겠다"고 하여 '현실적인 길' 보다는 "바른 길'을 촉구했던 것이었다.

白凡은 1948년 1월 29일 한독당 위원장으로서 유엔한위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남한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첫째 유엔의 결의는 우리의 자주적 주권 행사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 둘째 필연적으로 남북분단의 우려가 있다. 셋째 유엔한위의 감시는 내정간섭이니 부당하다는 것이다. 단정수립에 반대하는 白凡의 대안은 첫째 미·소양군이 동시에 철수하고, 둘째 그 후 남북한 요인이 협의해야 하고, 셋째 이 남북협상 후에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것이었다. 이러던 차에 白凡은 3월 27일 김일성으로부터 4월 19일에 열리는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全朝鮮諸政黨社會團體連席會議)에 참석하여 달라는 서한을 받고 온갖 모략과 만류를 무릅쓰고 남북협상의 참가를 강행했다.  白凡의 남북협상 참가는 공산주의자들의 속성이나 전략전술을 몰라서거나 낙관적인 희망에서가 아니라 통일독립문제는 어디까지나 우리 민족의 문제이므로 죽으나 사나 비록 성사는 못할지라도 동포끼리 한번쯤 무릎을 맞대고 진지하게 논의해 모아야 한다는 자주정신의 논리적 귀결이었다.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 白凡의 민족노선은 단순히 국토의 분단을 박아보자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바로 그의 정치사상과 독립운동 성격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그에게 있어서 광복과 독립은 같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조국의 해방으로 그의 독립운동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완전·자주·독립국가의 건설을 위한 그의 독립운동을 그 성격상 반쪽 정부의 수립과는 원천적으로 타협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입장은 단적으로 '일시적 풍파'인 주의 주장이나 외세에 휩쓸리기보다는 '영원한 혈통의 바다'를 온전하게 지키려는 노력이었다고 평가되어져다 할 것이다.

조국의 통일을 위해 38선을 베고 죽을 각오로 임했던 白凡의 북행은 예상대로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40여 년의 세월이 지난 현재까지도 민족의 통일을 위한 가장 합리적이고 타당한 방법으로 시도되고 있는 것(남북회담)이 白凡이제시한 민족노선의 범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음을 생각해 보면, "눈을 밟는 거친 길이기는 하지만 오늘의 내 행적이 뒷사람의 길이 되리라"는 그의 예측력 앞에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5. 맺는 말

한일합방이란 한국과 일본이라는 서로 다른 두 개의 단위체가 자주적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일본이라는 단위체가 한국이라는 단위체를 속체(屬體)화 시켰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식민지가는 용어는 속체화된 한국의 상황을 나타내는 말이고, 한국인의 입장에서 이 용어는 한국인의 [자기상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독립운동이란 [자기상실]상태를 [자기회복], 즉 주체적인 단위체로 회복하기 위한 [자기수립]의 노력으로 [단위의식]의 발로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이러한 [단위의식]은 혈연적, 문화적, 역사적, 지리적 요소 등에 의하여 그 경계선이 규정된 집합체의 구성원 의식이며, 이러한 의식의 기반은 인종, 언어, 역사등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서 [민족의식]이라고 부를 수 있다. 독립운동을 이렇게 민족의식에서 나오는 상실된 자기를 회복하기 위한 제반운동들이라고 규정할 때, 방법론상으로 가장 타당한 것은 자주적 역량에 기초한 투쟁이고, 그것을 정당화시키는 근원적인 사상은 민족주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白凡의 독립운동성격은 누차 강조한 것처럼 자주적 역량으로 완전한 자기 회복 및 수립을 위한 투쟁이었다. 그러나 광복은 자주적인 자리회복이 아니라 단지 억압세력이 타의 힘에 의하여 물러간 상황이었다. 따라서 광복이라는 상황이 원초적 단위체가 완전한 자기회복을 한 상

Comments

동포 2004.11.01 06:39
좋은 글 감사....
초보안티 2004.11.01 02:38
감사합니다. 카피해서 하드에 저장합니다~ (__)
이번 10만원권 모델이 김구 선생님이라 하더군요..
개독들이 존경하는 백범 선생님을 개신교도라 하여 개독광고하는데 써 먹으면 화 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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