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용] 민중신학에 대한 글... (by 냐하하)

"기독교의 역사"에서 주로 다룰 주제는 기독교인들이 저질러온 죄악들,
예를들어 십자군, 마녀사냥, 이단사냥, 루터와 칼뱅의 망언 사례, 인디언과 인디오 학살 등을 역사적 자료를 통해 조명하고,
기독교가 로마에 의해 공인된 과정, 유대인들의 역사 등 다채로운 주제를 포함하게 될 것입니다.

[인용] 민중신학에 대한 글... (by 냐하하)

오디세이 0 2,806 2002.08.07 20:29
[인용] 민중신학에 대한 글...    
  
 
나시민님이 개설한 카페에서 "나햐햐"라는 아이디를 쓰시는 한신대 재학중인 신학생의 글입니다. "노스페라투"님 때문에 한신대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는데...이분도 비슷한 분이신듯....

기독교비평에 링크가 되어 있길래, 찾아갔다가...민중신학 관련 글이 있길래 가입을 해 보았습니다. 활동은 별로 안할 생각이지만...여기저기 나대는 것도 이젠 힘에 부쳐서...(-.-)

소개되는 글은 민중신학과 관련된 글입니다.
물론 상당히 이상적인 면이 강하지만, 복음주의, 근본주의를 외치면서...신의 이름을 빌어 자신들의 삐뚤어진 신념을 강요하고, 세력을 넓히려는 기존의 기독교세력에 대해 안티적 성향이 매우 강하다고 생각됩니다.

현존하는 보수적이며, 권력지향적인 기독교라는 거대집단에 대해 대안이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문득 드는데...글쎄요...저로서는 조금 회의적이군요....기독교라는 전체 시스템의 한 일각을 이룰수는 있지만, 주류로 떠오르기에는 힘들 것이라는 느낌이군요...사상적인 면은 차치하고서라도 세력면에서 지금의 기독교가 이루어놓은 경지(??) 를 대체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일단 드는군요…

제 생각엔 이런 기독교의 민중신학 그 자체가 주류가 된다기 보다는, 이러한 경향성이 조금씩이라도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주류 세력이 변형되는 것이 기독교라는 종교가 사회 속에서 제대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한가지 방안이 아닐까 싶습니다만….그다지 긍정적으로 보고 있지는 않습니다.

아, 전 물론 기독교 사상 그 자체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
인격화된 유일신 사상은 딱 질색이라...

좀 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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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번주 월요일이 김재준목사 탄생 100주년 기념일이었습니다. 이미 고인이 되신 김목사님에게 깊은 존경과 그 분의 뒤를 잊는 제자로서 감사를 표합니다. 그리고 김재준목사에게 깊은 관심을 표해주신 나시민님에게 또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김재준과 함석헌, 서남동에서 문익환으로 이어지는 민중신학과 씨알사상의 계보는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어쩌면 회복될 가능성을 상실한 한국 기독교에 제3세계신학인 해방신학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이땅에서 기독교가 원래 가지고 있던(지금은 없는) 희망과 꿈의 가능성을 타진하고자 김재준은 민중신학이라는 한국 토속신학의 기틀을 마련했다.

민중신학의 기본취지는 해방신학의 취지와는 다른 점이 많이 보인다. 민중신학은 한국이라는 지역적 특성을 최대한 배려하고자 하는 동시에 정치적, 사회적으로 무관심했던 기존 기독교의 신정분리 자세를 배제한다. 또한 천만 노동자와 비기독교인들에게도 지대한 관심을 가진다. 왜냐하면 기독교라는 종교이든 하나님이든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중요성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 인간다울 때, 그 다음이 종교로서 기독교이고 신으로 하나님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은 민중신학이 기존의 근본주의 기독교인들과 충돌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예를 들어 근기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했던 전태일을 가리켜 이 땅의 예수라 칭했던 서남동은 이단으로 정죄될뻔했던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었고, 동학의 전봉준을 또 다른 예수라 평했던 김재준 역시 목사라는 위치를 위협받기도 했다.

현재 민중신학의 위치는 그리 중대시되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민중신학은 사실 기독교적 도그마를 위협하는 요소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중신학적 기틀을 유지하고자 하는 많은 신학자들과 목사들은 이에 대해 고개를 가로 젓는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도그마도 결국 인간이 만든 것인데 어찌 인간을 살리고자 하는 도그마를 거부하는가?"

많은 신학생들과 신학자들은 민중신학이 시대정신을 담고 있는 상황신학이라 칭한다. 그리고 한 때의 유행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신학과 도그마 역시 시대정신에 영향을 받은 상황신학임을 상기할 때 민중신학 역시 세계신학의 새로운 방향이자 패러다임으로 등장할 수 있는 위치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특히, 한국 기독교는 세계에서 유래없이 근본주의에 치우친 기형적 형태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인간이라는 존재에 눈을 돌린 교회와 교인들의 시선을 외면하는 제도 교회의 따가운 눈초리는 인간을 죽이고자 하는 살인자들과 다를 바 없다.

이제껏 민중신학은 한국 신학계에서 변방에 자리한 비주류신학으로 별로 중대한 위치를 가지지 못했으며, 미래에도 계속해서 천대받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한국 토속 신학으로서 새로운 눈으로 존재를 바라보는, 그리고 인간을 인간되게 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시도가 있었음을 역사는 분명하게 기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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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이미 언급했지만 민중신학이나 해방신학 그리고 최근에 급부상하고 있는 생태신학, 여성신학 등은 모두 상황신학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상황신학이란 무엇인가!

상황신학이라는 것은 신학의 종류나 카테고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의 성격을 구분짓기 위해 쓰이는 용어로서 시대와 문화 속에서 필요에 의해 발생되는 신학을 지칭하는 말이다. 예를 자유주의신학은 계몽주의와 도구적 이성이 등장한 근대 상황신학이고, 자유주의에 대한 반발로서 극보수 우익적 성향을 띄었던 근본주의신학 역시 19세기말의 상황신학인 것이다.

해방신학과 민중신학 역시 상황신학이다. 시대에 따라 같은 말은 서로 다르게 접근되고, 재해석되는데 민중신학 역시 60년대와 현재가 매우 다른 모습과 성향을 띄고 있다.

그 유명한 로메오 주교의 죽음을 다루었던 영화 '로메오'는 사실 해방신학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여실히 보여주었던 좋은 예다. 神과 교회가 우선이 아니라 인간을 그 중심에 위치시킴으로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데 역점을 두었던 해방신학의 등장은 이전까지 통속적인 흐름에 치우쳤던 많은 부류의 신학의 조류에 중대한 거스름이 아닐 수 없었다.

저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 즉 절대타자를 말하던 바르트나 실존주의적 인간관을 제시했던 불트만의 경우 역시 해방신학이라는 새로운 흐름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충격이었을까! 그것은 초대교회에서 중세 스콜라까지 이어지던 신학의 흐름이 근대에 수많은 변화를 겪으면서 새롭게 변화되었다고 여겨지던 20세기 초까지도 인본주의를 우선하는 신학의 흐름이 전혀 등장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것은 그 이전까지의 신학이 철저하게 신본주의만을 부르짓고 있었다는 것과 새로운 변화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방신학은 충격과 변화의 물결을 일으켰다. 특별히 정치적으로 억압되고 착취당하던 노동자들과 민중들에게 있어서 해방신학의 관심은 집중되었다. 제3세계(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용어지만)의 독재정권이나 경제적 부조리에서 비롯되는 사회적 불균형과 부의 일방적 축적에 대해 침묵하는 제도 교회나 신학은 맑스가 지적했던 바대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일뿐이라는 주요한 이슈를 제공할 뿐이었다.

해방신학은 바로 이 점에서 특수한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인민의 아편이 아니라 인민의 썩은 고름을 도려내는 메스가 될 수도 있는 것이 바로 해방신학의 취지인 것이다.

현재 세계 경제의 흐름은 탈이데올로기와 동시에 포스트모더니즘을 넘어서 거스를 수 없는 절대 경쟁체제로서의 신자유주의를 향해 치닫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말 그대로 복지와 사회보장제도마저 위협하는 인류 최대의 도전이 아닐 수 없다. 현대 해방신학은 이전의 정치적 억압과 투쟁에서 경제적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돈"과의 전쟁을 선언한 상태다.

하지만 그 승부는 너무나 싱거울 가능성이 크다.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아무런 입지가 확보되지 않은 체 종교적 이데올로기로서 해방신학은 불을 향해 뛰어드는 불나방 꼴이 아닐까라는 염려가 생긴다.

하지만, 해방신학이 기존 신학과 차별되고 변화된 성향의 상황신학이라 할지라도 분명한 것은 선과 정의를 부르짓는 기독교의 신학이라는 것이다. 즉 패배가 두려워 불의와 억압에 숨죽이는 비겁한 짓은 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해방신학은 교회가 아니라 이 땅위에 살고 있는 모든 이들과 함께하려는 의지인 것이지 종교적인 헤게모니가 아니다. 나를 나 되게 하는 것, 우리를 우리되게 하는 것,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것, 그 다음에 신앙과 구원의 문제가 등장해야 한다고 여기는 이들의 순수한 열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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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기독교의 역사 시작된지 200년이다. 굴절되고, 심하게 뒤틀린 이 땅의 근대, 현대사와 기독교는 그 역사에 참여했다.

세계 선교역사 가운데 한국의 선교역사는 매우 독특한 성격을 가진다. 물론 이러한 특성은 기독교가 포교된 여러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지만..

외세침략, 민족간의 대립과 전쟁, 이데올로기 냉전, 군부독재로 이어지는 굴곡된 역사는 이 땅의 기독교가 또 다른 모습으로 성장하는 토양을 제공했다.

민중신학이 등장하는 시기에 해방신학과 더불어 여성신학, 북미해방신학(흑인해방신학) 등의 상황신학이 돌출한다. 이런 신학이 등장하는 이유는 기독교가 있는 곳의 환경과 배경에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국의 근대사 속에서 기독교는 역사와 함께 했다는 주도적 입장의 한국기독교사가 기술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관은 그리 바람직하지도 달갑지도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이전까지 한국기독교사는 서술식 선교역사 즉, 간략한 소개정도에서 호교적 입장의 주도적 사관으로 급작스럽게 전환되었기 때문에 그리 객관적인 역사서술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한국 근대사 속에서 가장 독특한 상황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여러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아노미와 더불어 군부가 정치적으로 득세하거나 독재군부를 형성하였는데, 이는 한국 기독교가 처한 상황을 여실히 보여준다.

하지만 한국 기독교는 어처구니 없게도 그러한 독재군부와 타협하거나 축복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즉, 독재살인자를 천국에 보내달라고, 이들 정치군인이 참 정치인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물론 이 때 모든 기독교인들과 성직자들이 찬동한 것은 아니지만 사실 이들 반독재, 재야인사들은 힘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사회적 담론을 형성할 수 없었고, 그럴 가능성도 전혀 없었기 때문에 논할 의미가 없다.

그래서 정치적 발언권을 획득하지 못한 기독교는 군부독재상황에 처한 동시에 아시아적 가치를 우선으로 하는 경제정책의 희생양인 민중들에게 그 시선을 돌리는 것이 바람직한 상황이었다. 문익환목사나 함석헌옹과 같은 이들의 정치참여 자세는 도리어 반공헤게모니를 조장할 뿐이었을 볼 때 이는 타당한 근거를 가진다.

광주민주화운동, 구미항쟁을 통하여 민중의 결집된 힘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민중의 역량을 보여주기에 충분하였다. 하지만 이 당시 기독교 속에 자리잡기 시작한 민중신학은 기존 친독재 기독교 세력에 의해 뿌리를 내릴 틈도 없이 숨을 죽여야 했다.

민중신학이 문민정부 이래로 계속 그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이 당시 기독교 세력에 의해 견제되면서 민중신학과 민중신학자들이 홀대받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민중신학의 여건은 그리 좋다고 할 수 없을 만큼 위기의식이 팽배해 있다.

21세기 신자유주의와 더불어 무한경쟁체제로 자본주의의 단점이 극대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의 민중신학은 이제 새로운 목표로 시선을 돌려야 할 때다. 아직까지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고 있지만 최소한 이전까지의 구테타와 독재는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이제 경제적으로 소외된, 부의 재분배에서 배제된 이들, 공공부조에서 제외된 이들에게 눈을 돌려야 한다. 독재군부 속에서 정치적 투쟁과 더불어 천만노동자들에게 쏟았던 관심은 지속시키면서 또 다른 관심을 증대시켜야 한다는 취지다.

재화는 재화를 지속적으로 축적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본을 가지지 못한 민중은 끊임없이 착취의 대상일 뿐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래서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영국과 독일과 같은 선진유럽의 기독교는 사회적인 요구에 부응하여 종교세의 40%이상을 다시 사회에 환원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즉, 공공부조에 기독교(개신교, 천주교)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그 헌금(외국의 종교세)이 막대하지만 환원가치는 0 이라 생각하면 될 것이다.

사회에 대한 재화적 환원과 더불어 민중과 직접적으로 스킨쉽을 이루는 즉각적 행동 역시 동시에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직접대면 없는 그 어떠한 재화적 환원은 사회적 환원이 아니라 동정에 그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적게는 800만, 많게는 1200만을 외치는 한국 기독교인의 숫자는 사실 부끄러운 일이다. 기독교의 메시지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몸불리기에 급급해 하는 한국 기독교. 이제 자성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땅에서 사라져도 상관없다고 단호하게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교회와 교인에게 무슨 구원이 있고, 무슨 하나님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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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보다 민중신학이란 것에 대해 알고 싶으신 분은 김진호 목사의 사이트를 추천합니다....(http://theology.co.kr/jin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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