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도 3. 전향자의 친일지 {동양지광}의 사장

"기독교의 역사"에서 주로 다룰 주제는 기독교인들이 저질러온 죄악들,
예를들어 십자군, 마녀사냥, 이단사냥, 루터와 칼뱅의 망언 사례, 인디언과 인디오 학살 등을 역사적 자료를 통해 조명하고,
기독교가 로마에 의해 공인된 과정, 유대인들의 역사 등 다채로운 주제를 포함하게 될 것입니다.

박희도 3. 전향자의 친일지 {동양지광}의 사장

발견 0 2,636 2002.09.17 18:32

박희도가 어떠한 계기를 통하여 친일파로 전향하였는지, 그리고 그것이 일제측의 회유 공작에 의한 것인지 자발적인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의 부일활동은 1937년 중일전쟁 직후부터 시작되지만, 본격적인 친일행각은 1939년 1월 일문으로 된 친일 월간지 {동양지광}을 창간하면서부터였다.
다른 잡지와 언론들이 일제의 압력으로 폐간되어 가고 있을 때, 이 잡지가 창간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잡지가 "진정한 내선일체와 황도선양"을 표방함으로써 총독부의 양해와 협조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희도는 이 잡지의 창간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때에 반도 2천만 동포의 가슴 속에 일본정신을 철저히 하고, 황도정신을 앙양하고, 폐하의 적자(赤子)로서, 황국 일본의 공민으로서 예외없이 국체의 존엄을 체득하고, 황국 일본의 대사명을 준봉하고, 황도의 선포, 국위의 선양에 정진하고, 그리하여 동양의 평화는 물론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일대 이상을 펴서, 세계 인류의 문화 발달과 그 강영복지 증진에 공헌할 것을 기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믿습니다. 생각컨대 이 대의를 이해하고 이 이념을 체득할 때 일본국민으로서의 영광과 긍지를 감득치 않을 자 누가 있겠습니까."({동양지광} 1939.1 창간호)

그리고 여기에 이어서 미나미(南次郞) 총독의 "피로써 역사를 철한다."라는 글과 그 밖에 많은 친일 논설들을 게재하였다.
또한 이 잡지의 창간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 해 2월 8-9일에는 부민관 대강당을 빌어 이미 친일의 길을 걷고 있던 윤치호·최린·장덕수 등을 연사로 초청하여 시국문제 대강연회와 영화의 밤을 개최하고 있다.

1939년 말경 {녹기(綠旗)}지의 편집자였던 모리타(森田芳夫)는 "조선 사상 제진영의 전망"이라는 기고문에서 동양지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동양지광사가 태어난 것은 금년 1월이다. 지금까지 조선인측의 언론은 거의 조선어였다....그런 의미에서 {동양지광}이 조선인들에 의하여 [내선일체]의 주장 하에 태어난 것은 실로 기쁜 일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사장 박희도씨는 신념과 배포있는 사람이요, 정치적 수완도 좋다. 많은 경제적 희생을 하면서도 매호 계속하여 내고 있다. 대체로 내선일체에 관하여 내선인 쌍방의 주장을 게재하고 있다."


그 해 8월부터는 협동예술좌라는 신극 극단을 동양지광사에 전속시켜 친일적 내용의 연극을 서울은 물론 함북, 간도, 상해 등지까지 순회 공연하게 하였다.

 이러한 박희도의 열성적인 친일 활동에도 불구하고, 총독부에서는 한때 이 잡지가 종이 소비에 비하여 효과가 적다는 이유로 발간을 중단할 것을 종용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 수완'이 좋은 박희도의 간청으로 총독부에서 "인쇄용지 배급권"을 다시 주어 1941년 12월부터 다시 속간하게 하였다.

박희도는 이 속간호에 "총후 국민의 급선무"라는 친일 논설을 게재하고, 같은 달 20일에는 반도호텔에 신흥우·정춘수·전필순·정인과·양주삼 등 기독교계 지도자들을 모아 장장 7시간에 걸쳐 이른바 "미·영타도좌담회"를 개최하고 그 사회를 자신이 직접 보았으며, 그 내용을 이듬해 2월호에 특집으로 게재하였다.

이 속간 무렵부터 이 잡지의 친일 논조가 더욱 노골화으로 되고 있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심지어 박희도는 징병제 실시 발표에 대하여 1942년 5월 13일자로 미나미(南) 총독과 이다가키(板垣) 조선군 사령관에게 공개적으로 감사장을 보내고 이를 이 잡지에 게재하기까지 하였다.


1943년 6월호에서 그는 "진심을 헌납하라"는 글을 통해서

"그러므로 현시의 반도 총후에서 국민의 헌납운동이 날로 치열화되고 있음은 기쁜 경향이지만 그럼에도 더욱이 중요한 것은 충군애국의 진심이 진정으로 그 헌납품에 들어있는가 하는 문제다....하물며 세계에 으뜸인 황군병사로서 제1선에 참가할 때 죽음 등을 고려할 필요가 어디 있을까 ? 조국과 동포를 위하여 한 목숨을 헌납할 때 그 죽음은 자기 동포를 영원히 살리기 위한 죽음으로 실로 인간 최고의 영예인 것이다."라고 하여 일제의 침략전쟁을 위하여 젊은이들의 '목숨을 헌납'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또한 해방 직전 해인 1944년 3월호에서도 "결전 비상의 때(秋) - 궐기하라 반도 청년"이라는 글을 실어 청년들의 전쟁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문필활동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강연행각에도 참여하였다.
1937년 9월 6일 학무국 주최 시국강연반에 참여하였고, 1943년 11월 6일부터는 강원도 지역에서 학병독려의 강연행각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만 그렇게 할 뿐 아니라 동료들의 이름까지 빌려 자신의 잡지를 통해 친일 논설을 펴 일제의 신임을 얻기에 열을 올렸다.


윤치영은 그의 회고록에서 {동양지광}에 실린 자신 명의의 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변명하고 있다.

"하루는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기미독립만세 사건에 가담하였던 박희도(朴熙道)가 나를 만나자고 하였다. 그는 어떤 연유에서였던지 그 당시 총독부에서 지원하는 것으로 알려진 경무부 잡지 <東洋之光(동양지광)>의 사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동양지광> 이번 호에 대동아전쟁 승전특집을 냈는데 다른 지명 인사들의 것과 함께 나의 글이 실려있다고 말하였다. 지금 일본은 1억 인구가 총동원이 되어 전쟁수행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조선의 유지들이 살아남는 길은 억지로라도 그들에게 협력하는 체 하는 길뿐이어서 자기가 다 알아서 처리했노라고 하였다. 박희도는 내 이름 뿐만 아니라 백모, 현모, 이모, 신모씨 등 다수의 이름을 본인들의 승락없이 게재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들과 같이 박씨에게 심한 항의를 하였으나 일제 전시하의 때가 때이니만치 명예훼손 소송 등은 엄두도 낼 수가 없었다."({윤치영의 20세기},189쪽)

박희도는 이외에도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조선언론보국회 참여 등 수많은 친일단체의 간부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도 해방 직전에는 일제의 패망을 감지하였던 것 같다.

이 사실에 대해서 윤치영은 그의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일제 말엽 대화숙에서 서슬이 시퍼런 감시를 받아 가며 일본패망의 날을 기다리던 우리들을 가끔 찾아 준 박희도 <동양지광(東洋之光)> 사장은 총독부 경무부에서 들은 태평양전쟁의 전황과 일본군의 동향을 귀띔해 주면서 자기는 기왕에 총독부 앞잡이 노릇을 하는 몸이 되었지만 후일 세상이 바뀌는 날 자기의 속 마음만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증언해 주기 바란다고 말한 일이 다시 기억난다."({윤치영의 20세기},457쪽)

여기서도 그의 기회주의적인 속성이 드러나고 있다.

박희도의 일생은 그 시대 가장 주류를 이룬 사조에 쉽게 빠져들어가 열성을 다해 일하다가 그 사조가 일단 잦아들면 쉽게 포기하고 또 다른 사조를 찾아 뛰어들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민족주의 운동의 최고봉이었던 3·1운동에 민족 대표로 참여하였고, 그후 사회주의 사조가 발흥하자 {신생활}을 창간하여 여기에 동조하였으며, 1920년대 말경에는 신간회에 참여하여서도 자치운동에 기울었다가, 마침내 1930년대에 들어 일제의 대륙침략과 세력의 확장으로 독립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자, 자발적으로 관제운동인 황민화운동에 뛰어들어 {동양지광}을 창간하여 친일논설을 펴고 내선일체와 전쟁협력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다 그후 일제의 패배가 확실해 가자 총독부의 앞잡이 노릇을 하지만 자기의 '속 마음만은 그렇지 않다'고 변명하였던 것이다. 그
러나 그의 '속 마음'을 누가 알겠는가 ? 그의 '속 마음'이 아무리 순수한들 겉으로 나타난 그의 친일행각 때문에 우리 민족이 입은 상처는 무엇으로 보상하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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