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의 네얼굴 (1)

"기독교의 역사"에서 주로 다룰 주제는 기독교인들이 저질러온 죄악들,
예를들어 십자군, 마녀사냥, 이단사냥, 루터와 칼뱅의 망언 사례, 인디언과 인디오 학살 등을 역사적 자료를 통해 조명하고,
기독교가 로마에 의해 공인된 과정, 유대인들의 역사 등 다채로운 주제를 포함하게 될 것입니다.

이단의 네얼굴 (1)

오디세이 0 3,291 2002.08.06 12:41
< 호메로스에서 돈키호테까지 > 중에서


<이단의 네 얼굴>
- H.R.트래보 로퍼


1. 이단이란 무엇인가?


한 편의 글로 종교적 이단에 관한 설명을 다루다니, 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 내가 알기로는 역사상 단 한 번 그러한 방대한 작업이 하나의 저작을 통해 다루어진 적이 있다. 그 책은 1699년 루터파 경건주의자인 고트프리트 아르놀트가 출간한 <교회와 이단에 관한 공정한 역사>였다. 그 책에 대한 반응은 그리 호의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2단 2절판으로 분량이 2,300쪽에 달하는 아르놀트의 두 권짜리 저서는 향후 한 세대 동안이나 지속될 폭풍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동시대인들로부터 파렴치한 역사의 왜곡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루터파 역사학자들 가운데 가장 분별 있는 인물마저 그를 일컬어, 교회의 평화를 깨트리는 무지하고 주제넘은 교란자라고 묘사했다. 한 비평가는 그가 “그리스도 탄생 이후 가장 사악한 책”을 썼다고 선언했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 아르놀트가 대체로 이단자들의 편을 들었으리라는 점은 쉽사리 추론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괴테(그 누가 괴테와 같은 편이 되기를 원치 않겠는가?)의 생각은 달랐다. 아르놀트의 책이 수중에 들어오자 그는 그 책에 매료되었다. 그는 그 책이 자신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썼다. 이제 그는 역사상의 이단자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모든 사람이 종국에는 자신의 종교를 갖게 된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나의 종교를 고안해내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라 생각한다. 나는 그 일을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했다.”

자신의 종교를 고안해 내는 것, 사실 이것이야말로 이단이다. 이것이 이단이란 말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이다. 이단은 개인적 선택이며, 정통 (그것은 선택된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부여되고 받아들여진 것이다)의 반대이다. 이런 이유로 이단과 분파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분파란 반드시 선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설령 선택이라 하더라도 개인적 선택은 아니기 때문이다. 분파 교회는 통째로 떨어져 나간 교회를 말한다. 동방 교회가 중세 서유럽 교회로부터 분리되고,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종교개혁 시대에 카톨릭 교회로부터 분리된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는 유대교 이단에서 출발했다) 분파 역시 이단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분파가 반드시 이단으로부터 시작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영국 국교회를 분파로 간주하지, 이단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그리고 분파 교회는 즉각 자신의 정통을 수립하며, 그 자체의 이단을 박해하기 시작한다. 순수한 이단이란 국가 교회 또는 정통 교리를 만들지 않으며, 그 구성원은 개인적 선택에 의해 자신의 종교를 갖는다.



2. 정통과 이단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백 가지의 이단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2,000년 역사를 거치면서 그리스도 교회는 매 세대마다 이단들을 산출했으며, 그들의 난해한 교리는 끊임없이 정통의 범위를 확대함으로써 이교도들의 대두를 유발했다. 어떤 세기든지 임의로 정해놓고 조사를 해보라.

마치 잘 가꿔진 정원 한복판에 서 있는 바위 하나를 들어내는 것 같다. 위에서 보면 정원의 모든 것이 평탄하고 조용하기만 하다. 그러나 파헤쳐진 바위 밑으로는 쥐며느리나 지네 같은 벌레들이 마구 땅을 헤집으며 분주히 달려가고 있다. 정통파는 불쾌한 나머지 코를 찡그리지만, 대자연의 풍요로운 다양성을 즐기는 사람들은 누구나 기뻐한다.

3세기에는 에비온파, 마실레이데스파, 발렌티누스파, 마르키온파 등의 이단이 등장했다. 4세기에는 도나투스파 (그들 가운데 가장 극단적인 집단은 할례파였다)가 나타나 아프리카와 유럽을 분리시켰다. 한편 아리우스파는 동유럽과 서유럽을 분리시켰다. 5세기에는 네스토리우스파, 유티케스파, 아폴리나리우스파, 단성론자들이 형이상학적 사변을 무기로 비잔티움 제국을 뒤흔들었다. 이단 목록을 작성하자면 끝이 없다. 목록을 완성시키려면, 우리는 연속성 있는 일정한 원칙을 선택하거나 찾아내어 무수히 많은 종류의 이단들을 몇 개의 이해 가능한 군집으로 축소시켜야만 한다.

이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이단의 역사는 전반적으로 파악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 대부분은 격분한 정통 옹호자들에 의해 쓰여졌다. 그들은 그것들을 이해하기보다는 비난하는 데 더 열심이었다. 이단자들이 쓴 저작들은 파괴되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착하게 자료를 검토한다면, 정통파의 분노로 말미암아 불분명해진 그 특징들을 복원해낼 수 있을 것이며, 수많은 다양한 이름들 아래 잠복해 있는 이단들의 연속성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실제로 치밀하게 고찰해보면, 우리는 모든 이단들을 그 관점에 따라 몇 개의 군집으로 분류할 수 있음을 곧 알게 된다. 위대한 이단 사상들은 할 일 없는 수도사들이 지어낸 기발한 관념이 아니다. 다른 이단보다 더 독창적이거나 부조리한 것으로 보이도록 안달하는, 그러한 관념이 아니다. 그것들은 지속적으로 정통이라는 단단한 각질을 뚫고 나오는 일련의 반복적 사상들이다. 이단 사상들은 한가지 중대한 진실 또는 억누를 수 없는 인간적 열망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들은 어느 한 종교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 출현 이전에 나왔던 사상들이 그리스도교 이단이 모습으로 갑자기 등장하기도 하고, 이슬람교 출현 이전에 나왔던 사상들이 이슬람교 이단의 모습으로 갑자기 등장하기도 했으며, 몇몇 그리스도교 이단 및 이슬람 이단은 사상적으로 상호 교환되기도 했다. 일부 이단들은 적어도 일정 기간 동안은 정통으로 흡수되었다. 정통으로부터 영구히 배제된 이단은 거의 없었다.


3. 아리우스주의

그러한 과정에 대해 몇몇 예를 들어보기로 하겠다. 먼저 아리우스 주의를 보기로 하자. 성부가 성자 및 성령보다 휠씬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 이 교리는 서기 325년에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선포되었다. 그리고 반세기에 걸친 격렬한 투쟁 끝에 (일부 황제들이 아리우스파였기 때문), 최초의 에스파냐 종교재판관이라 할 황제 테오도시우스 대제에 의해 로마 제국 중심 지역에서 박멸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리우스주의는 한동안 로마 변경 지역에서 살아남아 고트족과 반달족에게 수용되었고, 그들은 그것을 에스파냐와 아프리카에 전해주었다. 그리고 비록 손상을 입기는 했지만 아리우스주의는 동로마에서 서기 5세기에 네스토리우스주의라고 하는 새로운 모습을 취한다. 그것은 비잔티움 황제들의 박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다. 이슬람의 정복 활동과 더불어 새롭게 이슬람교의 색채를 띠게 되었을 뿐이다.

식자들이야 뭐라고 말하건 건에, 신이 셋이 아니고 하나라는 교리는 단순 소박한 야만족에게는 더욱 그럴듯하게 여겨졌다. 그리고 만일 그 교리를 여호와를 믿는 신앙 안에서 신봉할 수 없다면, 그들은 신의 이름을 바꿔 알라에 대한 신앙 안에서 그 교리를 신봉했다. 그 후 그 사상은 그리스도 교회에 다시 스며들어, 변경 지역에 있는 얼마간 세련된 야만족들에 의해 한층 극단적인 형태로 천명되었다. 세르베르투스(1511 – 1553)는 그 중 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심장의 작동 원리를 발견한 인물로서, 모든 사람이 환호를 보내는 가운데 칼뱅에 의해 산 채로 화형을 당했다. 조셉 프리스틀리(1733 – 1804)도 그 원리를 천명한 인물이었다. 그는 산소의 존재를 밝혀낸 물리학자였는데, 그의 집은 정통 교리를 믿는 버밍엄 시민들에 의해 불태워졌다. 써 아이작 뉴턴도 그 중 한 사람으로서 우주의 운행 원리를 발견한 저명한 과학자였으나 다행히 그는 비극적 최후를 맞지 않아도 되었다. 그는 침상에서 85세의 나이로 편안히 죽음을 맞이했다. 그런 후, 잉글랜드의 귀족들과 대법관 사이의 논쟁을 거쳐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안장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변화는 우리가 차후 주목하게 될 중요한 사실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4. 마니교

청년 시절의 아우수스티누스(354 – 430)를 사로 잡았던 두 가지 교리, 즉 마니교와 신플라톤주읭를 살펴보기로 하자. 마니교는 페르시아 이단으로, 세계가 선과 악이라는 두 개의 독자적인 힘의 상호 작용에 이해 지배된다고 주장했다. 신플라톤주의는 고대 그리스 말기의 신비주의와 수학이 혼합된 사상이었다. 이 사상에서는 플라톤의 신 관념 (우주와 인간 영혼에 충만해 있는 신)이 우화적 해석을 거쳐 고스란히 유지되고 있었다. 헤게모니 싸움에서 그리스도교가 승리했을 때에도, 이들 마니교와 신플라톤주의는 비록 패배하기는 했지만 결코 소멸되지는 않았다. 그리스도교 내부에서 여러 형태로 변형되어 잔존했고, 그리스도교의 기나긴 역사와 더불어 살아남았다.

마니교는 서기 6세기에 비잔티움 제국의 루이14세라고 할 수 있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위대한 입법자이며 제국의 건설자이자 이단 박해자) 에 의해 무자비하게 탄압받았다. 마니교는 그 후 아르메니아에서 바울파로 다시 등장했으며, 그곳에서 궤멸된 후 발칸 반도지역, 특히 불가리아에서 보고밀파란 이름으로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융성했다. 11세기에 다시 한번 근절된 다음, 그것은 멀리 서쪽으로 전파되어, 남프랑스에서 카타르파의 일파인 알비주아파의 모습으로 갑자기 나타났다. 알비주아파는 종교개혁 이전에 등장했던 이단 종파들 가운데 가장 심한 증오의 대상이었다. 중세 최초로 그 신봉자들이 법률에 따라 사형을 당한 이단파이기도 하다. 십자군과 종교재판소에 의해 박멸당한 이 종파는 현대 언어에 약간의 흔적을 남겼다. ‘카타르’란 말은 독일어에서 이단을 의미하는 말로 변형되었고, 불가리아인이란 말은 유럽 여러 나라 언어에서 ‘이론이 결여된 형태이 비 국교도’를 일컫는 말로 변용되었다.



5. 신플라톤주의

신플라톤주의의 역사는 훨씬 온건했다. 신플라톤주의의 사상이 훨씬 추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신플라톤주의는 급진적 예언자들보다는 보수적인 철학자들이 받아들였다. 그 결과 그것은 일단 그리스도교화 하기만 하면 공식적으로 이단이라고 선포되는 경우는 없었다. 그러나 일부 부주의한 신플라톤주의자들 (특히 종교개혁 이후)은 스스로 이단임을 드러냈고, 이로 인해 브루노(1548 – 1600) 와 바니니(1584 – 1619) 같은 철학자들은 이단으로 몰려 화형을 당하기도 했다.

그리스도교 운동으로서의 신플라톤주의는 14세기에는 독일에서, 15세기에는 피렌체에서, 17세기에는 독일과 잉글랜드에서 나타났다. 고대 말기부터 18세기에 이르기까지 과학 발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또한 문학에서의 로만주의 사조에도 영향을 미쳤다. 괴테는 자신의 종교의 근저에 신플라톤주의가 자리잡고 있다고 언급했다. 신플라톤주의는 또한 시인 블레이크(1757 – 1827)의 종교이기도 했다.

2,000년 동안에 걸쳐 등장한 이단은 그 다양한 개인적 선택 가능성만큼이나 헤아릴 수 없이 많았지만, 마구잡이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 확연히 정형화된 계통을 밟아왔다. 이런 점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긴 이름을 가진 수많은 이단파들을 몇 개의 일정한 유형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이 수 많은 개인주의자들이, 정통 교회 측에서 항상 주장하는 바와 같이, 교회의 장엄한 몸체로부터 수시로 분리, 제거되어야 마땅한 잡다한 구더기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아르놀트가 생각했듯이, 그들 이단들은 나름의 전통을 갖고 있으며, 우리 자신이 그 전통에 큰 은혜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6. 이단의 네 가지 형태

그리스도 교회에 반복해서 등장한 대부분의 이단들은 기본적으로 네 가지 범주, 즉 청교도(복음주의자), 천년왕국주의자(메시아주의자), 신비주의자(정적주의자), 또는 이성주의자(비판주의자)에 속해 있었다. 이 네 범주가 상호대립적인 것은 아니다. 종교적 격동의 시기에는 언제나 두 가지 이상의 범주가 융합되었고, 그 결과 절충적인 성격을 갖는 이단이 급증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네 개의 주요 원천에 기반을 두고 있었으며, 모든 개별적인 이단들은 그 원천으로부터 또는 그 혼합형태로부터 파생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 모두에게 공통되는 사항을 언급하고자 한다.

그들은 모두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예수의 가르침과 초대 교회의 순수성에 의거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에서 승리를 거두고 하나의 거대한 국가 기구가 됨으로써 확립된 정교한 교회 구조들을 반대하거나 무시했다. 그들이 모두 ‘이단’으로 간주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그들은 자기 시대의 현실적이고 견고하고 관료제적이고 정치적인 교회와, ‘사도 시대’의 소박하고 상상적인 교회, 이 두 교회 가운데 하나를 ‘선택’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종국에 가서는 결국 현실 교회가 화형대의 불과 장작더미로써 그 실재를 과시한 반면, 상상의 교회는 그야말로 상상에 지나지 않는 신기루일 뿐 아무런 현실적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7. 청교주의

먼저 청교도들을 보도록 하자. 의심할 나위 없이 초대 교회는 청교도적이었다. 구약성서 시대에도 이 점은 마찬가지였다. 엘리야에서 세례 요한에 이르기까지 모든 예언자들은 청교도였다. 그들은 신의 근엄한 백성들 주변을 에워싸며 유혹의 눈길을 던졌던, 시리아 부족들의 음란한 다신교, 지방에서의 이교 제식들, 그리고 흥청거리는 주연 등을 질타했다. 그리스도 이후 300년 동안 교회는 그와 유사한 오물로부터 스스로를 깨끗하게 지켜냈다. 초대 그리스도교도 저술가들은, 탐탁지 않은 이교적 습속들 (향불사르기, 성수를 뿌리는 불경하고 가증스런 관행, 촛불켜기나 그림 봉헌 같은 어리석은 짓, 성상을 향한 이교적이고 가증스럽고 사악한 의식 등) 을 규탄했다. 초대 그리스도교들이 생각하기에, 그와 같은 습속들은 예언자들이 질타했던 거소가 같은 종류의 것들이었다. 그리스도는 일찍이 자비가 희생보다 낫고, 복음적인 청빈과 이웃 사랑이 세련된 사치나 바리새주의적인 의식보다 낫다고 가르친 바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그러한 습속들은 단호히 금지되어야 할 일이었다. 그러므로 초대 그리스도교도들은 스스로를 사회로부터 격리시켜, 세속적이고 이교적인 세계의 한복판에서 사도적인 청빈과 원시 공산주의, 그리고 자족적인 청교도적 외(外) 집단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비타협적인 태도를 견지하면서 초대 교회의 사도들처럼 살려고 했다.

불행한 일이지만 이러한 분파적 미덕은 기성 교회에서는 유지될 수 없었고,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를 공인하자 주교들은 곧 권력의 유혹 또는 필요성에 끌려 들어가고 말았다. 그리스도교 사제들은 그들이 배척했던 이교 사제들의 방식들을 조금씩 받아들였다. 이교 사원을 접수하면서 그들은 이교적 희생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교의 신들은 그리스도교의 성인들이 되었다. ‘사도적 청빈’은 까맣게 잊혀졌다. 그리고 청교도적 미덕은 마치 고치 속에 머물던 나비의 유충 단계처럼 무가치한 유물로 간주되어, 시간의 흐름에 따르기를 거부한 이단파들에게로 넘어갔다.

최초의 ‘청교도적’ 이단은 서기 4세기의 도나투스파였다. 그들은 북아프리카에서 강력한 세력을 이루었는데, 북아프리카는 언제나 (심지어 이 지역의 종교가 이슬람교로 바뀐 후에도) 청교도적이었다. 그들은, 부패하거나 기회주의적인 사제들 (그 사제들은 실제로 디어클레티아누스의 박해 칙령에 복종했다)이 집전하는 성사는 효력이 없다고 믿었는데, 그러한 도덕적 관점은 기성 교회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8세기의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또 다른 청교도적 반란이 있었다. 청교도적인 황제들이 주도한 이 반란은 교회를 이교적으로 장엄하게 장식한 호화스런 ‘성상’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성상 파괴 운동은 그후로도 종종 재발되었다. 우리는 이와 관련해 특히 종교개혁시대의 유럽과 크롬웰 시대의 잉글랜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대의 설교자들은 인류를 위해 사망하신 그리스도라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형상’과 인류를 희생시킨 교회의 ‘죽은 형상’의 차이점을 강조했고, 이에 고무된 반항적인 군중은 조각상들을 쓰러뜨리고, 그림을 찢는가 하면, 오르간을 도끼로 부수기도 하고, 고딕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파괴하기도 했다.

계급화된 성직제와 부를 증오한 청교주의와 더불어, 복음적인 청빈과 원시적 공산사회가 등장했다. 때로는 군 복무 거부 및 유아 세례 거부도 일어났다. 기성 교회는 항상 이와 같은 파괴적 사상들을 불신했지만, 모든 시대마다 그러한 사상에 집착하는 소규모 이단 공동체들이 출현했다. 수도원들은 교회 내의 공산주의적 기구였고, 탁발 수도사들은 사도적 청빈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수도원과 탁발 수도사들은 곧 부자가 되고 타락했다. 그들이 초기에 천명했던 교리는 배척되었고, 그 교리에 집착한 공동체들은 이단으로 질타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공동체들은, 12세기의 왈도파에서 19세기 미국의 셰이커교를 비롯한 유토피아적인 공산주의적 분파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나타났다. 초대 기독교도들이 이교적 로마 제국 치하에서 그랬던 것처럼, 15세기의 보헤미아 형제단, 17세기의 퀘이커파 등의 분파들은 군복무를 거부했다. 일찍이 많은 분파들이 유아 세례를 거부한 바 있었으므로, 16세기의 재세례파가 유아 세례를 거부한 첫 번째 사례는 아니었다. 그러한 거부 행위는, 교회에 소속된다는 것이 세습되거나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선택 ( 그것은 이단이었다. ) 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8. 메시아주의

방금 살펴본 청교주의, 복음적 공산주의는 직접적으로 성경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두 번째 이단적 경향인 메시아주의도 마찬가지 였다. 그리스도의 최초의 제자들은 수많은 미신적 개념들을 갖고 있었는데, 이는 그 당시 박해받고 있던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유포되어 있었다. 특히 그들은 물리적 세계의 종말이 자기 시대에 올 것이라고 믿었다. (실제로 그리스도가 그렇게 말한 바 있다.) 또 그들은 최후의 심판, 성자들이 지배하는 천년왕국, 그리고 죄악에 물든 세계의 폭력적인 파멸 등을 기다렸다. 구약성서와 그리스도교적 예언의 혼합물이라 할 만한 이러한 교리들은 그리스도가 사망한 후 일어난, 유대인의 대규모 반란 및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 의한 예루살렘 성정 파괴로 인해 더욱 큰 주목을 받았다. 이러한 교리가 가장 잘 표명된 것은 계시록이었는데, 여기에는 이교적인 로마 제국이야말로 멸망이 임박한 지상의 바빌론이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서기 4세기에 또 한 차례 변화가 밀려왔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로 받아들여지고 그리스도 교회가 세속 권력을 누리기 시작하자, 정통파는 점차 혁명적 성향을 상실해갔다. 만일 세속 국가가 망한다면 기성 교회 역시 멸망할 것이므로, 계시록에 근거한 교리는 이제 더 이상 바람직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과거의 텍스트가 새롭게 해석되었다. 라오디케아 공의회는 계시록을 성경의 정전에서 빼버렸다. 그후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계시록을 경건한 비유로 설명하면서 슬그머니 비켜갔다. 431년이 에페소스 공의회는 천년왕국 사상을 미신적 일탈이라 하여 정죄했다. 국교가 되기 이전의 그리스도교 사상에 집착하려는 사람들은 이단이 되고 말았고, 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교도들이라고 확신했다. 그들은 이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로마야말로 바빌론이라고 생각했고, 그 지배자를 그리스도를 배반한 사이비 그리스도로 간주했다.

성경 해석에 이렇듯 실질적인 어려움이 닥치자, 성경에 관한 모종의 조치가 취해져야만 했다.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한 가지 유용한 해결책은 탐탁지 않거나 바람직하지 않은 텍스트를 비유적인 것이라고 피해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항하게도 비유는 양측에서 제각기 해석할 수 있는 상대적인 게임이었고, 오래진 않아 국교회 측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즉 교회에 속한 신학자들은 비유를 파괴적인 텍스트를 피해 가기 위해 사용하지만, 이단자들은 비유를 정통적인 텍스트를 피해 가는 데 사용한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마침내 교회는 억압 정책이야말로 성경을 다루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입장에 도달했다. 즉 성경을 죽은 언어 속에 집어 넣어 자물쇠를 굳게 잠가 놓고, 국가 교회의 신성한 토대를 의심하게 할 가능성이 없는 텍스트와 해석만을 사람들에게 찔끔찔끔 보여주기로 한 것이다.


9. 신비주의

성경의 탐탁지 않은 텍스트를 비유나 상징을 통해 다룸으로써 국교회 측의 박해를 피해 간 이단 분파들은 궁극적으로 신비주의에 의지했다. 물론 모든 신비주의가 이단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피해 가는 텍스트가 무언인지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신비주의의 기본 이론은 항상 이단적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개인의 직접적인 영감이 성경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손상시킬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비주의는 그 남용이 우려될 정도로 성경 해석의 여지를 넓혔을 뿐만 아니라, 교회 조직을 거치지 않고 개개인이 하나님에게 직접 나아갈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교회가 그러한 사상을 의심스런 눈으로 바라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성경 해석을 통제하기 위해 교회는 전승 ( 즉 서로 일관되는 교회의 성경 해석들을 모아놓은 집합체 ) 이라는 개념을 구축했다. 궁극적으로는 교회는 성경에 필적하는 권위를 전승에 부여했고, 다소 주저하면서, 온건한 신비주의 사상을 이 전승에 수렴시켰다. 과격한 신비주의에 대해서는 결코 그 참여를 용납하지 않았다. 알룸부라도파는 카톨릭 에스파냐에서 화형에 처해졌고, 경건파는 루터교 독일에서 박해를 받았다. 핍박으로 인해 이들 분파는 더욱 과겨해졌다. 이들 분파들 가운데에서 때로 극단주의자들이 등장하여, 자신들은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모든 일상의 신앙생활에서 면제되며, 아무리 악한 일을 저질러도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중세 및 16,7세기의 급진적 종교 운동을 주도한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자기 도취적인 메시아들이었다.

“깨끗한 자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다” 고 믿고 또 그렇게 행동함으로써 정통 교회측의 분노를 산 ‘자유영혼파’가 그러한 부류에 속했다. 보헤미아의 아담파, 프랑스의 자유파, 독일 재세례파, 잉글랜드의 랜터파도 여기에 속했다.


10. 이성주의

위험스럽기는 해도 신비주의는 교회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신비주의는 주기적으로 교회의 느슨해진 조직을 팽팽하게 긴장시켰다. 그것은 또한 교회에 손상을 줄 수도 있는, 성경 가운데 문제의 소지가 있는 일부 구절들을 피해 갈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현실적인 난관을 가볍게 건너뛸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심지어 교회 내부에서도 그 문제들에 정면으로 부딪히려 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있었다. 설령 그것이 혼란을 초래한다 해도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처음에는 그러한 사람들이 드물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사회의 지적 수준이 높아지면서, 자신들의 이성적 탐색이 설령 이단적인 것으로 귀결된다 할지라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성경비판자들이 등장했다. 수적으로는 많지 않았지만, 그 영향은 매우 컸다. 예를 들자면, 16세기에 접어들어, 난파된 지 이미 오래된 아리우스주의의 폐선을 다시 바다에 띄워, 세르베투스와 프리스틀리의 이성적 신앙을 출현하도록 만든 것은 바로 그들의 영향력이었다. 그들은 서서히 그리고 힘겨운 과정을 거쳐, 성경 비판 방법론을 수립함으로써 정통과 이단을 모두 다 평가절하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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