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머리를 가진 셈족계열 유대인 과 한국인의 유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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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머리를 가진 셈족계열 유대인 과 한국인의 유사성

ever 3 6,892 2008.10.13 22:07
노아의 세아들 셈 함 야벳 이 세 아들로 전세계인종이 나뉜다고 하는데요
 
셈은 동양인의 선조요
함은 흑인의 선조요
야벳이 백인의 선조라 고 하는데요
 
이 인종 분류는 최고큰폭의 인종분류이고
 
사실 혼혈이 많았다는것도 인정되는데요
 
노아의 벌거벗고 술취한 모습을 보고 함(흑인의선조)가 노아를 조롱하니깐
 
노아가 함을 저주하여 그후손들이 야벳과 셈의 노예가 되게 하라고했지 않습니까
그래서 함(흑인)종들이 저주때문인지 하여튼 전세계적으로 최고 못살고 번성하지 못한 민족 아니겠습니까?
 
유대인을 큰 인종분류상 셈족 - 히브리인 - 유대인  이렇게 분류하잖아요
근데 유대인이 백인땅에 오랜동안 살아서 백인피도 많이 섞인듯한데
원래 유대인은 흑색 머리 흑색눈의 동양계통에 더가깝죠
 
팔레스타인은 그리스 남부 소돔이 멸망하기전 기원전1000년전에 이스라엘남부로 이동한 이주민이라고 하는데요
야벳족 이라고 하더군요
 
우리 단군신화속에도  구약성경과 비슷한 내용이 많은데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자손이라고 했듯이  우리 한국인도 신의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구약성경의 고대 선조들이 1000년 가까이 고령으로 살았다고 하는데
단군신화에도 고대 선조들은 1000년 가까이 살았죠
오랜 세월 언어가 나뉘어지고 과거의 일이 멀어지다보니 서로 불르는 호칭이 틀려진거지
서로 하나로 연결된 연결 고리가있다고 봅니다
우리 선조인 단군선조도 5000년 역사를 가지고있다고하고
노아의 홍수가 기원전6000년전 역사이니~~~
우리도 그 노아의 세아들 셈족의 한계통에서 출발하지 않아나 생각됩니다
사실 전통 유대인들은 검은눈에 검은머리에  백인종들하고는 확연히 인종적으로는 틀리죠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의 대홍수에대한 기록들 이집트 벽화에 기록된 대홍수에 대한 기록들
이모든것은 자기 조상이 한뿌리이다 보니 한조상한테 듣고 배웠던 그리고 되물림됐던
기록들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보니 전세계전으로 내려오는 신화의 공통성이 많은것이구요
안그렇나요
그리고 우리의 공통선조는 하나죠 아담과 하와가 첫선조이긴 하지만 그후에 노아가 전세계인
공통의 선조가 돼지 않나 생각되는데요
많은 답글 부탁합니다
 
노아의 세아들중
함은 흑인종의 선조
야벳은 백인의 선조
셈이 동양계통의 선조입니다
 
많은분들이 셈이 백인 계통인줄 착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절대 아님을 밝혀 드립니다
 
유대인을 큰 인종분류상 셈족 히브리인 유대인 이렇게 부르는데
유대인은 동양 계통입니다 유대인들이 유럽에 오랫동안 이주해
살면서 백인들과 피가 많이 섞여서
본래의 검은 머리 검은 눈이 혼혈로 많이 섞여서 오해한듯합니다
 
많이 아는 팔레스타인이 야벳 계통인 팔레스타인이 야벳 계통입니다
그리스 남부 크레타 섬의 화산폭발로 기원전 10세기경 이스라엘쪽으로 이주한
이주민이죠
전통 유대인은 검은 머리 검은눈에 동양계통입니다
예수를 갈색머리로 표현한 많은 그림들은 사실은 잘못된 그림들이죠~~서양관점에서
그림을 그려놔서 그렇죠
 
모든 종교는 셈족에서 만들어졌다는 애기가 있죠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회교 기독교 모두 셈족에서 생겨났습니다
 
우리 한국인도 제일큰 인종분류상 셈족계열입니다.
언어학적으로도 이스라엘 히브리어하고 비슷한점이 많습니다
이스라엘쪽 시나위 반도에 그렇게 물이 많이 흘렀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하는 시내 라는 말이 시나위랑 같은 뜻입니다
 
인간의 생활에는 계획이라는 것이 있고 설계라는 것이 있어서, 크든 작든, 개인적이든 공적이든 그 짜여진 계획과 설계대로 일이 진행됩니다.
이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 전에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먼저 있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그 말씀대로, 그 계획대로 실행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면 몇 가지 성경에 나오는 기록과 역사를 관련시켜 보겠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는 이미 역사적인 사실로 입증되었으니 재론의 여지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때 노아의 전 가족은 지상의 물이 줄어들기를 기다리면서 배 안에 있었습니다.
물은 차츰 증발되고 또 그 일부는 강한 바람에 의하여 남과 북으로 몰려 가 얼음 대륙이 되어 감에 따라 점차 육지가 드러나게 되고 방주는 아라랏산에 가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배에서 나와 농사를 짓게 되고 포도원을 재배하고 포도주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노아는 포도주를 과음하여 옷을 벗은 채로 잠이 들었습니다.
노아에게는 셈과 함과 야벳이라는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나체로 잠이 든 노아의 모습을 보고 이 삼형제가 취한 태도는 장차 인류 역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비록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신화처럼 생각되는 작은 일이었지만 지구상의 삼대 종족의 장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둘째 아들 함은 아비의 하체를 보고 형제들이 있는 들에 가서 흉을 보았습니다.
그 말을 들은 장자 셈과 야벳은 옷을 들고 뒷걸음질쳐 들어가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습니다.
노아가 잠에서 깨어 그 사실을 알게 되자 삼 형제의 장래에 대해 각각 예언을 했습니다.
함의 아들 가운데 가나안이란 자가 있었는데 특히 그에게는 노예의 운명이 예언되었습니다.
그 가나안은 지금의 팔레스타인의 옛 주인으로, 그곳을 가나안 땅이라고 하는 것도 그들이 거기에 뿌리박고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이스라엘이 그곳에 들어가 그곳은 이스라엘의 소유가 되었고, 거기에 살고 있던 가나안 족속 중에서 블레셋(현재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아프리카 지역은 성경에 함 땅이라고 해서 함의 후손들이 차지했으나, 역사가 흐르는 동안 그 아프리카 흑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노아는 또 다음과 같은 놀라운 말을 했습니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창세기 9:26)
그런데 왜 셈의 하나님이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셈의 계통에서 나실 것, 곧 하나님의 아들이 셈의 계통에서 탄생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 역시 사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서 시작된 선민은 셈의 계통이며,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모든 계획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성경의 형성, 예수님의 탄생, 구원의 역사, 예수님의 재림, 종말의 역사 등이 전부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이었으므로 셈의 하나님이라고 한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현재의 일본, 한국, 중국, 동남아, 이란 등 인도 이외의 아시아인은 전부 셈의 계통입니다.
그는 또,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서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창세기 9:27) 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전 지구상에 유럽의 백인들이 물질 문명뿐 아니라 정신 문화면에서도 가장 번창한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미주 지역의 인디안은 분명히 아시안 계통이었으나 백인들이 들어가서 모든 권리를 빼앗고 거대한 자원의 나라를 차지했으며 현대 문명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한때는 영국, 포르투갈, 스페인 등이 지구의 상당한 부분을 식민지로 차지했던 적도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창대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셈의 집을 야벳의 계통이 점령해서 살게 된다고 했는데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셈의 계통인 이스라엘 민족 속에 오셔서 구원과 교회라는 집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이상하게도 지나간 2천 년간 그 장막을 야벳의 계통인 백인들이 점령하고 살았습니다.
백인들의 사회는 다른 인종들의 사회같이 잡다한 신을 섬기는 일 없이 2천 년의 역사를 기독교라는 장막 속에서 이어왔습니다.
지금은 물론 종말이 가까이 와서 무신론자들도 많이 생기고, 또 하나님을 불신하는 방향으로 많이 기울어지고 있으나 거의 2천 년 동안 그들은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믿는 분위기 속에서 살았습니다.
또 창세기 10장을 읽어 보면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후예들이 분산해서 간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삼 형제의 후손들의 이름은 각 지역의 지명이 된 것입니다.
야벳의 후손들의 이름은 유럽 지역의 이름이 되고, 함의 후손들의 이름은 아프리카 지역의 이름이 되고, 셈의 후손들의 이름은 서부 아시아 지역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11장에는 시날이란 곳에서 탑을 쌓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시날은 현재의 이라크입니다.
노아의 후손들이 아라랏산에서 내려 동방으로 옮겨 가다가 시날 평지인 유프라테스강 연안에 자리를 잡고 살다가 하나님을 도전하는 탑을 쌓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들의 작업을 중단시키기 위하여 언어를 혼잡하게 했던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는 수많은 인종이 살고 있는데 그 인종마다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언어가 달라지고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된 원인을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책에서 그와 같은 사실과 그 원인을 이처럼 분명히 말한 곳이 있었습니까?
오늘날 지구상에 여러 종류의 언어가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께 도전하려는 인간의 계획을 중단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이 일 이후 인간은 서로 한 마음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죄로 인해 서로 대결하고 싸우게 됨으로써 인간 사이에 교제가 끊기게 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선민의 역사
 
하나님은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존재이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셨고 사람을 통해서 창조하신 목적을 이루어 가셔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사람 편에서 하나님을 알 수 있어야 하고 믿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류 가운데서 대표자를 선정하여, 그들과 함께 관계를 맺으시고, 그들을 통해서 전체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리시고, 인간을 향한 목적을 이루어 가시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인류의 대표자로 선정된 것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그것은 물론 창세 전에 예정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 민족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정체를 나타내시려는 계획을 세우신 것입니다.
이리하여 이스라엘에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나타나신 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의 모든 속성, 신성이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골로새서 2:9)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골로새서 1:15)
사람들은 어떻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하고 의심하거나 부인을 합니다.
그러나 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인간들이 믿을 수 있도록 육신을 입고 인간의 역사속에 나타나시는 것이 왜 불가능한 일입니까?
하나님은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한 민족을 선택한 것입니다.
 
 
마귀는 알고 있었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 이미 말했듯이, 마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 사이에 싸움이 있을 것이며, 결국에는 여인의 후손이 마귀의 후손을 멸망시킬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시면 자신이 멸망당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마가복음 1:24)
이 말은 마귀들린 자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한 말입니다.
마귀는 여인의 후손인 하나님의 아들에 의하여 자기가 멸망당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막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역사속에는 사탄의 마수가 뻗쳐 그 혈통이 끊어질 뻔했던 일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 실례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족보 가운데는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마태복음 1:3) 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유다는 시말의 시아버지 였습니다.
사단의 계획에 의하여 그 후손이 끊어지려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비상한 방법으로 이어가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유다지파에서 나온다는 예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보호 아래서 진행되었습니다.
이 이스라엘은 수없이 많은 원수의 세력에 의해서 공격되었으나 그 때마다 하나님의 특별한 손길에 의해서 구원되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을 탄생시켜야 하는 일 때문에 언제나 멸망하는 데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그 민족 전체에 역사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 속에서 구원을 얻을 사람들의 그림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계획에 파트너로 선택된 민족인 것입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히브리서 1:1~2)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계획과 뜻을 나타내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이 특수한 역사를 이루어 오며 불가사의한 민족으로 등장한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 없는 사실인 것입니다.
 
 
율법을 통한 관계
 
성경을 보면 인류의 역사는 B.C. 약 4천 년경부터 시작되는데,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의 선택까지가 약 2천 년으로서 이 때를 시작의 시대라고 합니다.
그 후 2천 년(예수 탄생까지)간은 선민의 시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탄생 후를 A.D.라고 하는데, A.D. 2천 년간은 교회 시대이며, 재림 후는 천년왕국의 시대가 됩니다.
이렇게 역사는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에 의하여 경영되어 가는 것입니다.
노아의 후손들이 시날이라고 하는, 현재 이라크의 바그다드 근처에서 바벨탑을 쌓아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그 근처 우르라는 곳에서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자기 중심적이며 자기의 영광과 힘을 과시하기 위하여 도성을 쌓던 인간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목적으로 아브라함을 그곳으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세워질 성전을 영원한 천국의 그림자로서, 멸망당할 바벨탑에서 불려 나와 영원한 천국의 도성, 새 예루살렘을 건설할 구원받은 사람들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이 가나안땅에 들어갔으나 아브라함의 생전에는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은 새로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했는데, 그 이스라엘 때에 애굽에 들어가게 되고 4백 년이 지난 후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오는, 유명한 출애굽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 출애굽 때에 홍해가 육지같이 갈라지면서 그 사이로 2백여만 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통과하고 그들을 잡으려고 뒤쫓아 온 바로왕과 그 군대들은 모두 물 속에 잠겨버린 사건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미국의 어떤 학자는 그 때 금성이 태양의 인력권에 돌입하면서 그 인력의 초점이 홍해에 맞추어 졌기 때문에 원자탄 1천 개 상당의 힘이 작용함으로써 홍해 물이 갈라졌다고 합니다.
또 애굽의 피라밋은 거의 모두 발굴되었는데 그 당시의 애굽왕 바로의 미이라는 다른 왕들의 미이라와 완전히 구별이 된다고 합니다.
즉 얼굴의 색깔이 다르고 귀 부분이 뜯겨진 채로 보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사실은 역사적인 사실로 입증되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홍해 건너편 시나이 반도 끝 부분에 있는 시내산 밑에까지 왔을 때에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았는데, 이스라엘 민족은 현재까지 그 율법을 지키면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심으로써 이스라엘이란 선민과 특별한 관계를 맺은 것입니다.
장차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실 예수님을 통해서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하실 목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4)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고 했는데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곧 하나님의 뜻인 말씀이 예수라는 육신 안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병자도 나았고 죽은 자도 살아났으며 바람과 풍랑도 잔잔해지곤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면 사람들이 하나님과 생명의 관계를 맺는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한복음 5:25)
이 약속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 곧 선민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이나 다 함께 참예할 수 있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구약 시대에는 오로지 선민에게만 하나님의 말씀의 지표인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 곧 이스라엘인들은 이방인을 향해 율법도 받지 않은 짐승같은 인생이라고 하며 교만해졌던 것입니다.
 
 
성전의 의미
 
하나님은 성전을 지을 목적으로 아브라함을 불러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히브리서 11:8~10)
그러나 아브라함 때에도, 그 후 아들 이삭 때에도, 손자인 야곱 때에도 그 성전은 지어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성전에는 지성소 안에 하나님의 상징인 법궤가 있어야 합니다.
법궤는 율법을 돌에 새긴 비석 돌을 넣어 놓는 궤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참 성전이었습니다.
그 성전은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입니다.
제단에서 제물을 잡고, 피는 하늘 나라의 상징인 지성소에 제사장이 가지고 들어갑니다.
그곳은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상징적인 장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성전을 짓게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법궤를 모신 성전이 이룩됨으로 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만나는 장소가 마련되고 양자의 관계가 맺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모두 참 것의 그림자이며 비유입니다.
지어진 성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한복음 14:9)고 하셨습니다.
이 사실 속에는 너무도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게 될 때에 멀리 있던 하나님을 사람이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을 범할 때는
 
그러나 구약의 율법에는 또 다른 뜻이 있었습니다.
율법은 십계명, 제사법, 재판하는 민법의 세 가지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 십계명만 돌비에 새겨져 있습니다.
십계명의 율법은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며 십계명을 범하면 벌을 받게 된다는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신 또 하나의 목적은, 하나님을 버리고 법을 어기는 사람은 이렇게 벌을 받는다는 것을 시범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그들이 하나님의 벌을 받으면서 지나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다 말씀하신 후에, 율법을 잘 지키면 복을 받고 율법을 범하는 때에는 벌을 받는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너희가 이같이 될지라도 내게 청종치 아니하고 내게 대할할진대 내가 진노로 너희에게 대항하되 너희 죄를 인하여 칠 배가 더 징책하리니 너희가 아들의 고기를 먹을 것이요 딸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내가 너희의 산당을 헐며 너희의 태양 주상을 찍어 넘기며 너희 시체를 파상한 우상 위에 던지고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할 것이며 내가 너희 성읍으로 황폐케 하고 너희 성소들로 황량케 할 것이요 너희의 향기로운 향을 흠향치 아니하고 그 땅을 황무케 하리니 거기 거하는 너희 대적들이 그것을 인하여 놀랄 것이며 내가 너희를 열방 중에 흩을 것이요 내가 칼을 빼어 너희를 따르게 하리니 너희의 땅이 황무하며 너희의 성읍이 황폐하리라' (레위기 26:27~33)
이 말씀은 율법을 범하고 하나님께 대항하면 죄보다 칠 배나 더 무서운 벌을 내리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 사실인지 역사 속에서 찾아보기로 하겠습니다.
 
 
형벌의 시대
 
 
이상의 성구 속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범죄했을 때에 받을 벌이 네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 저주의 예언이 있은 후 1천 5백 년이 지나서 하나님의 계획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그들의 메시야로 탄생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신 후 그 첫 번째 목적이 달성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그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그들은 순전히 육신적인 욕심에만 사로잡혀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볼 때 예수님의 활동에는 그들을 정치적으로 구원해 줄 것 같은 기미도 보이지 않았고, 그가 외치는 소리는 모두 귀에 거슬리는 소리뿐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근본 뜻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과 생활이 심히 못마땅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미워하게 되었고 드디어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물론 로마의 법과 힘을 빌어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빌라도가 자기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손을 씻었을 때 유대인들은 '예수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돌리라'고 소리쳤습니다.
하나님에게 대항한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형벌이 내렸습니다.
이스라엘의 2천 년의 역사는 바로 그 하나님의 형벌을 받는 역사였습니다.
죄보다 칠 배나 무서운 형벌이 2천 년간의 역사 속에서 그들에게 그대로 내려졌습니다.
참으로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될 만큼 참혹한 역사였습니다.
 
 
예언과 성취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이후 약 40년이 지났을 즈음, 곧 A.D. 70년에 로마의 장군 타이터스가 군대를 몰고 와서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
로마군은 대군이었으나 해발 800m 이상 되는 산 위에 세워진 예루살렘 성을 함락시키기 까지는 5개월이 걸려야 했습니다.
그 동안 성은 외부와의 연락이 완전히 끊어졌으므로 식량이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미리 준비해 두고 전쟁하지 않는 한, 성안에 식량이 있을 리도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먹지 못하고 굶주리게 되자 어떤 사람은 마음이 변하고 눈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되어 아들을 잡아먹고 딸을 잡아먹었습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죠세프스의 역사 속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멸망했습니다.
네 가지 형벌 중에 첫째가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다음 이스라엘 땅은 완전히 황무지로 변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온 세상에 흩어졌습니다.
죽은 자만 해도 수십만이고, 포로로 잡혀간 자는 예루살렘뿐 아니라 전국에서 수십만 명에 달하였으며 스스로 피해간 사람도 부지기수였습니다.
이것이 둘째 형벌과 셋째 형벌입니다.
예루살렘은 그렇게 망했습니다.
TV에도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만 끝까지 항쟁하다가 참혹하게 전멸하고만 맛사다의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합니다.
맛사다는 예루살렘 동남쪽 사해의 연안에 있는 높은 언덕인데, 그곳은 유명한 요새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빠져나온 사람들 중 일부가 맛사다 성으로 들어갔는데, 너무 험준한 요새여서 로마 군대가 아무리 공격해도 공략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포위를 하고 스스로 지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끈질기게 버티던 유대인들도 나중에 더는 견디지 못하게 되자 몽땅 자결을 했습니다.
로마군이 성에 쳐들어 갔을 때에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후였습니다.
장정들이 칼로 가족을 모두 죽이고, 그 중의 한 사람이 장정 전부를 죽인 후 맨 마지막에 남은 한 사람도 자결로써 최후의 순간을 장식했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땅을 점령한 후 1900년간 그 땅은 완전히 황무지가 되었고, 이스라엘 민족은 세계 120여개 국으로 흩어졌습니다.
 
 
결 과
 
이와같이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을 때 받을 형벌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이스라엘 민족은 예루살렘 멸망 후 전세계로 이산되어 수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 중에서 예루살렘 멸망의 역사적 사실과 십자군 시대의 유대인 박해, 2차 세계 대전 때의 박해의 역사를 아래에 소개합니다.
여기에 소개할 내용은 살렘 키르반의 저서 '이스라엘 최후의 날'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침략자 타이터스
 
A.D. 64년, 당시의 로마 황제는 네로(Nero)였다. 네로는 게시우스 플로루스(Gessius Florus)를 새로 유다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플로루스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신망을 얻지 못했다.
그는 스스로 파렴치한 일을 드러냈다.
그는 예루살렘의 구석구석까지 돌아다니며 약탈을 일삼으면서 유대인들이 반항을 하고 나서기를 은근히 기대했다.
플로루스는 기분이 약간 언짢았다고 해서 3천 3백 6십 명의 유대인을 죽인 적도 있었다.
그는 성전의 보물을 마음껏 강탈할 생각을 품고 성전에 들어갔다.
그래서 유대인의 대표들은 분봉왕 아그립바 2세를 찾아가서 로마에 서신과 외교 사절을 보내어 플로루스를 다른 곳으로 전출시켜 줄 것을 간청했다.
로마의 분봉왕 헤롯 대왕의 자손인 아그립바 2세는 이런 귀찮은 문제에 당면하자 유대인들을 진정시키려고 유대인의 대표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그는 유대인들이 때에 따라서는 로마를 상대로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로마와 전쟁을 할 경우 그대들이 의지할 만한 병력과 무기가 어디에 있는가?
로마의 둘레에 있는 바다를 제압할 함대는 또 어디에 있는가?
로마로 원정을 떠나는 데 필요한 비용은 또 어디에서 나올 것인가?
당신들은 이집트나 아랍처럼 로마가 그렇게 간단히 보이는가? 당신들은 예루살렘에서 로마인들을 몰아내고 예루살렘을 굳게 지켜낼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지만 지난번에 있었던 브리튼 성의 방어전은 사방이 바다였고 주민의 수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인구만큼 많았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바다로 건너가서 그들을 격파하고 그들을 노예로 만들어 버렸다.
그기로 거기에는 4개의 로마의 군단이 주둔하고 있다.
하늘 아래에 있는 국가는 거의 전부가 로마의 힘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한다.
로마에 항거하던 카르타고인들이 어찌되고 말았는지 생각해 보지도 않았는가?
남들이 다 로마와 싸우다가 비참한 꼴이 되고 말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대들만은 이긴다고 생각하고 전쟁을 벌이겠다는 것인가?
그대들은 하나님과 동맹을 맺는 것 이외에는 달리 피할 방도가 없다.
하나님은 로마 편을 드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로마가 그분의 도움없이 그토록 큰 제국을 세울 수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만약 당신들이 옳은 길을 택하면 당신들은 나와 함께 평화를 누릴 수 있다.
그러나 만약에 당신들이 마음 태키는 대로 행동한다면 반드시 큰 재앙을 만날 것이며 나는 거기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없다. (죠세프스, 유대인의 전쟁사)
그러나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아그립바 2세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일부의 반란군들은 로마군의 병영이 있던 맛사다를 점령하고, 거기에 있던 로마군을 전멸시켜 버렸다.
그것을 계기로 사태는 로마의 앞잡이인 아그립바 2세의 군대와 로마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반란군 사이의 내란으로 돌입했다.
3백 명에 달하는 로마의 병사들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로마인들은 모두가 들고 일어나서 가이사랴 지방에서 2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살해되는 것을 묵인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나서 로마인들은 갈릴리 지방에서 조직적으로 유대인들에게 보복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6천 명에 달하는 청년들이 네로 황제에게 끌려가서 고린도의 공사장에서 혹사당했다.
한편 1천 2백 명에 달하는 노인들이 살해되었고 3만 명이 노예로 팔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리아 지방의 로마 총독 게스티우스 갈루스(Cestius Gallus)는 예루살렘 사태를 진압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패하고 말았다.
로마는 모욕을 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패망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유대인의 앞날은 갈수록 쓰디쓴 고난의 길이요 태산이었다.
 
 
네로 황제의 등장
 
그 무렵 로마의 폭군 네로는 헬라 지방을 여행하고 있었다.
늘 음악이 뒤따랐고 매우 극적인 무대가 펼쳐지는 여행이었다.
그때 그는 스물 아홉 살이었다.
그의 업적이란 것은
1. 그의 부하에게 그의 모친을 시해하도록 명령한 것
2. 부유한 그의 숙모를 죽인 것
3. 그의 스승 세네카에게 자살하도록 명령한 것
4. 대중 앞에서 소년 소녀들에게 추행을 일삼은 것
그러한 네로는 예루살렘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자 베스파시안 장군에게 명하여 토벌케 했다.
베스파시안은 먼저 그의 아들인 타이터스를 알렉산드리아에 보내어 1개 군단의 병력을 확보했다.
그리하여 그는 아들과 만나게 되었는데 그때 그들 부자가 거느린 총 병력은 5만 8천이었다.
누구나 그 때의 그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옆구리에 칼을 차고 손에는 창을 들고 말을 탄 기병 부대, 큰 타원형으로 된 방패를 번쩍이면서 중무장을 한 로마의 병사들이 거리를 메꾸었다.
수천 명으로 이룩된 군단이 몇몇 지나갔는데 각 군단의 앞에는 멋진 제복을 입고 로마의 영광을 상징하는 금 독수리를 떠받들고 행진하는 군악대와 의장대가 선두에 섰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 금독수리를 유독히 미워했다.
그러다가 네로가 죽자 황제의 자리를 둘러싸고 정적들이 서로 싸웠다.
그 결과 황제의 자리는 베스파시안에게 돌아갔다.
때는 A.D. 70년이었다.
 
 
예루살렘을 파괴한 자 타이터스
 
황제가 된 베스파시안은 로마에서 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그의 아들 타이터스를 보내어 유대인의 반란을 진압케 했다.
예루살렘이 실질적으로 포위된 것은 A.D. 69년이었다.
그러나 타이터스가 로마군의 총사령관에 취임한 것은 다음 해의 봄이었다.
로마군이 예루살렘성의 북쪽 외곽 벽을 허물어 버리는 데는 며칠 안 걸렸다.
그 다음 타이터스는 성벽 중앙부를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그 결과 중간 벽도 문제없이 무너졌다.
남은 것은 내부의 성벽 하나뿐이었다.
이것만 무너지면 만사는 끝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담의 서쪽은 헤롯 왕의 궁전에서 시작하여 동쪽은 성전이 자리잡은 언덕까지 뻗어 있었다.
이 내부의 벽은 예루살렘의 심장부를 지키고 있었다.
이 벽 안에는 성전도 있었다.
로마군은 이 최후의 보루를 빼앗기 위하여 최고의 전략을 발휘했다.
방어를 하는 유대인들은 40개의 투석기와 화살을 퍼붓기에 편리한 축조물을 3백 개 가량 구축해 두었다.
그러나 예루살렘 시는 로마군보다는 굶주림에 완전히 포위되고 말았다.
견디다 못하여 어떤 유대인들은 로마군이 점령한 시가지로 몰래 들어가서 식량을 구해 가지고는 성전이 있는 지역으로 되돌아 오려고 애썼다.
타이터스의 공격이 개시되자 다른 유대인들은 금 덩어리를 집어 삼키고 포위된 예루살렘을 벗어나려고 했다.
로마와 동맹을 맺은 야만족 파르시아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가지고 금화를 꺼내려고 배를 가르기도 했다.
 
 
매일 5백 명의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처형되다
 
날마다 많은 유대인들이 붙잡혔다.
타이터스는 붙잡힌 자들에게 로마의 형벌 중 가장 엄한 것으로 다스리기로 했다.
역사 학자 죠세프스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로마군은 매일 5백 명 또는 그 이상의 유대인 포로들을 붙잡아, 방어하고 있는 예루살렘 시민들이 환하게 보이는 성벽 밖에서 십자가 형틀에 못 박았다.
타이터스가 마지막으로 택한 방법은 공격 중인 성 밖의 새로운 성을 쌓아서 예루살렘성 안에 있는 유대인들이 빠져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 방법은 효과가 컸다.
성 안에 있던 유대인들은 어찌나 배가 고팠던지 허리에 두른 가죽 허리띠와 구두의 가죽을 갉아 먹었고 마른 풀을 씹었다.
유대인의 방어벽은 사실상 무너졌다.
그러던 어느날 로마군은 마침내 성전이 있는 지역을 탈취하는데 성공했다.
죠세프스의 말에 따르면 어떤 광적인 로마 병사가 이미 불타고 있는 외곽벽의 성문에서 불붙은 목재를 들고 달려가서 성전 안에 바로 집어던졌다.
타이터스는 성전이 화염에 휩싸이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기 위하여 그의 막사에서 밖으로 뛰쳐나왔다.
불타는 성전은 그것을 구경하던 로마의 장병들을 흥분케 했다.
로마군은 유대인들을 닥치는 대로 죽여 높은 층대 위에까지 쌓이게 하는가 하면 성전 뜰에 아무렇게나 버리기도 하였다.
그 제단은 물론 번제를 드리는 제단이었다.
병사들은 성전에 있는 각종 보물을 손에 움켜 잡았으며 값진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약탈했다.
성전은 언덕 위에 높이 서 있었다.
그래서 시가지에 있던 유대인들은 간장이 찢기는 비통한 심정으로 불타는 성전을 바라보았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버리셨던 것이다.
놋쇠와 은으로 된 성전의 문도 다시는 못 보게 되었다.
네 가지 색깔의 장막도 사라졌다.
그리고 성전의 보화도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는 대제사장도 없고 아침 저녁으로 제사와 예물을 드리는 일도 볼 수 없게 되었다.
분노에 가득찬 붉은 불길이 유대인의 패망을 소리높여 부르짖었고 뭉게 구름처럼 피어오르며 그칠 줄 모르는 검은 연기가 예루살렘성 변두리의 촌락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이 무너졌다는 신호를 보냈다.
타이터스는 폭동을 일으킨 유대인의 지도자들을 처형했다.
그리고 나머지 유대인은 쇠사슬로 묶어서 애굽으로 보내어 광산에서 강제 노동을 시키거나 또는 로마로 데리고 가서 노예 시장에 내다 팔았다.
또 어떤 사람은 검투사가 되어 광란하는 구경꾼들 앞에서 칼을 들고 맹수들과 피비린내 나는 사투를 해야만 했다.
타이터스는 예루살렘 전체를 쑥밭으로 만들어 버리라고 명령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은 베스파시안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지 2년 만에 파멸되고 말았다.
때는 A.D. 70년 8월 28일이었다.
예루살렘은 그 때까지 다섯 번 공격을 받았으나 잿더미가 되기는 이번이 두 번째였다.
애굽왕 시샥, 안티오크스 4세 그리고 폼페이, 소시우스 및 헤롯 등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점령하는 데만 그치고 예루살렘을 화염의 불길에서 구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바벨론의 왕은 그것을 파괴해 버렸다.
그리고 그로부터 7세기가 흘러간 다음에 타이터스가 그와 똑같은 만행을 저질렀다.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은 혼인 잔치의 기쁨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신랑은 유리잔을 발꿈치로 밟아서 깨어지게 한다.
이것은 그 옛날 성전이 파괴당했음을 다시금 마음에 새기기 위해서이다.
그 후 타이터스가 로마의 황제가 되었다. 그는 황제의 자리에 오른 지 12년 만인 A.D. 81년에 죽고 말았다.
 
 
하드리안 황제의 유대인 박해
 
A.D. 117년 타이터스의 뒤를 이어서 푸블리우스 아에리우스 하드리아누스(Publius Aelius Hadrianus)가 로마의 황제가 되었다.
그는 이렇게 긴 정식 이름보다도 하드리안(Hadrian)이라는 짧은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드리안 황제가 건축한 것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것은 로마의 여러 신을 모신 판테온(Pantheon) 신전일 것이다.
그가 처음으로 이룩한 치적 중의 하나는 담세 능력이 없는 빈민에게 면세의 혜택을 베풀었다는 사실이 있다.
그 때 그가 면세한 금액은 달러로 환산하여 3천 5백만 달러라는 엄청난 것이었다.
A.D. 130년에 그는 예루살렘을 방문했다.
그때 성지 예루살렘은 여전히 폐허가 되어 있었고 거리는 60년 전에 타이터스가 만행을 저지른 직후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하드리안 황제는 폐허가 된 예루살렘시를 보고 깊이 느낀 바가 있었던지 예루살렘을 시로 재건하여 그 이름도 '아에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로 고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예루살렘을 재건하여 이교도의 도시가 되게 한 사실은 많은 유대인들의 분노를 자극했다.
그래서 하드리안 황제는 유대인들이 새로운 힘을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할례를 금함은 물론이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유대인의 절기를 지키는 것을 철저하게 금했다.
그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인두세라는 새로운 세금을 부과했다. 또 그는 유대인들이 매년 지정된 날 하루만 예루살렘에 와서 옛날 유대인들의 성전이 서 있던 폐허에서 통곡하는 것을 허용했다.
지난날 예루살렘성에서도 사람들은 이제 로마의 주피터 신과 비너스 여신을 받드는 신전을 보게 되었다.
또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을 허허벌판으로 유인해 내어 약 5만 명의 유대인들을 학살한 장본인이 바로 하드리안이었다는 사실을 유대인들은 기억하고 있다.
바코호바는 유대인들의 독립 투쟁을 열렬하게 이끌어 가기 위하여 구세주의 깃발을 휘날리는 기수가 되었다.
그래서 A.D. 132년, 두 번째의 유대인의 반란이 일어났다.
로마인들은 2년 만에 드디어 폭동을 진압했다.
유대인의 기수는 죽음을 당했다.
옛 성전의 모습을 더듬어 볼 수 있게 하던 흔적조차 하나 남기지 않고 없애버렸으니 예루살렘시는 아에리아 카피톨리나라는 로마의 도시가 되어 버렸다.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유다 지방에서는 천여 개의 마을들이 파괴당했다.
이 전쟁이 끝날 무렵에 하드리안 황제는 예루살렘을 완전히 파괴하여 황폐한 사막으로 만들어 버렸다.
유다 지방의 주요 생산물인 올리브는 100년 이상 수확할 수가 없었다.
결국 로마는 또 한차례 승리를 거둔 셈이었다.
로마 정부는 유대인들의 완고한 선민 사상을 뿌리 뽑기 위하여 유다 지방의 명칭을 팔레스티나라고 바꾸어 버렸는데 이는 블레셋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의 오랜 적군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로마인들은 시가지 전체를 몇 개의 아담한 지구로 나누기 위하여 시가지의 중심에서 직각으로 교차하는 넓은 도로를 설치하였는데 오늘 날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로마인들은 도로의 양쪽에 가로수처럼 기둥을 세웠다.
공중에서 시가지를 내려다 보면 마치 큰 십자가를 예루살렘시 전역에 들씌운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하드리안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골고다 언덕에 비너스와 주피터를 위해 신전을 세웠다.
그리고 솔로몬 성터에는 돼지를 조각한 큰 문을 세웠다.
유대인은 아무도 시내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만일 들어가는 자가 있으면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오직 로마법이 정한 1년 중 단 하루만이 허락되었다.
이제 예루살렘은 '아에리아'라는 이름의 이교도의 도시로, 그리고 로마군이 주둔하는 하나의 작은 지방 도시로 전락해 버렸다.
그 옛날 여호와 하나님께서 조상에게 주신 성스러운 땅을 유대인들이 다시 찾을 때까지는 무려 18세기라는 기나긴 세월이 흘러가야만 했다.
 
 
부패한 십자군
 
십자군의 탄생은 아마도 중세기에 있었던 가장 큰 비극이다.
우리가 흔히 암흑 시대라고 일컫는 중세기는 세계의 역사상으로 말한다면 서기 400년에 시작하여 1400년까지 계속되었다.
십자군 운동을 불러 일으킨 것은 무엇인가?
십자군 운동은 다음 네 가지 이유 때문에 일어났다.
1. 1070년 터키는 애굽의 파티미즈(Fatimids)에서 예루살렘까지 탈취했다.
그리고 터키인들은 즉시 성전의 옛 터를 파괴하고 성지 순례자들을 압제했다.
2.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하고 있던 동로마가 국력이 쇠약해져서 터키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해 버렸다.
3. 이탈리아에 있던 몇 개의 상업 도시가 새로 일어나는 상업의 힘을 신장하여 지중해에서 자라나던 모슬렘의 세력을 꺾으려고 했다.
4. 야심만만했던 교황 우르반(Urban) 2세가 동로마 교회를 다시 한번 교황의 통제하에 두고 로마를 세계의 수도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프랑스 출신인 이 교황은 추운 11월 어느날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매우 열정적으로 호소했다.
거룩한 무덤으로 가는 대열에 서라. 성스러운 땅을 사악한 족속의 손아귀에서 빼앗아 내라.
그 자들로 하여금 너희들 앞에 무릎을 꿇게 하라.
세계의 중심에 자리잡은 그 고귀한 도시는 너희들이 와서 도와주기를 갈망하고 있다.
너희들의 죄를 씻기 위하여 열렬하게 이 원정의 대열에 끼어라.
그러면 하늘 나라에서 영원 무궁한 영광의 상을 반드시 받을 것이다.
1096년 3월, 제 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었다.
각국에서 모여든 연합군은 총 3만에 달했다.
그들이 예루살렘성에 도착한 것은 3년 뒤인 1099년 6월 7일이었다.
도중에서 많이 낙오되고 남은 병력은 1만 2천에 불과했다.
 
 
십자군의 아랍인 학살
 
십자군이 그들의 공격의 결과르 기록한 것을 읽어 보면 현대의 전쟁 일지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다음은 그 중 한 토막이다.
실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수많은 아랍인의 목이 날아갔다.
많은 사람들이 화살에 쓰러지거나 높은 탑에서 강제로 뛰어내려야만 했다.
그 나머지는 며칠 동안 고문 끝에 뜨거운 화염 속에서 불타 죽었다.
거리에는 잘려 나간 머리와 손발들이 즐비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사람과 말의 시체를 헤치고 다녀야 했다.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약 7만 명의 회교도들은 무참히 살해당했던 것이다.
한편,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회당에 갇혀 산 채로 불에 타 죽었다.
십자군의 병사들은 아랍인과 유대인을 구별하지 못했던 것 같다.
소위 이교도의 손에서 예루살렘을 구하기 위하여 가슴에 십자가를 달고 유럽에서 원정 온 십자군의 장병들 손에 아랍인은 물론 유대인도 참혹한 운명을 맞이했다.
소규모의 몇몇 십자군 운동 외에 세 가지의 큰 십자군 전쟁이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1291년에 모두 실패로 끝났다.
사실 서기 6백년 대에 유대인들은 아랍군에 합세하여 대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하메드에게 재산을 몰수당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모하메드가 죽자 아랍인과 유대인은 약 5백 년간 비교적 평화를 누리며 공생해 나갔다.
그러나 십자군 운동으로 상황은 크게 바뀌었다.
 
 
아랍의 보복
 
십자군의 공격을 받고 큰 피해를 입은 아랍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회교도들은 다른 종교를 무섭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유대인뿐만 아니라 기독교까지 아랍인의 손에 화를 당하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8세기부터 10세기까지 불안해하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번영을 누렸다.
회교도들이 스페인을 지배하고 있었을 때 스페인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은 약 3백 년간 별다른 박해 없이 자유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사태가 돌변하여, 1066년 아랍인은 그라나다에서 4천 명의 유대인을 학살하고 그들의 집에 들어가서 가재 도구를 마음대로 약탈했다.
그리하여 아랍과 이스라엘 사이에 평화로왔던 잠깐 동안의 시기는 끝이 났다.
한 회교 신학자는 '유대인들은 모하메드가 622년 메카에서 메디나로 도망간 것을 기념하는 500주년 기념일까지 그들의 메시야가 다시 오시지 않으면 이슬람교로 개종하겠다고 모하메드 앞에서 약속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회교도의 통치자들은 유대인에게 이슬람교로 개종하든지 아니면 막대한 금액을 국가에 바치라고 명령했다.
한편 스페인에서의 유대인의 고민은 수 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한 예를 들면 교황의 후원을 받은 자들은 강제로 유대인의 겉옷에 노란 뺏지를 달게 하여 유대인임을 표시하게 하였다.
그리스도인과 분리시켜 따로 떨어진 구역에서 살게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 의사를 찾아가는 것을 금하였다.
1218년 유대인으로 하여금 유대인임을 표시하는 뺏지를 달도록 정하는 법령이 교회의 후원하에 영국에서도 실시되었고 1299년에는 프랑스에서, 1279년에는 헝가리에도 공포되었다.
1235년, 독일에서는 미궁에 빠진 살인 사건이 발생했는데 거기에 대한 혐의가 유대인에게 돌아갔다.
뒤이어 유대인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1243년, 베를린 근처의 도시 벨리에서 살고 있던 유대인 전부가 산 채로 불에 타서 죽었다.
이러한 무분별한 횡포는 간헐적으로 되살아났다.
1298년에는 성찬식에 쓰이는 떡을 더럽혔다는 혐의로 뢰팅겐시에 거주하던 유대인 전부가 화형당했다.
이 끔찍한 사건이 발생한 후 약 반 년이 채 못 되어서 박해는 사방으로 번지기 시작하여 140개 이상의 유대인의 집단 거주지가 흔적을 감추었다.
1144년, 영국 노르위치에 사는 윌리엄이란 젊은이가 피살체로 발견되었다.
그 혐의는 유대인에게로 돌아갔다.
십자군에게 돈을 빌려 준 사람들은 거의 전부가 유대인들이었다.
유대인들은 십자군에게 포악한 짓을 하도록 재정적 뒷받침을 한 셈이었다.
그 당시는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리대금업을 금했기 때문에 자연히 유대인들이 돈을 쥐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돈을 빌었던 십자군들은 고국으로 돌아오자 그들에게 돈을 빌려 준 유대인의 재산을 탐내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앙심은 1257년에서 1267년 사이에 생겨났다.
그리고 그동안 유대인의 인구가 많이 늘어났다.
이 또한 방관할 수 없는 문제로 등장했다.
이와 같은 배경하에서 에드워드 1세는 영국 거주 유대인들에게 추방령을 내렸다.
영국을 떠나 도버 해협을 건너다가 많은 유대인들이 익사했다.
프랑스에 상륙한 유대인들은 생활의 기반을 다시 닦기 시작했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되자 이번에는 필립 공정제(Philip the Fain)(1306)가 그들을 전부 투옥해 버렸다.
그리고 그들의 몸에 걸친 의복을 제외하고는 재산을 몰수해 버렸다.
그리고 겨우 하루분의 식량을 지급한 후 10만명의 유대인들을 프랑스 밖으로 추방했다.
유대인들은 중세기 동안 미움과 질시 속에서 유럽 전역을 전전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언제나 고달픈 손발을 쉬기 위하여 평화로운 땅을 찾았지만 발을 내디딘 땅은 곧 꺼지고 그들의 무덤이 되고 마는 비극이 되풀이되었다.
유대인에게 아마도 영원한 조국을 세워야 한다는 희망의 씨가 그들의 가슴 속에 뿌려진 것은 이 때가 아닌가 싶다.
이 무렵에 살았던 솔로몬 이든 가비롤(Solomon Idn Gabirol)은 어릴 때 양친을 잃고 빈곤 속에서 자랐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읊었다.
 
우리는 기약도 없이 정처없이 흘러다닌다.
우리는 쇠사슬에 묶여 더욱 쓸쓸하다. 그러나 어디든지 가서 힘차게 외치리라.
우리 주의 영광이 여기에 있다고.
 
그리고 바로 그 당시 가장 위대한 유럽의 시인이라고 생각되는 제후다 할레비(Jehuda Halevi)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오! 세계의 도시 예루살렘이여!
자랑스러운 광채로 찬란하구나.
오! 만약 내게 독수리 날개가 있다면
서슴지 않고 그대에게 날아가
내 눈물을 뿌려 그대의 먼지를 씻기련만……
마음은 동쪽에 가 있건만
이 몸은 서쪽에 머물고 있네.
 
 
대환난의 전주곡
 
1889년 4월 20일, 저녁 6시 반, 도이칠란드의 바바리아의 작은 도시 '브라우나우'의 초라한 여인숙에서 한 사내 아이가 태어났다.
그 아이의 이름은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였다.
그 이름은 장차 수백만의 유럽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공포와 죽음을 가져다 줄 자의 이름이었다.
히틀러의 처음 희망은 정치가가 아니었고 비인의 미술 학교에 들어가서 장차 건축 기사가 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입학 시험에 떨어졌고 날품팔이와 무명의 화가로서 5년간을 헛되이 보냈다.
그는 과거에 유명했던 대작의 모조품을 만들거나 그것을 솥에 넣고 구워서 약간 갈색을 띄게 하여 고대의 명화처럼 고상하게 보이게 하는 좋지 못한 손장난을 배웠다.
그는 1911년 비인에서 유대인에 대하여 큰 원한을 품기 시작했다.
그 당시 비인에서 반 유대주의 사상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상은 멀지 않아 전 세계에 번질 것이 틀림 없었다.
히틀러는 그 당시 이미 아리안족을 파괴하고, 복종시키려는 유대인의 음모가 진행 중이라고 믿고 있었다.
또 그는 그 당시 여자의 나체화라든가 경박한 재즈 음악 그리고 음란한 그림과 근로 대중에 대한 자본가의 착취 같은 사악한 것들은 모두 유대인들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히틀러의 집권
 
제 1차 세계 대전에 패한 독일 제국엔 불안한 공백기가 시작되었다.
기구한 환경 속에서 헤메던 아돌프 히틀러가 그 공백을 메꿀 운명을 띄게 되었다.
그는 독일 노동당에 입당하여 곧 선전술을 익혔다.
그가 배

Comments

가로수 2008.10.14 09:34
근거 없는 황당한 글로 도배하는 짓은 허용하지 않겠습니다.

인간이 1000년 가까이 살았다는 바이블은 바이블이 거짓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창6-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왜 창세기에 나오는 아이들은 900살을 살았네, 뭐했네하죠?

바이블이 구라라는 것을 바이블이 증명하는 구절입니다.
고옴 2008.10.19 16:48
도대체 글쓴이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UFO 외계인은 아니겠죠?
시끄러운쿨러 2008.11.10 18:37
도데체가 말이에요. 아들한테 노예가 되라는 저주를 하는 아비가 어디 있단 말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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