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춘수 3. 감리교 '황민화'의 선봉장

"기독교의 역사"에서 주로 다룰 주제는 기독교인들이 저질러온 죄악들,
예를들어 십자군, 마녀사냥, 이단사냥, 루터와 칼뱅의 망언 사례, 인디언과 인디오 학살 등을 역사적 자료를 통해 조명하고,
기독교가 로마에 의해 공인된 과정, 유대인들의 역사 등 다채로운 주제를 포함하게 될 것입니다.

정춘수 3. 감리교 '황민화'의 선봉장

발견 0 2,577 2002.09.17 17:17

정춘수가 부일협력을 하게 된 것은 반드시 흥업구락부 사건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이미 이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에 기독교계 친일협력 조직의 간부로 참여하고 있었다.
즉 그는 1938년 5월 8일 일제의 사주에 의해 전도보국·황도실천을 위해 창립된 '경성기독교연합회'에 일본인 목사 아키츠키(秋月致)와 함께 부위원장에 선임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듬해 10월에는 한국감리교회를 일본 메소디스트 교회에 종속시키기 위한 일선감리교특별위원회의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그의 친일행각이 본격화 된 것은 1939년 9월 일제의 비호를 받아 조선감리교 제4대 감독으로 피선되면서부터였다.
그는 교권 장악을 위하여 일제의 지도에 충실히 '순응'하여 1940년 10월 그가 주재하는 총리원 이사회에서 다음과 같은 결의안과 함께 감리교 '혁신안'을 마련하여 발표하였다.

"아(我) 국체의 진정신과 내선일체의 원리를 실현하야 총후 국민의 의무를 이행하고 신체제에 순응함은 아 기독교인의 당연한 급선무이다. 고로 기독교 조선감리회 총리원 이사회는 좌기 신안(新案)을 솔선 결의 실행을 기함."(<매일신보> 1940.10.4일자)

이 혁신안은 민주주의·자유주의의 배격,일본정신의 함양,일본메소디스트교회와의 합동,일본적 복음의 천명 등을 규정하고, 심지어는 개교회의 애국반 활동 강화와 "교도로 하야금 지원병에 다수 참가하게 할 것"까지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1941년 3월에는 국민총력 조선기독교감리회연맹의 주최로 시국대응 신도대회를 열어 혁신요강의 실천과 고도국방국가 완성에 매진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어서 감리교 3부연회를 해산하고 일본의 교단규칙에 따른 새교단규칙을 마련하여 교단을 재조직하였다.

같은 해 10월 10일에는 교역자와 신도 대표 50여명을 이끌고 부여신궁조영 근로봉사를 하고 돌아와 21일에는 국민총력 기독교조선감리교단 연맹 이사회를 열어 교회의 철문 철책 등을 헌납하도록 하는 이른바 '종교보국 5개항'을 결의 실천케 하였다.

이듬해 2월 13일에는 정춘수 통리자의 명의로 각 교구장에게 "황군위문 및 철물 헌납 건"이라는 공문을 보내 철문·철책은 물론 "교회종도 헌납하야 성전(聖戰) 완수에 협력"할 것을 요구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정 통리자의 전횡은 감리교 내부에서도 반발을 일으켜 1942년 10월에 열린 총회에서 그에 대한 불신임안을 결의하자, 그는 일본경찰의 지원을 받아 총회해산을 공고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잠시 변홍규가 통리자가 되었으나 일제의 압력으로 물러나고, 1943년 10월에 열린 교단 총회에서 정춘수가 통리에 다시 취임하였다.

이와 같이 일제의 비호 아래 교권을 다시 장악하게 된 정춘수 통리는 1944년 3월 교단상임위원회를 열어 교회를 통폐합시키고 나머지를 팔아 전투기를 헌납하려는 "애국기 헌납 및 교회병합실시에 관한 건"이라는 결의를 통과시켜 실천하였다.(<기독교신문> 1944. 4. 1일자) 그리고 이것도 부족하여 일제의 방침에 따라 그해 5월부터는 예배 설교시 구약성서와 묵시록을 사용치 말고 4복음서만 사용하도록 하며 예배 집회 시간도 단축하여 주 1회만 집회하도록 하고 근로시간을 늘리도록 각 교회에 통고하였다.

정 통리가 이끄는 감리교단 본부는 1944년 9월 서울의 상동교회 예배당에 이른바 '황도문화관(皇道文化館)'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교역자들을 모아 일본정신과 문화를 주입하였다. 그리고 이들을 한강에 끌고 가 신도(神道)의 재계의식인 미소기하라이( )를 행하게 하고 남산의 조선신궁까지 머리에 일장기 두건을 두르고 뛰어가 신사에 참배하게 하였다.


당시 총독부 보안과장을 지낸 야기(八木信雄)의 회고록인 {한국과 일본}에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신도(神道)의 의식인 '미소기'를 행하게 되었는 지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어느 날 야기(八木)와 친근한 박준영(朴駿榮; 일본명 喜多毅-그는 한국인으로 드물게 일본의 신궁황학관 출신이었다.)
이 야기(八木)를 찾아와 "나와 친근한 기독교 간부들 사이에 최근 기독교 탄압의 소문이 화제가 되어 매우 걱정하고 있는데 나와 함께 상의한 결과 목사들에게 신도(神道)의 계행사( 契行事;미소기행사, 즉 목욕제계하고 악을 제거한다는 의식)를 시켜서 기독교도 또한 참다운 일본인이 되게끔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로 하여 탄압을 면하는 것이 어떤가 하고 합의를 보았다.

이것은 '신도는 천리교·금광교 등의 소위 교파신도와는 달리 본래 선조숭배, 보본반시의 대도고 종교는 아니므로 일본 국민이면 불교도든 기독교도든 어떤 사람이든 불문하고 전부 대도를 걸을 것이다.'라고 하는 공적 견해에도 따름으로 별로 문제화될 염려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직접 그 기독교 간부들을 상면하여 그 의중을 타진한 후 가능한 한 비호하여 주기 바란다."고 하였다. 그래서 박준영의 소개로 "기독교 감리파의 정춘수(3·1운동 독립선언서 성명의 1인)와 이동욱씨를 상면한 결과" 그의 말과 틀림없었고 그 후 기독교계 목사들이 계행사를 할 때 야기(八木)가 초청을 받아 참석하여 인사말을 한 기억이 있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의 말대로라면 정춘수 등이 자진하여 기독교계에서 신도의식인 '미소기'를 하겠다고 나왔다는 것이다.

정춘수의 이와 같은 일제 당국과의 관계는 해방 후 감리교 재건파측에서 나온 '감리교회 배신(背信)·배족(背族) 교역자 행장기'에도 상세히 언급되고 있다.


"일본 군경의 책모에 호응하여 일어난 것이 당시까지 적극신앙단이라는 결사를 영도해가며 교계를 어지럽히던 신흥우와 그 일파들이었다. 그들은 당시의 감독 정춘수와 결탁하여 1940년 10월 2일 일본 군경의 무력과 경찰력을 배경삼아 감리교회총리원 이사회를 긴급 소집하고 경찰 당국의 위임장을 제시하면서 이사들을 공갈 위협하여 소위 조선감리교회 혁신조항을 승인시켜 죄악사의 제1보를 내어디딘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악기(惡企)는 이에 그치지 않고 조선 전 기독교를 신도화(神道化)시켜 일제의 주구를 만들기 위해 1943년에 이르러 당시의 보안과장 야기(八木信雄) 정학회(正學會)의 기다(喜田毅;朴駿榮) 보호관찰소장 나가사키(長崎祐三) 등의 절대한 원호와 사주를 받아 [일본기독교조선혁신교단]을 조직하였었다. 그러나 전선유지신도와 교역자들의 결사적인 반대투쟁으로 혁신교단이 탄생 후 1개월에 유산되어 버리고 말자 그들은 다시 경찰당국의 힘을 빌어 감리교회의 영도권을 잡고 배신 배족의 죄행(罪行)을 대담무쌍히 감행하여 온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그들이 죄상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는 가운데 "정춘수 이하 간부들은 동포의 황민화를 위한 기독교의 변질을 전 보호관찰소장 나가사키(長崎祐三)에게 서약하였고 기독교 요인 모해에 관한 최고 비밀 상담역이 되어있었다.(1946년 5월 6일 남조선형무소 목사 회의 시 서대문형무소 구금 중이던 나가사키(長崎祐三)의 고백)"고 증인까지 밝히고 있다.

마경일 목사도 그의 회고록(1984)에서 일제 말기 정춘수를 비롯한 교단 지도자들의 횡포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혁신 교단의 지도자들은 일제의 침략전쟁 수행을 위하여 충실한 협력자의 역할을 다 하였다. 교회의 여선교회를 동원시켜 일본 군대를 위문하게 하였고, 신도들의 가가호호에서 일체의 쇠붙이를 거두어 전쟁 무기를 만드는 일에 협조하였으며, 교회의 종들을 떼어 바침으로써 이른바 '비행기 헌납'을 하도록 한 것이다. 그들은 철저한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를 지향하여 일체의 목표를 거기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중략)...실상 그 무렵 경찰은 '총진회(總進會)'라는 것을 만들어 정춘수 감독을 회장으로, 장로교의 정인과 목사를 부회장으로 앉혔다. 그것은 결국 경찰의 앞잡이 역할이었다.

'총진회'란 결국 당시 크리스천들의 성분이며 사상 등을 조사하여 그들을 선량한(?) 황국신민으로 전향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고 하나, 실은 교회와 신도들을 위협하는 공포의 존재였다고 함이 타당하다. 이를테면 그 기관은 일본 경찰과 밀착된 일종의 '비밀 경찰'의 일을 하였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58-59쪽)


정춘수는 이와 같은 교계 안에서의 부일협력 뿐만이 아니라, 1941년 초에는 국민총력연맹의 문화위원의 1인으로 참여하였고, 그해 10월에는 조선임전보국단이라는 친일 단체의 평의원을 맡았으며,1944년 말경에는 조선전시종교보국회 이사를 맡아 활동하기도 하였다.


* 오디세이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2-09-17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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