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주의-3.. 흄의 비판

창조주의-3.. 흄의 비판

발견 0 2,674 2002.09.14 14:27
흄은 설계 논증을 내가 제시한 방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게 그 논증은 최선의 설명에로의 추리가 아니라, 유비 논증 내지 귀납 논증이다. 이 논증을 이렇게 파악하면 사태는 아주 달라진다. 이 논증이 흄이 부여한 성격을 갖는다면 흄의 비판을 매우 강력하다. 그러나 이 논증이 내가 주장한대로 최선의 설명에로의 추리라면 흄의 비판은 그 힘을 거의 잃고 만다.

페일리는 흄이 죽은 후에 글을 썼지만 흄이 모든 설계 논증에 공통되는 패턴이라고 여겼던대로 페일리의 논증을 재구성하는 것은 아주 쉽다. 흄이 보기에 이 논증은 생명체와 인공물 간의 유비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시계들은 지성적인 설계의 산물이다.
시계들과 유기체들은 비슷하다.
==========
유기체들은 지성적인 설계의 산물이다.

이 논증의 전제들과 결론 사이에 두 줄을 그은 것은 전제들이 결론에 높은 확률을 부여하는 것으로, 또는 전제들이 결론을 매우 그럴법하게 만드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점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즉, 이 논증은 연역적으로 타당하자고 의도된 것이 아니다. (연역적인 타당성은 전제들이 모든 진리라면 결론이 진리이어야 한다고 절대적으로 보장함을 뜻한다.)

이 설계 논증이 유비논증이라면 그 전제들이 결론을 얼마나 강력하게 지지하는가 물어야 한다. 전제들이 결론을 엄청나게 그럴법하게 만들어주는가, 아니면 단지 약하게 지지할 뿐인가? 흄은 유비 논증은 그 두 대상들이 얼마나 비슷한가에 따라서 강할 수도 있고 약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점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는 다음의 두 유비 논증을 비교해 보라고 제시한다.

인간에 있어서 피는 순환한다.
인간과 개는 비슷하다.
==========
개에 있어서 피는 순환한다.

인간에 있어서 피는 순환한다.
인간과 식물은 비슷하다.
==========
식물에 있어서 피는 순환한다.

첫째 논증은 둘째 논증보다 훨씬 더 강력한데, 그것은 인간이 식물보다 인간이 개와 더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흄은 말한다.

유비 논증을 강하거나 약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 이론을 이렇게 나타낼 수 있다. 대상 t는 목표(target), 즉 그것에 대해서 결론을 끌어내려고 하는 바의 대상이다. 대상 a는 유사물(analog), 즉 속성 P를 가졌음이 이미 알려져 있는 대상이다.

대상 a는 속성 P를 갖는다.
대상 a와 대상 t는 n의 정도로 유사하다.
n==========
대상 t는 속성 P를 갖는다.

이 논증 형식에서 n은 두번 나온다. 이것은 a와 t 사이의 전제적인 유사성의 척도로서, n=0이면 두 대상은 어떤 속성도 공유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n=1이면 두 대상은 모든 속성을 공유한다는 뜻이다. 이 변수 n은 또한 전제들이 결론을 지지하는 정도를 (확률의 개념처럼) 0에서 1 사이의 값으로 나타낼 수 있다고 할 때 그 지지 정도의 척도이기도 하다. 유사물과 목표가 더 비슷할수록 그 전제들은 결론을 더 강하게 지지한다.

흄은 유비 논증의 논리에 관한 꽤 그럴법한 이 이론이 설계 논증에 대하여 중대한 귀결을 갖는다고 믿는다. 설계 논증의 전제들이 결론을 얼마나 강하게 지지하는지 알려면 시계와 유기체가 정말 얼마나 비슷한지 물어야 한다. 잠시만 생각해 보면 그것들이 매우 안 비슷하다(dissimilar)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계는 유리와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고 숨 쉬고 성장하고 배설하고 신진대사하고 번식하는 등의 일을 하지 않는다. 이 목록은 얼마든지 더 나갈 수 있다. 사실 시계와 유기체보다 더 안 비슷한 두 가지를 찾기도 쉽지 않다. 그 직접적인 귀결은 물론 설계 논증은 매우 약한 유비 논증이라는 것이다. 시계가 어떤 성질을 가졌으므로 유기체도 그런 성질을 가졌으리라고 추리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설계 논증이 유비 논증이라면 흄의 비판은 통렬한 것이겠으나, 나는 설계 논증이 이런 식으로 해석되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 유기체에 대한 페일리의 논증은 시계와 유기체가 비슷하건 비슷하지 않건 상관없는, 독자적인 논증이다. 시계에 대하여 얘기한 이유는 유기체에 대한 논증이 강력한 것임을 독자들이 알 수 있도록 돕자는 뜻이다.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개연성 원칙의 세번째 적용을 생각해보자. 동전 하나를 천 번 던져서 각 경우에 동전이 머리가 위로 떨어졌는지 꼬리가 위로 떨어졌는지 알아본다고 하자. 그것을 관찰한 진술 O는 아래와 같이 될 것인데, 또 O를 사용해서 다음 두 개의 경합하는 가설을 변별해야 한다고 하자:

O:      그 동전은 803번은 머리가 위로 197번은 꼬리가 위로 떨어졌다.
H1:    그 동전은 머리 쪽으로 휘었다 - 그것이 머리가 위로 떨어질 확률은 0.8이다.
H2:    그 동전은 똑바르다 - 그것이 머리가 위로 떨어질 확률은 0.5이다.

개연성 원칙은 이 관찰이 H2보다는 H1을 강하게 선호한다고 말한다. 증거가 한 가설을 지지하고 다른 한 가설을 멀리하는 쪽으로 치우쳐 있다. 이것이 통계학 교실에서 들을 수 있는 표준적인 생각들이다. 이런 종류의 추리에 있어서 그 동전이 유기체와 비슷한가 또는 시계와 비슷한가 아니면 다른 어떤 것과 비슷한가 하는 점은 전혀 무관하다. 개연성은 유비와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성립하는 것이다.

이제 설계 논증에 대한 흄의 두번째 비판을 보자. 이것도 첫째 비판 이상으로 성공을 거두지는 못한다. 그는 관찰된 결과로부터 그것의 원인을 추측해가는 추리는 귀납에 기반을 둘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샐리가 팔에 발진이 생겼다고 하자.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그녀가 넝쿨옻나무를 만졌다고 추리한다. 흄은 이렇게 결과에서 원인으로 가는 추리는 그 사태에 앞서서 그러한 발진이 보통 넝쿨옻나무에 노출됨으로써 야기된다는 지식이 있어야만 합당한 것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귀납 논증이 강한지 약한지는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우리가 발진을 단지 몇 번 겪었고 그 대부분이 넝쿨옻나무에 닿아서 생긴 것임을 관찰하였다면 샐리의 발진이 넝쿨옻나무에 닿아서 생긴 거라고 결론짓는 것은 좀 약한 추리일 것이다. 반면에 우리가 발진을 무수히 많이 보았고 넝쿨옻나무가 그 모든 발진을 일으켰음을 안다면 샐리의 발진이 넝쿨옻나무 때문이라는 우리의 주장은 꽤 견고한 기반을 갖고 있는 셈이다.

흄의 생각은 어떤 추리가 강하냐 약하냐를 결정함에 있어서 견본의 크기가 중요한 요소라는 현대의 개념과 일치한다. 흄은 이러한 고찰이 설계 논증에 적용되면 결정적인 함축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만일 우리 세계의 유기체들이 지성적인 설계의 산물이라는 생각이 잘 정당화되려면 우리는 많은 다른 세계를 보고, 거기서 지성적 설계자들이 유기체들을 만들어내는 것을 관찰하였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세계를 얼마나 보았는가? 그 대답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귀납 논증은 가능한 귀납 논증 중에서도 최고로 약하다. 견본 규모가 제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다시, 최선의 설명에로 가는 추리는 흄이 정한 규칙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점에 주의하자. 예를 들어서 백악기 말엽에 발생한 대량 멸종은 커다란 운석이 지구와 충돌하여 거대한 먼지 구름을 일으켜서 일어난 것이라는 알바레스(Alvarez et al 1980) 등의 제안을 생각해 보자. 이것이 그럴법한가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할 여지가 많다(야블론스키(Jablonski 1984)를 참조할 것). 그러나 우리가 "다른 세계에서" 운석 충돌이 대량 멸종을 일으키는 것을 목격한 적이 없다는 것은 전혀 무관한 얘기이다. 최선의 설명에로 가는 추리는 견본을 토대로 추리하는 귀납적인 논증과는 다르다.

흄은 설계 논증에 대하여 다른 비판도 가하였다. 그러나 이것들은 지금까지 살펴본 두 가지보다 더 나을 게 없는 것들이다. 흄이 자신이 논하는 현상에 대한 어떤 진지한 대안적 설명도 갖고 있지 못했다는 것도 부분적으로 문제가 된다. 대신할만한 설명이 전혀 없이 설계 논증을 물리친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서 지성적 설계자의 가설이 부정합적 즉 자기 모순적이라면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논증에 그런 결함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설계 논증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 무작위적인 물리 과정이었을 당시에 지성인들이 설계 논증을 강력하게 옹호하였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다아윈은 이 문제를 둘러싼 논쟁의 풍토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그의 자연 선택에 의한 진화 가설은 세번째 가능성이다. 그것은 어떤 지성적 설계도 요구하지 않으며, 또 자연 선택은 "무작위적인 물리 과정"이 아니다. 개연성의 고려는 무작위성에 비하여 설계를 선호한다. 그러나 개연성이 과연 자연 선택에 의한 진화보다 설계를 선호할 것인가 하는 점은 이제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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