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패션 복지 문학 아름다운 파리의 나라 , 프랑승의 선진 개혁 민주주의 신앙인, 죤 칼뱅, John Calv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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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패션 복지 문학 아름다운 파리의 나라 , 프랑승의 선진 개혁 민주주의 신앙인, 죤 칼뱅, John Calvin

정통프랑스인 0 4,136 2008.05.28 19:36

칼빈의(John Calvin)의 종교개혁 운동에 관하여

 

1. 제네바 종교개혁의 배경

스위스 개혁 운동의 배경은 종교적인 면에서보다 정치적인 영향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제네바는 신. 구 두 구릅에 낀 중간 위치였다고 볼 수 있었다. 후대의 학자들은 평하기를 "프로테스탄티즘의 가면을 쓴 '에라스므스'(북구의 인문주의 운동의 왕자)의 휴매니즘과 로마 카톨릭의 겉옷을 입은 '루후에부르그'(프랑스 인문주의 운동의 선구자)의 프로테스탄티즘이 사라지고 칼빈의 명백하고 적라나한 프로테스탄티즘이 '기독교강요'(基督敎綱要)라는 참신하고 박력 있는 운동으로 역사의 무대 위에 등장하였다" 고 하였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오늘날 모든 개혁 교회들 특히 장로교회의 교리의 근간을 이룩하게 한 유일의 책이 되었다.

 

칼빈의 개혁 당시 제네바의 인구는 약 만 삼천 정도로서 신성 로마제국의 치세 하에서 매우 복잡한 정치적 입장에 있었다. 스위스가 유럽 정치사에 등장한 것은 1291년경 독일어를 말 하는 세 주(州)가 소위 '영원한 언약'이라고 불리는 상호 방위조약을 맺고 연방(聯邦)을 조직한 이후부터이다. 스위스 사람들은 유럽에서 영국과 같이 근면하고 용감한 국민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자유에 대한 정열과 애착심은 어느 민족보다 강했다. 그들은 자연의 여러 악조건과 싸우면서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쳐 들어오는 외국 세력을 물리치는 동안 민족 스스로가 과감한 저항 정신을 배양하였고 진취적 기상과 자유의 정신을 갖게 되었다. 1291년 이후 수차례의 위기를 극복하면서 주(州)의 수(數)를 증가 시켰다. 그리하여 1499년에는 신성 로마제국으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인정받았다. 종교개혁 전야에 스위스는(1513) 자치주(自治州)가 13으로 증가하여 일종의 연방 체제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 연방의 여러 도시들과 외부 도시와의 관계는 매우 미묘하고 복잡하였다. 그 중에서도 제네바는 스위스 연방에 가입하지 않은 도시 공화국(City-Republic)이었다. 외형적 표면상에서는 제네바는 국왕의 주권 하에 있었지만 실제적인 행정권과 사법권은 로마교회의 주교(Bishop)가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시당국과 주교 양자 사이에는 지배력의 우열을 둘러싸고 심각한 대립과 긴장이 그칠 사이가 없었다. 시민들은 황제권(皇帝權)과 교황권(敎皇權)의 싸움의 틈바구니 속에서 어부지리를 노림으로써 그들의 세력 신장을 펴 나아갔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유시(自由市)로서의 특권과 자치권을 획득하려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던중 13세기에 있어서 새로운 요인이 나타났다. 그것은 사보이(Savoy) 국왕의 출현이었다. 신성 로마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난 사보이 왕국은 근 2세기에 걸친 교회와의 싸움 끝에 결국 주교(主敎)의 지위를 왕가(王家)에서 선출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함으로써 사실상 제네바 시를 수중에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 한편 제네바 시민들은 이와 같은 사보이왕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 시민 전체를 대표하는 '총회'(總會)와 20인의 대표로 구성되는 '소의회'를 조직하였다. 정세는 급변하여 이번에는 정치와 종교를 한 손에 쥐고 좌지우지하는 사보이왕과 투쟁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무력이 우세한 사보이군(軍)을 상대로 싸우고 있던 제네바는 한때 위기 속에 빠졌지만 연방 도시의 원조로 위기를 모면하고 최후에는 승리를 쟁취하였다. 이 승리는 정치와 종교가 동시에 로마교회로부터 해방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때가 1519년이었다. 1535년 8월10일 제네바 시는 로마교회의 미사 의식을 폐지하기로 결의하고 시민 총회에서 복음주의적 신앙을 따를 것을 서약하였다.

2. 칼빈과 인문주의(人文主義)

종교개혁과 문예부흥의 역사적 연관성에 대한 문제는 현재에 있어서도 역사가들의 연구의 과제가 되어 있다. 비록 사가들이 종교개혁 운동을 인문주의 운동의 범주 속에서 규명해 보려고 시도하였으나 그 성과는 미미하였다. 이런 전제하에서 칼빈과 인문주의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칼빈이 인문주의자로서 출발하여 신학자가 되고 나서 인본주의 사상과 완전히 결별하였는가? 는 학자들에 따라 평이 달라질 것이다. 칼빈의 사상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강요>에서 인문주의적 교양의 필요성과 희랍 로마 시대의 고전 연구의 중요성을 역설한 것을 보아 루터보다 더 많은 풍부한 고전을 이용하였다는 점으로 보아 깊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칼빈은 젊은 날에 인문주의적 교양과 지식의 습득으로 그의 위대한 신학적 저술에 깊이 반영되어 타에 추종을 불허하였다. 그는 불어는 물론, 라틴어 문장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고, 그는 대중에게 쉽게 전달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한결같은 염원이었다. 칼빈이 회심한 후에도 여전히 고전에 대한 존경심과 인문주의에 대하여 호의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러나 그는 인문주의 사상 그 자체에 대하여 결코 긍정한 일은 없었다. 즉 기독교의 본질과 인문주의(Humanism)사상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바탕 위에 서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칼빈의 인문주의적 사상이란 것은 세속적인 인문주의자들과 구별해야 한다. 그래서 칼빈을 일반 인문주의자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기독교 인문주의자>(Christian Humanist) 또는 <성경적 인문주의자>(Biblical Humanist)라고 부른다.

 

3. 칼빈의 개혁 신앙의 원리

1) 그의 생애

1509년 북부 프랑스 <노와이온>시(市)에서 탄생하였다. 아버지는 노와이온시의 유력한 인사로서 교회의 서기와 회계를 오랫동안 맡아보았다. 그의 머리는 예리하였고 판단력이 빨라 특출하여 그 지방 고급 귀족들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칼빈은 이러한 아버지로부터 지식욕과 조직적 두뇌를 물려받았다. 어머니는 매우 경건한 여성으로서 칼빈에게 경건을 물려주었다. 그의 가정은 사회적 지위와 부를 함께 가졌음으로 어린 시절 칼빈은 행복하게 성장하였다. 칼빈은 어려서 귀족의 자녀들과 사귀면서 공부하였다. 11살 때 노와이온 주교가 지불하는 장학금을 받았고 그때부터 교회에서 섬기는 직책을 갖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교직을 목표로 훈련을 받았다.

14살 때 칼빈은 파리에 유학의 길을 떠났다. 귀족들이 들어가는 대학에 입학하였다. 라 마르슈(La Marche)대학은 당대 프랑스의 인문주의 신문화의 대 본산이며 국왕의 교육정책에 따른 건실하게 발전되었다. 칼빈은 다시 몬테그(Montaigue) 대학으로 옮겼는데 이것은 아버지에 지시에 의하여 교회적 분위기를 가진 곳에 와서 교직을 목표로한 신학 공부를 준비하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이 대학은 파리의 보수주의 진영의 중심지였다. 칼빈은 이곳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문학사가 되었다.

1527년 몬테그 대학에서 문학사의 학위를 받은 후 칼빈은 그의 행로를 변하여 법학을 배우려 돌연 오를레안(Orlean)대학에 입학하였다. 이것도 역시 아버지의 지시로 대로 순종 하였다. 아버지는 칼빈의 성품을 보아 교직자보다 법률가가 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1531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하여 그후에는 칼빈의 자유 선택에 의하여다시 신학으로 되돌아섰다. 이렇게 칼빈의 회심은 루터와 같이 급격한 것이 아니라 점진적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그의 신학 사상(神學思想)

칼빈의 신학은 후대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관점에서 그의 신학 사상을 정리하려고 했지만 요약하면 "말씀" 신학이다. 그는 하나님의 힘에 억압되어 "말씀"에 계시된 하나님을 만났고 이것이 그의 신학의 특징이다.

① 그에게 가장 첫째요 중요한 중심의 대상은 신인식(神認識)이었다.

그러한 신인식을 그는 "말씀"에 계시된 것으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의 신학을 "말씀의 신학"이라고 일컬어지고 또한 그러기에 복음주의 신학의 전통으로 이어졌다. 그는 철저하게 "말씀"이 신인식의 길이라고 단정하였다. 그는 그의 역작인 「기독교강요」 초판(1536년)부터 신인식이 신학의 주제라고 스스로 말하였다. 그러기에 1542년 공표한 제네바 신앙 문답 첫문답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이뇨"라고 묻고 "그것은 하나닙을 알고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답하였다. 바로 이것이 개혁 교회와 장로교회의 신앙 문답의 전통이 되었다. 이것도 신인식이 인생의 궁극의 목적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② 신인식은 인간 편에서는 불가능하다.

다만 하나님께서 스스로 나추어 인간의 능력에 적합한 방도를 취하여 계시함으만 가능하다고 했다. 에스겔 9:3-4절을 강해 하면서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의 지식 수준에 적응시키지 않으면 우리에게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이것은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에 있는 균열을 다리 놓기 위하여 하나님이 스스로 어떤 모양으로 내려오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본질은 알 수 없고 가까이 할 수 없으며 단지 그의 존재를 알게 함으로 그에게 경외의 마음을 일으키며 의뢰하며 찬미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생긴다고 했다. 이러한 신인식의 객관적 지식이 어디에서부터 오는가? 그것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였다.

③ 칼빈에게서 "말씀"으로서의 성경은 절대 복종이었다.

부패한 인간에게 잔존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우상 숭배와 미신의 원천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래서 참 지식의 근원은 하나님이 자기를 입증하시려고 계시하신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는 데서 성립한다고 했다. 신인식의 올바른 자세가 바로 이 복종(服從)이다. 복종한다는 것은 그 대상의 권위를 받들어 모시는 것이다. 그 구체적 대상이 바로 이 "말씀"이었다.

④ 루터는 로마서1:17절에서 얻은 <복음의 이해>에서 전체성서의 주제를 찾고 이것을 기점으로 하여 성서의 성서 됨을 판정함으로 극단적으로 기우려 졌지만(로마서, 요한복음이 가장 가치 있고 야고보 요한계시록은 이차적인 것으로) 칼빈에게서는 그래서 「서책으로서의 말씀」을 강조함으로 이것을 극복하였다. 즉 성서가 글로 쓰여짐으로 제한성이 있기는 하나 반면에 시대가 흐르고 사람의 기억이 변전(變轉)하고 또 그릇됨에 떨어지는 경우에도 오히려 성서 본문만은 일정한 사상을 지시하고 있기 때문에 혹 오해될 수도 있으나, 다시 또 새롭게 그 참 뜻이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라고 보았다. 이렇게 칼빈은 성서 각책의 경중의 차를 보기 전에 먼저 주어진 권위의 책으로서 어느 책에서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신구약 전체를 하나 하나 주석 하였다. 이렇게 말씀의 권위를 주장한 칼빈이었기에 오늘까지 그의 사상은 복음주의 신학에 중심이 되었고, 개혁 주의 교회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후에 칼빈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의하여 칼빈주의(Calvinism)가 형성되어 그의 사상을 여러 가지로 체계화 시켰다. 그러나 그 중에는 칼빈 스스로의 직접적인 주장은 아니지만 칼빈의 사상을 주석하며 해석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들이 생겨 오늘날 칼빈주의 사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3) 칼빈의 예정설(Predestination)

① 흔히 칼빈의 신학에서 예정설이 중심 사상인 것처럼 생각하기 쉬우나 칼빈자신은 이 말을 처음부터 사용하지 않았다. 칼빈의 예정설은 신학의 출발점이 아니고 논리적 귀결점이었다. 그에게서 최우선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었다. 처음 그에게서 이 말은 교회론을 말할 때 '선택받은 자의 무리'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행위로서 구원함에 이르게 한 것도 하나님의 선택이라면 그 반대의 경우도 하나님의 뜻에서 그렇게 하신 예정이란 것이다. 이러한 말에 대하여 칼빈을 비판하는 무리들의 반론이 제기되었다. 그렇다면 사랑의 하나님이 인간의 행위에 의하지도 않고 "영원한 포기"를 한다면 옳지 않은 것이 아니냐? 라는 질문에 대답으로 소위 '이중 예정설(二重 豫定說)'을 주장하였다.

 

② 칼빈의 예정설을 반대하는 주장은 아래와 같다.

(1)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원리에 모순된다.

(2) 하나님은 모든 인간이 회개하기를 참고 기다린다는 성경에 배치된다.

(3) 로마서 9:13절에 '강퍅하게 할 자를 강팍하게 한다'고는 있어도 멸망시킬 자를         멸망에 정한다고 한 것은 없다.

(4) 설교가 필요 없어진다.

(5) 사람에게서 성결에 이르는 동기를 제거하게 된다.

(6) 사람의 운명이 영원 전부터 작정되었다면 그리스도로 인한 계시도 필요 없다.

(7) 하나님은 주지 않고서 가지지 않았다고 벌하시는 분이 되지 않겠는가?

 

③ 칼빈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이러한 생각은 매우 무지하고 유치한 일이다. 선택이란 기각을 전제한 말이며 하나님의 의지가 절대적이라면 당연히 기각도 그에게서 당연한 일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자기의 성질에 따라 그 사람을 심판하기를 택한다면 그가 사람에게 얽매인 무슨 의무가 있기에 그것이 마땅치 않다고 하겠는가?" 라고....그러면서 결론적으로 "우리는 모두 미움을 받은 존재들이다"라고 했다.

 

이렇게 볼 때 칼빈의 예정설은 하나님의 주권적 권위를 강조한 결과에서 얻어진 논리적 귀결이었다. 즉 구원의 은총을 받는 입장에서 볼 때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렇게 되도록 작정한 하나님의 예정이란 논리적 귀결이다. 그 이상 더 인간으로는 할 말이 없다. 그러므로 예정설은 숙명론도 아니고 개인의 운명을 알아내는 암호 읽기도 아니란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우리의 예정의 최대의 목적은 하나님의 은총을 찬송하게 함이라" 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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