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 짚더미속의 공룡

초보안티들에게 엄청난 날개를 달아 줄 창조과학회 허접사기자료에 대한 반박게시판입니다

[진화] 짚더미속의 공룡

엑스 0 2,751 2002.07.14 09:00
제 목:[진화] 짚더미속의 공룡

보낸이:이혜경 (readex1 ) 1999-03-27 10:01 조회:106 1/33 ───────────────────────────────────────

1. 이 글은 스티븐 제이 굴드의 과학 에세이 "Dinosour in a haystack"을 동명의 저서에서 완역한 것입니다. (물론 저작권이 없으므로 상업적으로 이용할 수 없으며, 정식 번역본이 나올 때까지의 한시적 목적으로 번역된 것입니다.)

2. "신의 주사위 놀이"보다도 더 심한 진화에 있어서의 "신의 구슬치기"를 감상하실 수 있읍니다. 우연과 필연과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3. 실제로 과학적으로 규명된 진화론속의 "격변론"을 다루고 있읍니다.

성경에 기록된 노아의 홍수와 비교해도 뒤짐이 없을 만한 생태계의 "격변"입니다. 과학자들이 자신과 다른 의견을 검증하고 증명해나가는 과정도 눈여겨 볼만합니다.

4. 보통 같은 주제를 가지고도 굴드의 결론은 훨씬 따뜻하고 인간적이지만, 좀 예외적으로 이 글의 끝에서는 자연이 주는 교훈을 무시하는 이들에게 시니컬한 조소를 던집니다.

5. 굴드는 곧잘 다윈이 점진적 관점을 강조한 것이 잘못이라고 말합니다.

다윈이 잘못이라는 관점에 대해서는 사실은 약간의 변론이 필요합니다.

굴드는 다윈의 "점진성"의 강조가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반면에 다른 이들은 다윈 당시의 "연속성(진화론)"과 "멸종과 새로운 창조(반진화론)"의 대립에 있어 다윈이 "연속성"에 중점을 둔 것이지, 진화의 속도의 변화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읍니다. 그런 관점에서는 굴드등이 자신들의 이론을 부각시키기 위해 다윈을 무고하게 깎아내리는 세속적 스캔들주의를 사용했다는 비난이 있기도 합니다. 리처드 도킨스의 "눈먼 시계공"의 "제9장 구분론에 구멍을 내다"를 읽어 보시면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다윈이 부정한 격변은 "모든 생물이 멸종하고, 새로운 생명이 창조"된 것에 대한 것이지, "많은 생물이 급작스럽게 멸종했지만, 나머지의 생물들이 연속성을 지키며 살아남은 것"에 대한 부정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시말해 다윈의 시대는 "점진적인 연속성을 가진 진화 vs. 격변에 의한 전생물의 멸종과 새로운 창조"의 대립이었으며, 80년대 이후는 "단속평형론 vs. 점진론"의 대립이었읍니다. 현대의 관점으로 다윈의 점진론에 대한 강조가 잘못이라고 하는 것에는 확실히 문제의 여지가 있읍니다. 그러나 다윈 이후의 고생물학자들이 "점진적 변화"라는 고정관념에 갇혀서 진화의 속도의 변화에 주목하지 못했다는 굴드의 지적은 옳을 것입니다.

6. 글을 번역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읽고 즐기는 것보다 10배는 힘이 드는군요.

번역상의 오류가 있으면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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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더미속의 공룡(Dinosaur in a haystack)

-- 스티븐 제이 굴드 --

 

패션 산업은 우리의 가장 개인적 공간으로부터 자신을 나타내려는 우리의 요구위에서 번성한다. 전형적으로 옷차림에 신경쓰는 것을 경멸하는 학계에서는 (실제로는 항상 그렇지도 않지만), 사무실의 출입문이 같은 기능을 제공한다. 교수실 복도는 깊은 믿음과 강한 신념의 증언들로 장식되어 있다. 전문가들로서, 우리는 길고 장황한 선언에 걸맞는 명성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무실문은 유머나 격언같은 보다 부드러운 것으로 대변된다. 이러한 쟝르의 전형은 만화나(개리 라슨은 과학계 출입문들의 변치않는 넘버원이다), 권위자들의 인용구이다.

[역주: Gary Larson은 유명한 만화가로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면 쉽게 그의 작품을 볼 수 있읍니다. 다음의 web site가 그 중 하나입니다.

http://www.mathematik.uni-marburg.de/~hampel/larson/larson.html ]

어쨋든, 나는 내 마음이나 영혼에 아주 근접한 다른 사람의 총명함을 붙여놓지 못했다. 나는 흰색 티셔츠를 입으며, 비록 개리 라슨의 Far Side 콜렉션의 하나에 서문을 쓰기도 했지만, 나는 그의 명석함으로 내 사무실문을 확인하지는 않을 것이다[역주: Far Side는 개리 라슨의 대표적 작품집의 이름]. 그러나 나도 좋아하는 인용구는 하나 가지고 있다. 광적으로 좋아할만하고, 지붕위에서 고함치기에도 적당하다(만일 출입문에 새겨놓을 것이 아니라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구절은, 물론 다윈이 말한 것으로, 약간의 해설이 필요하다. 18세기 후반의 지질학은 대부분이 안락의자에서 만들어진, 모든 것에 대한 광범위한 추측, 즉 가장 알기 쉬우면서도 거의 비현실적인 "지구에 대한 이론"이라는 물결속에 휩싸여 있었다. 19세기 초에 영국지질학협회가 출범하면서, 창립 회원들은 그들의 학회로부터 이론적 논의를 금지함으로서 이 명백한 바보짓에 과잉반응을 보인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지질학자란 먼저 직접적 관찰에 의해 지구의 역사에 대한 사실들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나서, 축적된 정보가 충분히 모아진 훗날의 어떤 시점에서야 비로소 이론과 설명으로 옮겨가야 한다."

과학의 유익한 과정에 대한 날카로운 이해력을 갖고 있던 다윈은, 직감적으로 이론과 관측은 샴 쌍둥이[역주:몸은 하나이고 머리가 둘인 쌍둥이]이며, 불가피하게 엮여있고 끊임없이 교류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경력이 무르익어가던 1861년에, 헨리 포셋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윈은 초창기 지질학자들의 잘못된 관점에 대해 상기했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는 합당한 과학적 과정에 대한 그 자신의 개념을, 글로 씌여진 가장 훌륭한 단문으로 요약했다. 마지막 문장은 나의 정신의 문에 지워지지 않는 인상을 남겼다.

약 30년전에 지질학자들은 단지 관측만 하고 이론화해서는 안된다는 많은 얘기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누군가가 이렇게 말한것을 잘 기억하고 있다 - 이런것이라면 차라리 자갈밭에 들어가서 조약돌의 수를 세고 색깔을 기술하는 편이 낳을 것이다. 만일 어딘가 사용될 것이라면 모든 관찰은 어떤 관점을 지지하거나 부정해야 한다는 것을 누구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요점은 명백하다. 임마뉴엘 칸트는 그의 유명한 구절에서 지각없는 개념은 공허하고 개념없는 지각은 맹목이라고 했다. 세상은 너무나 복잡하다.

어째서 우리가 가진 도구의 단지 절반만으로 이해하려고 고생해야만 할까.

우리의 정신을 아이디어와 함께 동작시키자. 우리의 감각들이 정보를 모으도록 하자. 그리고 필요하다면 풍부한 상호작용을 시키자. (정신은 지각이 모으는 것을 진행시키 때문이다. 반면에 모든 외부 입력이 단절된 분리된 두뇌는 진정으로 불쌍한 기구에 불과하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이론에 앞서 사실을 강조하는 독특한 고집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다윈은 이 이상한, 그러나 효과적인 신화에 반발하기 위해 포셋에게 글을 썼다. 과학자들은 종종 과학적 방법이라 불리우는 잠정적으로 보편적인 과정에 내포된 "객관성"이란 독특한 형태를 요구함으로서 특별한 지위를 얻으려 애쓴다. 우리는 모든 지각의 마음을 비운 다음, 순수하고 억눌리지 않은 방법으로 자연이 제공하는 것을 단순히 바라봄으로서 이런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다. 이런 모습에는 현혹될 수도 있지만, 그런 요구는 현실과 동떨어져 있으며, 극단적으로 교만하고, 부조화스러운 것이다. 순수한 지각에 대한 미신은 과학자들을 모든 다른 분투하는 지성위의 정상에 놓지만, 그들은 문화와 정신의 제한에 오염된 채로 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세상의 거대한 복잡성은 개념 없이는 결코 얻어지거나 정돈되지 않기 때문에, 미신의 추종자들은 결국은 상처받고 제한받는다. "모든 관측은, 만일 어딘가 쓰여질 것이라면 어떤 관점을 지지하거나 부정하여야만 한다." 객관성은 마음을 비우는 것으로는 얻어질 수 없으며, 세상이 반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 다윈이 말한대로 어떤 관점을 지지하거나 부정하는 어떤 선호들을 기꺼이 버림으로서 얻어진다.

이론과 관찰의 상호작용의 필요성에 대한 이 다윈의 주제는 독창적인 이론의 가치를 택하는 과학자들의 기준으로 볼 때 큰 지지를 얻는다. 분명히, 우리는 독창적인 이론들을 통상적인 "중요한" 이유때문에 좋아한다. 그것은 그 이론들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해석을 바꾸고, 우리로 하여금 사물들을 다르게 질서시키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일하고 있는 어느 과학자에게 물어보더라도, 아마 이런 것과는 다른 답을 얻을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일상적 생활의 작은 것들과 리듬에 너무 바빠서 궁극적인 것을 자주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독창적 이론이 관측을 하는데 새롭고, 색다르고, 다루기 쉬운 길을 제공하기 때문에 좋아한다. 색다른 질문들을 던짐으로서 훌륭한 이론은 우리의 일상적 행동의 범위를 넓힌다. 이론들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화제가 되는 생각을 지지하거나 부정하는 자료와 관련있는 것틀을 찾도록 한다. 자료는 이론을 판결하지만, 이론 역시 자료에 영감을 넣거나 유도한다. 칸트와 다윈은 둘 다 옳았다.

내가 인용문들 중에서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것을 들고나온 이유는 나의 전공인 고생물학에서, 이론이 어떤 테스트를 요구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수집해보려는 생각이 없었던 자료에 의해 이론이 검증된 좋은 경우를 최근에 목격했기 때문이다. (테스트를 요구하는 것과 결과를 보장하는 것의 근본적인 차이에 주목하자. 테스트는 실패할 수 있으며, 이론을 사장시킬 수 있다. 좋은 이론은 도전을 부르지만, 결과물에 편견을 가하지 않는다. 이 경우에는 테스트가 두 번 성공했으며 이론은 힘을 얻었다.) 아이러닉하게도, 이 특정한 새 이론은 다윈 자신에 대한 부정적 판결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상냥하고 관대한 그가, 이론과 관측에 대한 그의 일반화의 너무도 좋은 보기와, 너무도 흥미있는 내용을 담은 발상에 대한 즐거움의 댓가로 그 판결을 기꺼이 받아들이리라 생각한다.

우리는 현대 고생물학의 시작과 함께 짧은 지질학적 시간 동안 상당수의 생명들이 멸종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96퍼센트의 해양 무척추 생물들이 2억2500만년전 후기 페름기 사건때 사라졌다. 이 "대량 멸종"은 원래, 말그대로 상식적인 방법으로, 격변에 의한 것이며 따라서 진정으로 급작스러운 것이라고 설명되었다. 다윈의 점진적 진화론이 이 초기의 격변론을 대체하면서, 고생물학자들은 대량 멸종의 증거를 다윈의 느리고 착실함이라는 선호에 보다 취향이 맞는 해석으로 완화시키기를 추구해 왔다. 확연한 멸종의 기간은 부정되지 않았으며, 그런 증거에 직면해 있으므로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진정하고 희귀한 격변의 부과라기 보다는 좀더 시간적으로 펼쳐져 있으며 효과적으로 덜 강렬하고, 보통의 과정의 밀집정도로만 짧다는 것으로 재해석되어왔다.

종의 기원(1859)에서 다윈은 "격변에 의한 일련의 기간들에서 지구상의 모든 종이 사라져간 옛 개념"을 거부했으며, 이것은 생명이 시작되기 위해서 새로운 창조가 다시 있어야 한다는 반진화적 함축과 함께 완전한 종말이라는 극단적인 관점에 대해서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점진론에 대한 다윈 자신의 선호는 똑같이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종들과 종의 그룹들이 점차적으로 차례차례, 처음에는 한군데서 다음은 다른데서 그리고 전세계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 믿을만한 모든 이유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다윈은 명백한 예외를 인정했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에는, 제2기끝의 가까이서 암모나이트가 그랬던 것처럼, 생물의 전체 종류의 멸종이 놀라울 정도로 급작스럽기도 하다."

이제 이 에세이에 영감을 준 중심적 아이러니에 접근하고 있다. 다윈의 대량 멸종에 대한 점진론적 관점이 우세하던 기간에서는, 고생물학의 자료들은, 있는 그대로 해석해서, 점진론의 기본적 전제를 논박할 수 없었다 - 바로 경계 그 자체에서 소멸이 날카로운 집중을 보이는 대신에, 멸종의 "분산"은 경계의 시간에 근접해서 충분히 긴 시간대를 가지고 있었다.

지질학적 기록은 매우 불완전하기 때문에, 살아있는 생물중 극히 일부만이 화석이 된다. 이러한 불완전의 결과로, 진정으로 급격하고 동시적인 많은 종의 멸종조차 화석기록에는 점차적인 쇠퇴로 기록될 수 있다. 이 주장은 매우 역설적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다음의 논증과 상황을 생각해보자:

어떤 종은 매우 일반적이고 매우 쉽게 화석으로 보존된다: 평균적으로, 우리는 매 인치마다의 지층에서 표본을 찾는다. 그러나 다른 종은 희귀하고 제대로 보존되지 않아서 매 100피트정도마다 그들의 화석과 만날 수 있다. 이제 400피트의 해상층이 대양 바닥에 퇴적된 후 모든 이런 종들이 동시에 갑자기 죽었다고 가정해보자. 우리가 이러한 대량 멸종의 직접적 증거를 찾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 - 즉, 모든 종의 화석이 400피트의 지층에 걸쳐 맨 꼭대기까지 있을 수 있을까? 물론 아니다.

일반적인 종류는 지층에서 흔할것이며, 퇴적물의 매 인치마다 그들의 화석이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희귀한 종은 비록 끝가지 살아 있었더라도, 그들은 단지 100피트정도 마다의 화석으로만 이바지할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희귀한 종은 400피트를 통해서 줄곧 살아있을 수 있었지만, 그것의 마지막 화석은 맨 윗 경계보다 100피트 아래에 뭍여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희귀한 종이 경과된 전체 기간의 4분의 3이후에 사라졌다고 잘못 가정할 수 있다.

이 논증을 일반화하면, 희귀한 종일수록, 그 종들이 실제로 최상층 경계까지 실제로 생존했다고 하더라도 마지막 화석은 더 오래된 층에서 나오기 쉽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종들이 한번에 죽더라도, 희귀한 종이 맨먼저, 그리고 일반적인 종은 바로 윗 경계까지 일정하게 존재하면서, 멸종에 대한 여전히 계층화되고 명백히 점진적인 순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물은 겉보기와는 다르고, 있는 그대로의 생김새는 종종 진실을 가로막는다는 오래된 원리의 고전적인 보기인 이 현상은, 이름까지 가지고 있다: 시그노-립스 효과. 말그대로의 소멸이 어떻게 급격하고 동시적인 멸종을 나타낼 수 있는지에 대하여 처음으로 수학적 세부사항을 연구한 나의 두 고생물학 동료인 필 시그노와 제어 립스를 예우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이제 우리는 관측을 이끄는 이론의 필요성에 대한 다윈의 논증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신화에 의하면, 오래된 이론은 새로운 관측이 그것을 파행시킴으로서 사망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너무도 자주, 이론은 관측을 지지하는 쪽으로 전환시키고 잠재적으로 논박하는 자료를 방해하는 구속복의 역할을 한다. 그런 이론은 부정할 관측을 개념화 할 수 없기 때문에 안으로부터 거부될 수는 없다. 대량 멸종에서 다윈의 점진론을 받아들인다면, 따라서 시그노-립스 효과에 의해 화석 소멸의 계층적 순서가 실제로 급격한 싹쓸이란걸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어떻게 격변적 대안에 대해 고려라도 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표본 수에서 점진적 감쇄를 증명할 "굳건한" 자료를 가지고 있다고 잘난척 만족해 있을텐데 말이다.

해리 후디니가 문자그대로의 구속복에 작용했던 것처럼, 새로운 이론은 이 개념적 자물쇠에 작용한다. [역주: 해리 후디니-아주 유명했던 마술사] 우리는 새로운 이론을 끌어들이고 무엇이든 참신한 전망이 제안할 수 밖에 없는 다른 종류의 관측을 수행함으로서 거기서 탈출할 수 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다윈적 모토에 대해 추상적 요점만을 제안하거나 손만 흔들고 있으려는 것은 아니다. 같은 메세지를 가진 두개의 사랑스러운 보기가 내 가까운 동료 둘에 의해서 최근에 발표되었다: 마지막 대 멸종에 대한 암모나이트와 공룡에 대한 연구들이다.

과학에서 화제가 되는 분야의 언론 발표를 주목하는 누구라도, 대량 멸종에 대한 새로운 격변론이 지난 십년간 고생물학계를 조명했다는 것을 (그리고 타임지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역주: 저도 주로 사람얼굴이나 등장하는 타임지 표지에 공룡위로 혜성이 날아가는 상상도가 실렸던 것을 기억하고 있읍니다. 제목은 "혜성이 공룡을 멸종시켰다?" 였을 것입니다. 부제로 다윈의 진화론에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내용도 있었읍니다. 당시에 진화론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은 없었지만, 어째서 한번의 격변이 있었다고해서 변이와 자연도태에 대한 다윈의 이론이 수정 되야 하는지 의아해 했었읍니다. 그리고 그 의아함은 당연한 것이었읍니다.

다윈이 틀렸다는 관점은 당시의 언론플레이로 다소 과장된 것입니다.] 1979년에 물리학자-지질학자 부자인 루이스와 월터 알바레즈 팀은 프랭크 아사로와 헬렌 미셸과 함께, 가장 최근의 대량 멸종이자 공룡과 함께 50%의 해양 무척추 종들이 사라진 백악기-제3기[역주:중생대와 신생대의 경계] 멸종의 원인으로서 운석이나 혜성의 외계적 충격에 대한 논증과 지지 자료를 발표했다.

이 제안은 한 페이지로는 요약이 불가능하고 전체 에세이로도 부족하며, 한권의 책으로도 모자랄 정도의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 외계로부터의 충돌이라는 발상은 폭풍을 훌륭하게 견뎌냈고 계속해서 힘과 지지하는 증거를 얻었다고 말하는 것이 공정할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는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부정하는 과학자들은 거의 없고, 이 충돌이 완전한 멸종의 원인인지(혹은 이미 진행되던 과정에 일부로만 작용한 것인지), 그리고 다른 대량 멸종이 비슷한 원인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것으로 논쟁의 중심이 옮겨져 있다.

그러나 아주 적은 예외를 뺀다면 고생물학자들은 처음에는 (최소한)부정적으로 반응했었다 - 그리고 전형적으로 자기 확신에 가득찬 물리학자의 가상적 모델인 루이스 알바레즈는 억눌러 두기에 적합했다. (회상해보면, 루이스는 대부분 옳았으며, 따라서 나는 내 전공에 대한 그의 비난을 용서한다.

좀 잘난척을 해 본다면, 나는 그의 몇 안되는 지지자에 속해있었지만, 그것은 증거들에 대한 정확한 통찰에 의한 올바른 이유에서는 아니었다. 격변적 멸종은 단속평형설의 논쟁에서 태어난 속도성에 대한 나의 특이한 선호와 단순히 잘 맞았기 때문이다-에세이 8을 보라) 결국 나의 동료들은 다윈적인 점진론을 한세기 동안 지지해왔으며, 그대로 해석해서 화석기록은 경계전에서 대부분의 그룹이 사라진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였다. 만일 대부분의 종들이 이미 죽은 상태라면 어떻게 충돌이 멸종의 원인이 될 수 있을까?

그러나 외계로부터의 충돌이론은 곧, 아무도 오래된 관점에서는 생각지 못하던 새로운 관측의 유도라는 다윈적 기준에 의해, 가장 고상한 방법으로 그 열정을 증명했다. 간단히 말해 그 이론은 스스로의 테스트 방법을 만들어 냈으며, 이전까지의 확실함이라는 구속복을 찢어버렸다.

내 동료들은 숨김없이 알바레즈 가설을 싫어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우리는 명예를 존중하는 무리들이며, 논쟁이 심화되고 선호하는 증거들이 축적됨에 따라, 고생물학자들은 과거의 확신을 다른 눈으로 볼 수 밖에 없었다. 많은 새로운 관측들이 이루어졌지만, 가장 단순하고, 가장 명백하고, 있는 그대로의 보기에 촛점을 맞추어보자. 충돌과 갑작스런 종말이라는 새로운 권위의 광명을 받아 시그노-립스 효과가 충분히 인식되기 시작했고, 고생물학자들은 격변적 파괴가 화석에는 점진적 감쇠로 기록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소멸에 대한 불확실한 겉모습에 대한 난관을 해결할 것인가? 보다 더 정교하고 수학적인 많은 과정들이 제안되고 시도되었지만, 왜 가장 직접적인 방법으로 시작하지 않는 것일까? 만일, 희귀한 종들이 실제로 충돌 경계 끝까지 살았지만 가장 윗 지층에서 기록되지 않은 것 뿐이라면, 왜 전체 구간을 더 철저히 보지 않는 것일까? 일반적인 비유와 분명하게 닮은 점이 바로 그것을 제안한다. 만일 짚풀더미에서 바늘 하나를 찾기 위해서 단지 주먹으로 열 웅큼의 짚풀속에서만 찾는다면 목표물을 찾아낼 확률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전체 더미를 놔두고, 한 올, 한 올 짚풀을 옮기며 뒤진다면, 바늘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알려진 모든 지역의 매 인치 마다의 지층을 진짜로 찾는 다면, 가장 희귀한 종이라고 할지라도 경계 바로 부근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만일 그것이 실제로 존재했던 것이라면.

이 모든 것은 너무도 명백해 보인다. 이러한 접근이 알바레즈 가설 이전에는 개념화된 적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점진론의 이상적 눈가리개가 몇 웅큼의 짚풀을 표본 조사하기 보다는 전체의 짚더미를 찾는 상상을 불가능하게 했다고도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경우는 전체의 모든 지층의 특징을 통해 정확한 호소력을 갖는다. 나는 독창적인 이론들이 완전히 다른 새로운 세계에 대한 관측을 개막시킨 많은 환상적인 실례들을 언급할 수 있다.

갈릴레오의 망원경과 그것이 노출시킨 모든 불가능한 현상들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 경우, 알바레즈 이론은 단지 죽도록 일하는 것 이상은 거의 제안하는 것이 없다.

그럼 어째서 이런 노력이 전에는 없었을까? 고생물학자들은 산업적인 무리들이다. 우리가 많은 단점들을 가지고 있을지는 몰라도, 이 분야에서는 게으름이란 있을 수 없다. 우리들은 화석을 찾아내는 것을 사랑한다 - 그것이 우리들의 대부분이 처음에 이 분야로 들어온 이유이다.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과학적 이유를 따라서, 모든 지층을 뒤지지는 않는다. 인생은 짧고 세상은 넓다; 단 하나의 절벽면에 붙어서 스스로의 경력을 낭비할 수는 없다.

과학의 정수는 지능적인 표본추출에 있지, 한 곳에 앉아서 마지막 하나까지 모든 것을 얻으려 애쓰는 것이 아니다. 다윈적 점진론하에서는, 지능적 샘플링은 짚풀더미로부터 한 웅큼을 취하는 일상적인 방법을 따른다.

그렇게 얻어진 결과는 이론의 예측과 들어맞았고 개념적 만족(뒤돌아 본다면 "게으름"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이 정착된다. 과학적으로는 상당히 비정상적 접근인 전체 짚풀더미의 해체라는 훨씬 노동적인 일을 위한 어떤 자극도 존재하지 않았다. 뒤지는 일을 할 수도 있었지만 우리는 그러지 않았으며 그래야할 이유도 없었다. 알바레즈 이론은 이 비정상적 접근을 필요로 하게끔 만들었다. 새로운 발상은 우리로 하여금 전혀 다른 방법으로 관측을 하게 만든다. "만일 어딘가 이용될 것이라면, 모든 관측은 어떤 관점을 지지하거나 부정해야만 한다."

백악기-제3기 멸종때 사라진 가장 잘 알려진 해양 그룹과 육상 그룹이라는 두 가지 최상의 보기를 고려해보자: 바로 암모나이트와 공룡이다. 둘 모두 경계를 향한 점진적 멸종의 근거로서 주로 인용되어 왔다. 각각의 경우에, 알바레즈 가설은 1인치씩 전부를 뒤지는 방법으로 보다 자세한 관찰을 하도록 영감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이런 대단히 꼼꼼한 방법은 경계까지 지속적인 잠재적으로 격변적 사망에 대한 증거를 산출했다.

암모나이트는 살아있는 가장 가까운 친척인 앵무조개와 닮은 나선형 껍질을 가진 두족류(오징어와 문어와 같은 그룹으로 분류되는 연체동물)이다.

암모나이트는 해양 포식동물중 출중한 것이었고 때로는 지배적 위치에 있었으며, 아름다운 화석 껍질은 언제나 수집가들에게 찬미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고생대 중반에 등장해서 전에도 두번이나 멸종의 위기를 겪었다 - 페름기 말기와 트라이아스기 종단의 두번의 다른 대량 멸종이 그것이다.

그렇지만, 백악기-제3기 경계에서는 모든 계보가 무너졌으며 워즈워드[역주: 시인인 윌리엄 워즈워드를 가리킴]의 말을 빌어보면 "지상에서의 영화가 사라졌다."

내 친구이자 동료인 워싱턴 대학의 고생물학자 피터 워드는 암모나이트 멸종에 대한 세계적인 전문가중 한 사람이며, 야외작업의 숭배자이자 발굴작업에서는 결코 게으름에 대한 비난이 불가능한 열정적이고 인정받는 사람이다.

피터는 처음에 알바레즈에 대해 크게 신경쓰지 않았고, 그것은 그가 좋아하는 발굴지인 스페인의 비스캐이만에 있는 주마야 절벽에서 그의 암모나이트들이 경계의 밑 약 30 피트정도에서 서서히 그리고 완전히 사라지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1983년에 피터는 Scientific American지에 "암모나이트 의 멸절"이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그는 알바레즈 이론에 반대를 표명하면서, 최소한 암모나이트의 죽음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는 새로이 부정되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화석기록이 제시하는 것은 암모나이트의 멸절은 격변의 결과가 아니고 마지막 백악기의 해양 생태계의 갑작스런 변화에 의한 것이다...

스페인의 주마야의 지질 단층의 화석연구는 그것들이 운석채의 충돌로 제안된 시점보다 오래전에 멸종했다는 것을 제시한다.

그러나 피터는, 내가 아는 가장 명석하고 존경할 만한 인물중 한 사람으로서, 그러한 "부정적 증거"의 한계를 역시 인정했다. 어떤것을 발견하지 "못한"것에 근거한 결론은 애매한 잠재적 반박의 가능성을 크게 제공한다. 피터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것은 부정적 증거이며, 하나의 새로운 암모나이트 표본의 발견으로 뒤집힐 수 있다."

충돌가설이 아니라면, 피터는 상부 30피트의 구역을 조사할 어떤 이유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멸종은 점진적이라고 가정되었으며, 암모나이트가 사라진 30피트는 완전히 일리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더 찾아보야만 할까? 그렇지만 충돌 가설은 암모나이트의 생존이 바로 경계 그 자체까지임을 명확히 예측하고 있으며 30피트의 짚풀더미에 대한 보다 철처한 검색을 요구했다.

1986년에도 피터는 순서적인 소멸을 여전히 강조했다: "암모나이트는...

이 반층에서 K/T(백악기-제3기) 경계보다 전에 멸종한 것으로 보이며, K/T 멸종에 대한 점진적 관점을 지지한다."

그러나 피터와 그의 야외 파트너들은, 알바레즈로부터 영감을 받아(단지 충돌 가설이 틀렸음을 증명하려는 희망으로), 짚더미를 통한 작업을 벌였다: "백악기의 남은부분은 잘 노출되어 있으며, 맹렬하게 뒤지고 파헤쳐 졌다." 마침내 1986년 말에 그들은 단지 경계밑 3피트 지점에서 하나의 표본을 찾아냈다. 그 화석은 파손되어 있었으며, 그들은 그것이 암모나이트인지 앵무조개인지를 확실히 분간할 수가 없었지만, 이 표본은 보다 더 주의깊은 탐색을 요구했다. (앵무조개는 분명히 대량 멸종에서 살아남았고, 지금도 살아있기 때문에, 화석 앵무조개가 바로 경계영역에서 발견된다고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피터는 1987년에 보다 더 강도높은 탐색을 시작했으며, 암모나이트들은 출현하기 시작했다 - 대부분 흔한 종들이, 그리고 매우 희귀한 종들이, 명백히 경계 지점까지 존재했다. 피터는 1992년 초에 발행된 책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마침내, 비가 내리던 어느날, 나는 경계를 나타내는 수인치의 점토층 속에서 암모나이트의 부분을 발견했다. 서서히, 수년간에 걸쳐, 몇개의 더 많은 것들이 주마야의 백악기 지층의 최상부에서 발견되었다.

암모나이트는 결국 아마겟돈까지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서 피터는 명백한 다음 과정을 밟았다: 다른 곳을 조사하는 일이다.

주마야는 암모나이트를 바로 끝까지 포함하고 있었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았다.

그것은 전체적인 풍부함이라기보다 지역적 특성 때문일 수도 있다. 피터는 주마야의 서쪽 영역을 조사했지만 백악기 최후의 암모나이트는 발견하지 못했다(그리고 이것은 그가 초기에 점진적 멸종을 받아들인 또다른 이유였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 그는 야외작업의 범위를 동쪽으로 스페인과 프랑스의 경계까지 넓혔다. (마찬가지로, 이 동쪽 영역도 알려진 곳이 었으며 언제나 연구로 쓰여질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피터는 올바른 질문을 던지고 이러한 폭넓은 관측을 할 이유를 세우기 위해서 알바레즈의 자극이 필요했었다.) 피터는 프랑스의 여피족 해변인 비아리 바로옆의 스페인-프랑스 경계인 헨다예의 두 새로운 구역을 연구했다. 여기서 그는 대멸종 경계선의 바로 밑에서 수많은 풍부한 암모나이트들을 찾아냈다.

1992년의 저서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수년간 단지 극소량의 증거만을 찾아낸 주마야에서의 경험뒤에...

헨다예의 처음 한시간동안 백악기의 마지막 1미터안에서 암모나이트 한점을 발견하고는 나는 너무도 기뻤다.

전문가들인 우리는 암모나이트를 더 관심깊게 생각하지만, 역시 대중적 상상력에 불을 붙이는 것은 공룡이다. 그래서 어떤 주장도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공룡전문가들의 지속적인 주장보다, 알바레즈에 반대하는 논증이 더 출중하고 설득력있지는 못했다. 그것은 한두개의 낙오된 것들을 제외하고 그 거대한 짐승들은 제시된 충돌의 시점조다 오래전에 죽었다는 것이다.

나는 공룡 학자들이, 마지막 공룡이 발견된 곳과 충돌의 경계 사이의 황량한 지층인 "3미터 간격"이라는 기관총을 사용한 것을 잘 기억하고 잇다. 그리고 루이스 알바레즈가 충분히 정당한 이유로 격노했던 것도 기억한다. (나는 내 고생물학자 동료들과 그들의 매우 않좋은 논증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결국 마지막 뼈는 마지막 동물이 아니고, 단지 화석으로 발견되지 않은 마지막 동물들의 마지막 생존을 추정할 수 있는 샘플에 불과할 뿐이다.

만일 내 친구가 바다에 3천개의 병을 던지고 내가 50마일 떨어진 섬에서 하나의 병을 줏었다고해서, 그가 단지 하나의 병을 던졌다고 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그가 병을 던진 시간과 조류의 패턴을 알 수 있다면, 나는 그가 처음에 얼마나 많은 병을 던졌는지 대략적 추측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동물이 화석화될 확률은 확실히 내가 병하나를 발견할 확률보다도 훨씬 적다. 모든 과학은 지능적 간섭이다. 지나친 문자성은 환상이지, 증거에 대한 겸손한 고개숙임이 아니다.

다시, 피터 워드와 암모나이트경우처럼 최상의 임상적 접근을 위해서는, 고함지르기를 중단하고 최후의 백악기 암석의 모든 인치마다에서 공룡뼈를 찾는 짚더미 해체를 위한 대규모의 노력을 조직할 것이 요구되었다.

피터[역주:베드로의 영어발음]는 라틴어로 "바위"를 뜻하며 이러한 이름의 남자는 고생물학자로서의 소질을 타고난 것인지도 모른다. 또 하나의 피터, 즉 내 친구이자 동료인 밀워키 국립 박물관의 피터 쉬핸은 수년동안 그런 과제를 이끌어 왔다. 1991년말에 그는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결과를 발표했다.

공룡은 거의 항상 해양 생물보다 드물며, 이 짚풀더미는 진짜로 한올, 한올 더 넓은 영역에 걸쳐 헤쳐져야 한다. [역주: 상식적인 것이지만, 육상 동물의 화석은 해양 동물의 화석보다 훨씬 희귀합니다.] 국립 과학 재단 및 다른 자금 제공처들은 그 중요성이야 어쨋든간에 실험적인 화려함이 결여된 이런 큰 규모의 과제에 대해서는 간단히 돈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피터(이번엔 쉬핸을 말함)는 영리하게도, 단지 암모나이트 정도가지고는 결코 동원할 수 없는 그의 훌륭한 인력들을 이용했다. 그의 말을 빌어 들어보자:

우리는 밀워키 국립 박물관의 오랜 자원자들로 구성된 "공룡 캐내기" 프로그램과 공조했다. 잘 훈련되고, 밀접하게 관리되는 16명에서 25명까지의 자원자들과 10명에서 12명까지의 관리 회원들이 석달의 여름내내 일곱차례의 2주야외과정동안 결성되었다. 각 자원자들의 주요한 목적은 미리 결정된 영역에서 표면의 모든 눈에 띄는 뼈들을 찾는 일이다. 자원자들은 노출지대에 "수색대"의 모양으로 늘어서며 모든 산출물들은 조직적으로 살펴진다. 야외 집단과 연합된 지질학자들은 지층의 구역을 측정하고 지질상을 확인한다.

나는 지질학적 짚더미를 공격하기 위한 더이상의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고 생각한다. 피터의 사람들은 5만시간의 야외작업을 기록했으며, 백악기 최상층 암석의 공룡화석에 대한 최초의 적절한 표본 추출 작업이 이루어졌다.

노스 다코타와 몬카나의 헬 크 지층에서의 작업을 통해, 그들은 강바닥이나 범람지에서 얻을 수 있는 최상의 증거들과 함께 각각의 환경을 분리해서 연구했다. 그들은 윗쪽의 3번째는 충돌 경계 영역까지 뻗어있도록, 전체 구역을 3부분으로 나누고, 세 단위에 걸쳐 지속적인 감쇠가 있었는지, 운석이 충돌할때에 이미 소멸된 군이 있는 지를 조사했다. 여기서도, 나는 그들의 간명한 결론을, 그토록 많은 노력에 대한 요약과 함께 직접 인용하겠다:

하단, 중단, 상단의 지층에서 주목할 만한 변화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공룡의 환경에 대한 부분이 백악기 말기에 변화하고 있었다는 가설을 부정한다. 이 발견들은 갑작스런 멸종의 시나리오와 잘 일치한다.

사람들은 언제나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래서? T.S. 엘리옷[역주:시인]은 틀렸다; 최소한 어떤 세상은 흐느낌이 아니라 폭음과 함께 끝났다." 그러나 그런 구별은 큰 차이를 만든다. 그것은 폭음과 흐느낌은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피터 워드는 불필요한 암모나이트의 죽음에 대해 그의 마지막 문장에서 올바른 주제를 얘기했다: 그들의 역사는 너무도 독특하고 현명한 적응의 예로서 그들은 매우 폭넓게 어딘가 살아있어야만 한다. 앵무조개는 그랬다. 내 편견으로는 암모나이트는 6600만년전 세상을 바꾼 격변에서 살아있어야 한다.

오랜 역사동안 그들은 지구가 그들에게 가했던 모든 것을 견디고 생존했다. 따라서 최후에 그들을 끝장낸 것은 지구가 아니라, 아마도 바깥 세상에서 온 어떤 것일 것이다.

진짜 속물들은 여전히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래서? 만일 충돌이 없었다면, 암모나이트나 앵무조개는 둘다 여전히 살아있겠지. 그게 어쨋다고? 난 이 글을 읽기 전에는 앵무조개에 대해선 들어본 적도 없는걸." 공룡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관심을 가져보자. 그들의 계속된 활력적인 다양함을 제거시킬 어떤 충돌도 없었다면, 아마도 그들은 지금까지 생존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그들은 1억년이상을 잘 번성해왔으며 지구는 그 이후로 겨우 6500만년이 더 지났을 뿐이다.) 만일 공룡이 살아있었다면, 포유류는 거의 분명히 작고 별볼일 없는 채로 지내왔을 것이다. (공룡의 지배하에서의 1억년동안의 포유류가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포유류가 그렇게 작고, 제한되고, 의식이 부여되지 않았다면, 분명히 그런 무관심을 나타낼 어떤 인간도 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자신의 아들에게 피터라는 이름을 짓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한 하늘과 지상에 대해 궁금해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한 과학의 본질이나 사실과 이론의 적합한 상호작용에 대해 숙고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너무 멍청해서 그럴 시도조차 못했을 것이다.

다음 끼니를 훔치기에 바쁘고, 끔찍한 벨로시렙터로부터 도망다니기에 바빴을 것이다.

 
 

<br><br>[이 게시물은 (ㅡ.ㅡ)님에 의해 2005-07-29 12:44:10 창조잡설 비판(으)로 부터 이동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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