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수난의 가톨릭

"기독교의 역사"에서 주로 다룰 주제는 기독교인들이 저질러온 죄악들,
예를들어 십자군, 마녀사냥, 이단사냥, 루터와 칼뱅의 망언 사례, 인디언과 인디오 학살 등을 역사적 자료를 통해 조명하고,
기독교가 로마에 의해 공인된 과정, 유대인들의 역사 등 다채로운 주제를 포함하게 될 것입니다.

3. 수난의 가톨릭

발견 0 2,726 2002.09.14 14:42
1) 수난을 불러온 요소
a. 조상제사의 문제
유교 사상의 뿌리가 되는 사상은 효이다(효는 백행지본이다.)
그러므로 불효는 일천가지중에 가장 큰 죄이다.
그리고 효중에 큰 부분이 제사이다.
중국의 마테오리치가 중국에서 선교할때 조상제사는 정치적의식이요 기독교는 유교의 발전이라고 했다.(배타 방지위해) 그러다 보니 종교가 혼합적 이다.

후에 선교사 도미니크 일행이 잘못된 이런것을 보고하자 교황 이노센 트 10세가 제사금지를 내림.

* 조상제사 때문에 첫 희생자는 윤시충 이다.
윤시충은 전라도 사람으로 25세에 진사급제하고 서울에 올라와 김범우 집의 교리 연구에서 감화 받고 3년후 입교함.
그리고 모친이 별세 했을때 상복 입고 호곡하고 위폐를 모시지 않고 제 사도 드리지 않았다.
- 이사실이 관가에 알려지자 윤시충과 외종형 권상연은 같이 처형당함.-

* 그당시 천주교 믿는 자는 패륜 외도라 하여 박해 했다.

b. 붕당적 요소(당시의 당파 싸움으로 인한 박해)
영조때 부터 천주교가 들어 왔는데 해서, 관동 지방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때 는 사색 당쟁이 극심하던 때이다.

영조왕은 당쟁 화를 절감해서 당쟁을 줄일려고 힘을썼고 정조 대왕도 성품이 어질어서 당쟁을 줄일려고 힘을썼다.

* 사도 세자문제 발생시
시파(세자 동정하는파) - 남인 이라는 천주교도가 많이 가입해 있었다.
숙종때 남인 세력이 약화됨. 남인에 속해 있으면 등용길이 막혔다.

* 이런 남인에게 우호적인 재상인 채재공이 있었는데 1799년 사망했다.
정조대왕이 또 사망하자 천주교 박해가 터졌다.

* 정조 아들 순조(11세)가 왕에 오르자 정순왕후(정조의 첩)가 순조 뒤에서 정 치를 함. 이때 천주교에 대한 무서운 박해가 시작됨.

* 채재공이 죽자 죽은후 관직까지 박탈함.(1801년)

* 1801년 이때는 서학을 박해하는 교서를 발표함.(서학은 인륜에 반역하고, 교황 은 장가도 들지 않고 아들도 안 낳고 밑의 똑똑한 자를 뽑아 자기의 위치를 넘 겨 준다고 하는데 이것은 조선의 세습 윤리와 안 맞아 박해 해야 한다고 함.)

c. 황사영의 백서가 문제됨

한국 가톨릭의 4대 박해가 있었는데
1. 신유 박해(1801년) : 황사영(경상도 창원사람)은 정약전의 형 정약용이?
* 주신부에게 영세 받음. 17세에 진사 급제를 함.
박해가 시작되자 충북제천 으로 피신해 있다가 그를 찾아온 황심을 만남.
(천주교 구하기 위해 북경의 주교에게 편지 보내자고 약속. 그 편지는 길이 62 센티 폭 38센티의 비단에다 작은 글씨로 만 삼천자의 글로 보냈는데 내용은 박 해와 참상을 보고 하는 것인데 그만 도중 들켜서 조선 조정에 밝혀짐)

* 이 백서가 들켜 가톨릭은 매국종교로 지탄 받게됨.
백서 내용 : 1). 조선 천주교의 실상을 기록하고, 그래서 많은 순교자가 생겼 다는 내용.

2). 당시 정계의 사색 당쟁의 실상을 기술. 박해의 이유는 당쟁 때문이 라고 말하고 이것 때문에 경제적으로 교인이 열악하다고 기술.
3). 중국의 신도 1명을 택해 북경 지대에 점포를 개설해서 청국과 조선 사이에 통신 연락을 하게하고, 북경의 청국 황제를 움직여서 조선 왕으로 하 여금 서교를 받아 들이게 하도록 압력 부탁, 또 중국의 공주를 조선조 왕자에 게 정략 결혼시켜 조선을 굴복 시키고 서학을 받아들이도록 부탁, 또 군함과 군수 물자를 실고 와서 이 나라를 치라고 부탁. 나라는 망해도 천주교는 전파 되야 한다고 함.

* 황사영은 1801년 27세의 나이로 모반죄에 의해 참수되고 이 사건으로 300명 이 순교하였다. 이것을 신유박해라고 한다.

* 신유박해 이후 서학의 창대를 염려하여 쇄국 정책을 조선에서는 실시. 북경 외의 모든 문을 닫아 버림.

* 헌조의 명을 따라 발표된 책들이 : 척사윤음이 나왔고 대외쇄국강저, 안정복 (천학고), 천학문답, 김치진(척사론)

2. 기해 박해(1839) * 신유박해 후에도 흩어지지 않고 북경 주교에게 성직자 보내 달라고 신자들 이 요청.
* 정약종 아들 정하상이 있는데 1816년 2차례 걸쳐 북경의 신부에게 요청 했 으나 여의치 않음.

* 1827년 정하상의 편지가 라틴말로 번역되 교황에게 알려져 그레고리 16세 (교황)은 조선교구를 북경 교구에서 분립 하기로함.

* 초대 주교로 브르기에를 임명함.- 1831년

* 그레고리 16세 교서에서
첫째로 교회를 양떼로 보지 않고 목장으로 봤다.
둘째로 성직자는 공고 교리, 성례전을 위해 파송한다.
(즉 천주교는 교리와 구역을 더 중시함을 알수 있다.)
* 브리기에는 부임 하지도 못하고 객사함.

* 1835년에 1대 주교가 객사하자 블란서에서 신부들을 파송하는데 그중 모팡이 라는 신부가 상복 차림으로 압록강 통해 상륙.

* 2대 주교로 앙베르가 우리나라에 잠입해 옴.
샤스텡이라는 블란서 신부가 그후 또 옴.

* 이 세사람의 신부를 통해 가톨릭 부흥.

* 헌종 5년 (1839)에 2차 박해 시작.
당시 영의정 이지현이 사학박멸을 주장하자 순원 황후가 허락.

* 정하상을 비롯한 100명의 교도가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 당했고 나머지 세 신부는 한강변 새남터에서 순교 당했다.

* 상제 상서를 정하상이 책을 바침.
우리나라 가톨릭에 대한 최초의 변증서 = 상제 상서
내용 : 3400자로 되 있는데 천주교를 변증하는 부분과 잘못된 오해 부분을 설 명하고 마지막에는 우리도 임금의 자녀라고 긍휼을 구함.

* 당시 척불숭유 였는데 정하상은 이 책에서 불교를 공격했다.(즉 기독교가 불 교와 다르다는 것 말함-강조)

3. 병오 박해(1846)
이 박해전 1845년 앙베르 주교의 후임으로 페레올 주교가 조선 사람으로 최 초의 조선 안수 받은 김대곤 신부와 한성에 잠입한다.
6개월후 김대곤은 외국인 신부 안내 신부라는 일을 하다 군교에게 잡혀 들어감.
1846년 김대곤 신부 처형(살려주려고 했으나 끝내 믿음 지킴) 이 이후로 많은 무서운 박해가 시작 되었는데 이것이 병오박해이다.


4. 병인 박해와 블란서(1866) 이때 우리나라는 동학 난으로 많은 시련을 격을때 동북쪽(두만강) 강변에 러 시아가 자꾸 통상하자고 압력을 가했다.
당시 대원근의 측근이 가톨릭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한성에 베르노 주교가 있었는데 로마 교황청에 보낸 편지를 보면 당시 대 원군이 가톨릭에 관대한 생각이 있음과 대원군의 부인은 천주교에 상당한 지 식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부인은 아들 왕자가 황제에 등극할때 미사 드려 달라고 부탁까지 했다. 또 왕자의 유모는 영세까지 받은 여자였다 한다.
베르노 주교는 한성에서 열심히 전도한 결과 1865년에는 12명의 선교사와 평 신도 2만 3천으로 늘었다. 당시 상황이 이래서 김기호, 홍범주 등이 의논해서 조, 영, 블 의 3개국이 동맹하여 방하책을 대원군에게 건의했다.
민비(대원군의 며느리) 는 비밀리에 베르노 주교에게 블과 교섭해서 외세 에서 지켜 달라고 부탁했다.
남종삼(조선의 독실한 가톨릭 지도자)을 대원군이 접촉하는 등 가톨릭과 많은 교제가 있었다.

그런데 희 소식은 오지않고 베르노 주교는 가톨릭은 정치적 개입을 원치 않고 방하 책이라는 자체도 부족하다 하여 묵살 하였다.
여기에 존심이 상한 대원군이 옛 감정이 살아나고 척외사상과 서학금지 상 소문이 빗발쳤다.
또 당시 우리가 존중하는 청도 천주교 배척 분위기 여서 더욱 그럼.
그래서 새남터에서 7명의 선교사와 베르노 주교가 죽는다.
서문에서는 조선의 신도들이 많이 죽음.
한국 통사에는 교도 12만명이 죽었다고 기록ㄷ으나 다른 자료 종합결과 8천명 정도라함.(3년 동안)
이것으로 인해 블란서 군대를 우리에게 보내 전쟁하도록 하는 원인이다.
니델이라는 선교사가 포교들을 피해 충청도 해안으로 빠져나가 2명의 신 부는 거기남겨 두고 니델과 조선교도들은 아산에서 어선을 빌려타고 중국 산동 성의 지프라는 곳에 다다르게 된다.
이곳에 도착한 조선 교도들은 커다란 블란서 군함을 보고 이것으로 조선 을 위협하여 천주교를 널리 펼치자고 말했다.
이 조선인 11명중 4명은 중국 3대 도시중 하나인 천진의 블란서 공관에 찾아가 공사인 블란서 제독(로쓰)를 만나서 한국 박해를 보고했다.
이에 분개한 블의은 청국 총리에게 보고하고 니델을 통역삼아 군함을 몰고 강화도에 침공했다.(병인양요) 이것을 계기로 전국에 조서를 내려 어린아이까지 죽임.

* 병인박해와 미국 1866년 7월 평양 대동강에 국적이 미국인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 대동강에 들어왔다.(군함이 아니라 상선) - 여기에 로버트 토마스 목사가 타고 있었다. (런던 선교회 소속 선교사)

한강인줄 알고 대동강에서 있다 물이 빠져 남아있다 평양 관군괴 제너럴 셔먼호가 싸움이 벌어졌다.
당시 평양 시민이 모두 합류하여 상선을 불태워 모두 죽였다.

이 일이 있은후 1871년에 북경에 주지하던 미국 공사 F 로 라는 사람이 청 국의 총리 아문을 통해 조선 정부에게 셔먼호 사건을 묻게했다.

- 조선정부는 조선은 외국 상선이라 해서 다 적대한 것은 아니다. 1855년, 1865년에도 미국 함정이 황해도, 평안 연안에 표류했을때 도와주고 헤어질때 술까지 했을 정도다.
따라서 우린 의심 받을것이 없다. 단지 우리 허락없이 통상 하려고해서 불가피 했다고 밝혔다.-

미국 극동 함대 소장 로져스는 군함 4척을 이끌고(1871) 강화도 해역을 통해 광성진 까지와 싸움 벌어졌다.(한성 수비대와)

이것으로 외교 문제 발생하자 대원군은 일본에게 쇄국을 다시 재천명 했다.
why? 당시 조선은 외교를 몰랐으며 일본 외에는 설명할 곳이 없었고 일본이 다른나라에게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헤밀턴 피시(미국 국무 장과)는 일본 정부를 통해 조선의 쇄국 정책을 듣고 이제부터 미국과 조선관계는 일본이 좀 처리해 달라고 부탁.
- 1905년의 을사조약, 1910년의 한일합방의 배경이 됨.-

cf.여기에 대해 로빈슨이라는 유명한 역사학자는 고대 로마 기독교인들이 당한 고난보다 한국의 4대박해때 고난이 더컸다고 말했다.
스테판 나일 박사는 책에서 조선 가톨릭 역사는 가장 로멘틱하고 믿지 못할정 도의 수난시대라고 말함.

* 조선 천주교의 신앙 형태
조선 천주교는 철저히 수난과 박해로 얼룩져 있고 4대 박해를 거쳐오는 동 안 피맺힌 헌신과 형극을 거치면서 신앙형태가 생겼다.

(1) 이들 교회는 수난을 통해 오면서 상류에서 하류층으로 신앙의 계층적 구 조로 변모 되었다.
(2) 중류적인 감각에 호소하고 민족 주체의식이나 고유의 민족의식에 접촉함 으로서 조선적 기독교에 언문(한글)을 중시하게 ㄷ다.(천주교 서적이 많이 한글 로 되있다.)
(3) 1850년대 와서 천주교가 하류층으로 파고들어 격정적이고 종말적인 위기 의식으로 변모됨. 그래서 마침내 저들은 박해로 인해 종교의 내면화 지향적이다.
(4) 1919. 3. 1일에 개신교 교도들은 많이 참여했으나(33인중 16명) 천주교 교 인은 전혀잠잠.(박해에 그동안 질림)


* 오디세이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2-09-16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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