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성전시대 - 1

"기독교의 역사"에서 주로 다룰 주제는 기독교인들이 저질러온 죄악들,
예를들어 십자군, 마녀사냥, 이단사냥, 루터와 칼뱅의 망언 사례, 인디언과 인디오 학살 등을 역사적 자료를 통해 조명하고,
기독교가 로마에 의해 공인된 과정, 유대인들의 역사 등 다채로운 주제를 포함하게 될 것입니다.

제2성전시대 - 1

오디세이 0 3,422 2002.08.05 23:02
제2성전시대 - 1


2-1. 제2성전시대

북왕국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 앗수르의 공격으로 ,남왕국 유다는 주전 586년 바벨론의 침략으로 각각 망하면서 구약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설하고 이스라엘 국가가 존재하던 시기를 보통 제 1 성전 시대라 하고, 바벨론포로 이후에 다시 재건한 성전을 시작으로 하여 주후 70년 로마에 의해 성전이 파괴될 때까지를 제2 성전시대라 부른다. 제 2성전시대는 정치적 사건을 기준으로 페르시아 시대 (주전 516년 - 주전 332년), 헬라 시대 (주전 332년 - 주전 167년), 하스몬 왕조 시대 (주전 167년 - 주전 63년), 로마 시대 (주전 63년 - 주후 70년)로 구분할 수 있다.



<헬라 시대 >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은 세계사에 큰 분기점을 마련했다. 그리이스와 마케도니아를 통일한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 제국을 공격하고, 주전 332년에는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를 정복했다.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 이후 그의 제국은 마케도니아, 셀레우쿠스, 프톨레마이의 세 제국으로 분열되었다. 시리아를 중심으로 한 셀레우쿠스 왕조는 가장 큰 제국이며, 이집트를 중심으로 한 프톨레마이 왕조는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지중해 동부 연안을 다스리게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사업으로 그리이스 문화와 동방 문화가 융합된 헬레니즘 시대는 이제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할 것 없이 큰 세계의 한 구성원이 되는 세계주의가 강조되었다. 코이네 헬라어는 이 새로운 세계를 하나로 묶는 공통의 언어로 새로운 세계의 신분증이 되었고, 종교적으로는 혼합 주의의 결과로 제우스, 말둑, 바알은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하나의 신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것은 유대인 공동체에게는 하나의 도전이었다. 유대인에게는 헬라 세계의 일원이 될 것인지 유대인으로 남을 것인지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해야만 할 시기가 오고 있었다.
팔레스타인의 정복자인 셀레우쿠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3세(주전 223-187)는 유대인에게 그들의 종교적인 전통에 따라 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셀레우쿠스 제국 내의 경제적 위기는 모두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안티오쿠스 3세는 로마와의 전쟁에서 패하고(주전 190) 로마는 그에게 군대의 규모를 축소시키도록 하고 과중한 세금을 물렸다. 부친을 이은 안티오쿠스 4세는 왕조를 다시 일으킬 야망이 있었다. 그는 왕국의 남쪽 경계에 강조를 두고 이집트를 두 번이나 공격했으며 팔레스타인은 전쟁에 시달리게 되었다. 안티오쿠스 4세는 대제사장 오니아스3세를 해임하고 헬라 경향이 강한 그의 형제 야손을 대 제사장에 임명하고, 다시 대 제사장 가문 출신이 아닌 메넬라우스를 임명했다. 주전 168년 이집트를 공격한 안티오쿠스는 알렉산드리아를 거의 정복하려는 순간에 그의 세력이 확장되는 것을 견제하는 로마에 의해 할 수 없이 이집트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때에 팔레스타인에서는 안티오쿠스가 죽었다는 소문이 나돌고, 쫓겨났던 야손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면서 술렁이게 된다. 안티오쿠스가 이집트에서 돌아오자 예루살렘은 다시 그의 손에 넘어가고, 할례와 안식일 준수를 금지하는 등 반 종교적인 정책을 실시한다. 이러한 종교적인 박해는 곧 반란을 불러 일으켰다.



<마카비 반란 >

주전 167년 안티오쿠스는 안식일 준수와 할례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이교 제사를 수행하라는 왕의 명령을 받은 시리아 군이 모디인에 도착하고, 한 유대인이 희생 제사를 드리려 하였다. 그때에 분을 참지 못한 여호야립 가문 출신의 제사장 마타디아스는 그를 살해하고 산지로 피하자 이에 동조하는 많은 하시딤들이 그를 따랐다(마카비 1서 2:15-30). 이들의 저항 운동은 마타디아스의 세 아들, 마카비라고 불리는 유다와 요나단 그리고 시몬에 의해 계속 수행되었다. 하스몬 가문으로 불리는 이들이 이제 약 130년간 유대를 다스리게 될 것이었다. 드디어 주전 164년 유다 마카비는 이교도에 의해 더럽혀졌던 예루살렘의 성전을 되찾고 성전은 정화되었다. 이후로 성전 정화를 기념하는 하누카(수전절, 요 10:22)라는 절기를 지키게 되었다. 셀레우쿠스 제국과 유대 반란군간의 전투는 계속되었다. 대 제사장이었던 메넬라우스는 셀레우쿠스에 의해 숙청되고 알키무스가 임명된다. 알키무스도 죽자(주전 169년) 몇 년 간 대 제사장직은 공석으로 남겨졌다. 마타디아스의 아들인 요나단은 셀레우쿠스 제국 내의 내분을 기회로 초막절에 대 제사장직을 맡는다(주전 152년). 이제 대 제사장직은 사독의 후손이 아닌 반란을 승리로 이끈 공로로 평범한 제사장 가문이 차지하기 되었다. 그는 전투에서 계속적인 승리를 거두어 사마리아, 에그론, 욥바를 그의 수중에 넣고 팔레스타인의 남쪽 해안에 위치한 헬라 도시까지 통치 지역을 확대해 나갔다. 요나단의 대 제사장직의 수행으로 그의 집안은 자연스럽게 최고의 통치 가문으로서의 위치를 굳히기 시작했다. 요나단이 시리아 군의 음모로 살해되고 그의 형제 시몬이 뒤를 이었다. 그는 데메트리오 2세와 동맹을 맺고 그 동안 내던 세금을 면제 받게 된다. 로마와 스파르타와도 동맹 관계를 새롭게 했다. 그는 통치 중에 유대인의 법적인 권리를 회복하는데 주력하였다. 주전 140년 모든 백성은 예루살렘에 모여 시몬을 '진정한 예언자가 나타날 때까지 영구적인 지도자(Nasi), 대 제사장'으로 삼을 것을 선포하였다(마카비 1서 14:42).




<하스몬 왕조 >

주전 586년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 처음으로 다시 독립 국가가 형성되었다. '하스몬'이라는 말은 반란의 선봉이었던 마타디아스의 선조 아사모나이오스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대사 12.265). 셀레우쿠스 제국은 데메드리오 계열과 안티오쿠스 계열간의 오랜 내분으로 힘이 분산되어, 유대는 셀레우쿠스의 세력에서 벗어났다. 하스몬 왕조는 본격적으로 주변 민족을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시키고 독립 국가의 번영을 누렸다.

민족의 지도자, 대 제사장으로 추대된 시몬의 뒤를 이은 요한 힐카누스는 그리심산의 사마리아 신전을 파괴하고 이두매를 정복하여 이들을 개종시켰다. 힐카누스는 대 제사장이면서 스스로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대부분의 헬라 도시는 하스몬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고 영토는 몇 배로 확대되었다. 아리스토불루스를 이은 알렉산더 야나이는 남아 있던 해안 도시를 정복한다. 그의 시대에 하스몬 왕조는 최고의 절정에 도달했다. 야나이는 바리새파를 미워하여 무려 8백 명의 바리새인을 십자가형에 처했다. 야나이는 죽을 무렵 바리새파의 영향력을 인정하고 그의 부인 알렉산드라(샬롬 찌온으로 부르기도 함)에게 바리새파와 화해할 것을 당부한다. 여왕이 된 알렉산드라는 바리새파를 옹호하여 평화로운 시대를 누렸다. 그녀의 죽음 이후(주전 67) 나라는 두 아들의 왕위 다툼에 휩싸이게 된다.

동생 아리스토불루스는 형 힐카누스를 몰아내고 자신이 왕위를 차지한다. 아리스토불루스를 탐탁하지 않게 여겨 왔던 이두매 출신의 안티파테르는 나바티안 원조를 받아 다시 왕이 되도록 도와주겠다고 힐카누스를 부추긴다. 외부 세력을 끌어들여 왕권을 차지하려는 형제간의 전쟁은 로마의 폼페이 장군이 예루살렘에 진격하여 힐카누스의 편을 들어줌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그와 함께 유대인의 독립 국가는 끝이 나고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주전 6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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