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위대한 하나님의 이탈리아 로마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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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위대한 하나님의 이탈리아 로마 황제

정통 기독교 0 3,820 2008.05.26 23:40
그리스도교도임을 공언한 최초의 로마 황제.
 
[개요]
그의 개종에 힘입어 로마 제국은 그리스도교 국가로 변모하기 시작했으며, 그의 추진력 덕분에 형성된 그리스도교 문화는 비잔틴 제국과 서유럽의 중세 문화가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궁정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콘스탄티누스는 일련의 복잡한 내전을 거친 뒤 서로마 황제가 되었으며(312), 이어서 로마 제국 전체를 다스리는 단독 황제가 되었다(324).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성공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덕분이라고 평생 동안 믿었다.
 
그는 늦어도 313년까지는 개인적으로 그리스도(가톨릭)교에 귀의했고, 그해에 밀라노 칙령을 발표해 그리스도교도에 대한 관용을 확대했으며, 신학 논쟁에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 니케아 공의회(325)를 열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옛 이름은 비잔티움)을 재건하고 확장시켜 수도로 삼았는데, 이는 아마도 그가 거둔 마지막 군사적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 도시는 그후에도 1,000년이 넘도록 로마 제국 수도의 기능을 유지했다. 그의 개종은 그후 수세기 동안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자신이 하느님에게 선택받은 종복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자신의 교회를 잘 다스리는 것이 하느님에 대한 책무라고 생각했다. 일찍이 소수 종파였던 그리스도교는 로마의 국교가 되었고, 콘스탄티누스와 후계자들의 후원으로 큰 발전을 이룩했다. 교회는 재산을 늘렸고 교회의 수도 늘어났다. 덕분에 교회는 배교자인 율리아누스 황제 시대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확고한 지위를 굳힐 수 있었다.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콘스탄티누스를 성인으로 추앙하고 있다.

 
콘스탄티누스는 육군 장교인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와 그의 아내(또는 첩)인 헬레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 집안은 3세기 후반의 전형적인 군사 지배 계급에 속해 있었다. 293년 그의 아버지는 부황제(caesar)의 지위에 올라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라는 칭호를 얻었고, 서로마 황제(아우구스투스)인 막시미아누스 밑에서 부황제로 일하기 위해 서로마로 갔다. 289년 아버지는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의붓딸과 결혼하기 위해 헬레나와 이혼했고, 어린 콘스탄티누스는 동로마 제국의 니코메디아로 보내져 황제인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궁정에서 자랐다. 카이사레아 주교 유세비우스는 어린 콘스탄티누스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함께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로 싸우러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경력과 개종]

콘스탄티누스가 동방 속주의 제국 궁정에서 겪은 경험은 그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동양의 여러 도시와 궁정에서 그리스도교(가톨릭)와 접촉했다. 니코메디아의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정에서 비롯한 그리스도교도 박해가 제국의 동부 지역에서 특히 격렬하게 시행되고 있던 303년부터 그리스도(가톨릭)교는 공공 정책의 주요쟁점이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일가가 그리스도교(가톨릭)도였을 가능성도 있다.

 
305년 로마 제국을 공동으로 통치하던 두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퇴위하고, 그들의 부황제인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가 뒤를 이어 공동 황제에 올랐다. 그러나 얼마 후 동로마에서는 갈레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누스가 갈레리우스를 몰아냈고, 서로마에서는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세베루스가 콘스탄티누스를 무시하고 콘스탄티우스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콘스탄티우스는 동로마에 있는 아들을 보내달라고 갈레리우스에게 요구했고, 콘스탄티누스는 적대적인 세베루스의 영토를 가로질러 게소리아쿰(지금의 프랑스 불로뉴)에 있는 아버지 곁으로 갔다. 이들 부자는 함께 브리튼 섬으로 건너가, 306년에 콘스탄티우스가 에보라쿰(지금의 잉글랜드 노스요크셔 주 요크)에서 죽을 때까지 브리튼 섬 북부에서 원정을 벌였다.
 
콘스탄티누스는 잇달아 일어난 복잡한 내전에 전념했다. 퇴위한 서로마 황제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가 로마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동로마의 갈레리우스는 콘스탄티우스를 몰아낸 세베루스를 서로마 황제로 선언했지만, 세베루스는 다시 리키니우스에게 쫓겨났고, 반란을 일으킨 막센티우스는 아버지 막시미아누스의 도움을 얻어 세베루스를 진압했다. 아들에게 버림받은 막시미아누스는 갈리아에 있는 콘스탄티누스와 합류했지만, 결국 콘스탄티누스를 배신하고 죽음을 맞았다(310).
 
307년 막시미아누스의 딸 파우스타를 2번째 아내로 맞이한 콘스탄티누스는 312년 이탈리아를 침략해 막센티우스를 무찔렀고, 리키니우스와 이미 맺고 있던 동맹 관계를 확인했다(갈레리우스는 311년에 죽었음). 콘스탄티누스는 서로마 황제가 되었고, 리키니우스는 경쟁자인 막시미누스를 무찔러 동로마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는 316년 발칸 반도의 영토를 빼앗았고 324년 아드리아노플(지금의 터키 에디르네)과 크리소폴리스(지금의 터키 위스퀴다르)에서 리키니우스를 패배시켜 동·서 로마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성공을 그리스도의 지원을 받은 덕분이라고 믿었다. 그가 막센티우스를 무찌른 뒤에 로마에 세운 개선문은 이 승리를 그 자신의 재능만이 아니라 '신이 준 영감' 덕분으로도 돌리고 있다. 콘스탄티누스 동상도 개선문과 동시에 세워졌는데, 콘스탄티누스가 십자가를 높이 쳐들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이 동상에는 "이 구원의 상징 덕분에 저는 당신의 도시를 폭군에게서 구했고, 원로원과 로마 국민에게 자유를 되돌려 주었습니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324년 리키니우스에게 승리를 거둔 뒤,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이 신앙심이 없는 자들을 진압하기 위해 신이 선택한 도구로서 브리튼 섬 북쪽 끝에 있는 해안에서 왔다고 말했으며, 페르시아의 왕 샤푸르 2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은 신의 신성한 힘의 도움을 얻어 이 지상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오기 위해 왔다고 선언했다.
 
 
[그리스도교(가톨릭)에 대한 헌신]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를 무찌른 직후에, 숱한 정치적 현안과 통치권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메디올라눔(지금의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리키니우스를 만났다. 이 회담에서 타협의 산물로 얻은 성과가 이른바 밀라노 칙령이다. 이 포고령의 골자는 그리스도교(가톨릭)도에 대한 관용을 확대하고 그리스도교도를 박해하던 시절에 몰수한 사유 및 공유 재산을 모두 되돌려준다는 것이었다.
 
오늘날 남아 있는 이 칙령의 사본은 사실상 리키니우스가 동로마 지역에 공포한 것들이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는 메디올라눔에서 리키니우스와 합의한 공동 정책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정책을 채택했다. 313년 그는 이미 로마 주교에게 황실 재산인 라테라노 궁전을 하사했고, 이곳에는 곧 바실리카 콘스탄티니아(지금의 라테라노의 산조반니 성당)가 새로 세워졌다.
 
성 세바스티아누스 성당도 이 시기에 착공되었을 것이다. 콘스탄티누스가 교회와 성직자의 재정적·법률적 특권, 로마 시민이 마땅히 져야 하는 담세 및 부역의 면제 등에 관한 법률을 공포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였다. 그는 313년에 아프리카 속주 총독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리스도교 성직자는 '신에게 최고의 봉사를 자유롭게 바칠 수 있을 때 국가에 큰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들이 종교적 의무에 전념하는 것을 세속 관리들이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콘스탄티누스가 개인적으로 어떤 '신학'을 가졌는가는 313년부터 320년대 초까지 북아프리카의 도나투스파에 관해 쓴 일련의 편지에 특히 뚜렷이 드러나 있다. 도나투스파는 일단 그리스도교에서 일탈했던 신부와 주교를 다시 교회에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콘스탄티누스가 가장 걱정한 점은 교회가 분열하면 그리스도교 신이 화를 낼 것이고, 따라서 로마 제국과 콘스탄티누스 자신에게 신의 보복이 내릴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교회의 분열을 초래하는 것은 바로 악마라고 그는 생각했다. 평생 동안 콘스탄티누스는 잘못을 제거하고 진정한 종교를 전파하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이며 황제의 지위를 바람직하게 이용하는 길이라고 확신했다.
 
그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의 주교'임을 자처한 것도 이런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밖에 제국 관리들과 그리스도교 성직자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가 밝힌 견해들을 보면, 그리스도교에 대한 그의 헌신이 일부 사람들이 언급한 것보다 훨씬 확고하고 분명해졌음을 알 수 있다.

 
콘스탄티누스가 종교 문제에 2번째로 관여한 것은 리키니우스를 무찌른 뒤였다. 그러나 이단인 아리우스파는 삼위일체의 본질을 어려운 그리스어로 복잡하게 설명했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의 성급하고 직선적인 기질만이 아니라 그의 교육적 배경과도 동떨어져 있었다. 황제는 325년 초여름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기 전에 이미 알렉산드리아의 아리우스에게 편지를 보내, 분쟁을 조장하는 것은 한가한 사람들이나 하는 학문적 논쟁일 뿐이며 쟁점은 지극히 사소하기 때문에 쉽게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그의 낙관은 빗나갔다. 이 편지도, 니케아 공의회 자체도,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이라고 아리우스파에게 촉구한 2번째 편지도 모두 분쟁을 해결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했다. 신학적 쟁점이 미묘한 만큼, 분쟁 당사자들도 완고하게 자신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콘스탄티누스가 죽은 뒤 40년이 넘도록 아리우스파는 사실상 동로마 제국의 정통 교리로 공인되어 있었다.

 
니케아 공의회는 콘스탄티누스 즉위 20주년 기념 행사와 거의 같은 시기에 열렸다. 주교들은 황제가 공의회에 참석해 경의를 표시한 보답으로, 콘스탄티누스 즉위 20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하여 행사를 빛내 주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가 축하 행사를 로마에서 되풀이하기 위해 326년에 서로마를 방문한 것은 가장 큰 정치적 위기를 초래했다. 그는 동로마를 떠나 있는 동안 맏아들이자 부황제인 크리스푸스와, 크리스푸스의 계모이며 자신의 2번째 아내인 파우스타를 죽이게 했다(이유는 아직도 밝혀져 있지 않음). 로마 방문도 그리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교도의 행진에 동참하기를 거부해 로마인들을 화나게 했다. 그는 짧은 방문을 마친 뒤 로마를 떠났고, 두번 다시 로마를 찾지 않았다.
 
 
[말년]

이 일련의 사건들은 콘스탄티누스의 통치 말년의 방향을 설정해주었다. 그는 리키니우스를 무찌른 뒤 비잔티움을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는데, 서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오자마자 이 도시를 훨씬 확대된 도시 계획에 따라 그의 상설 수도이며 '제2의 로마'로 재건하기 시작했다. 330년 5월에 끝난 콘스탄티노플 건설은 1세기 전부터 진행된 로마와 황제들 사이의 분열을 확인해 주었다. 로마는 제국의 전략적 필요성에 적합하지 않은 지역이 된 지 이미 오래였다. 로마는 아직도 엄청나게 부유하고 유명한 도시이자 제국의 중심지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제한된 중요성밖에 갖지 못하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가 성지 순례를 떠난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326년 황실에서 일어난 비극을 속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헬레나는 여행중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고 깊은 신앙심에서 우러나온 종교 활동을 펼쳤으며, 특히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에 교회를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콘스탄티누스의 장모인 유트로피아도 맘레에 교회를 세웠는데,
 
〈창세기〉에 대한 콘스탄티누스와 에우세비우스의 공동 해석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이곳 맘레에서 처음으로 신의 모습을 인간에게 드러냈다고 한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예수가 부활할 때까지 누워 있던 성스러운 무덤이 발견되자 열광한 콘스탄티누스는 그 자리에 웅대한 교회를 새로 짓도록 선동했으며, 노동력과 물자를 무제한으로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설계와 장식에 대한 제안도 아끼지 않았다(→ 성묘교회).
 
콘스탄티누스는 콘스탄티노플에서 교회 건축에 관심을 보였다. 그가 특히 관심을 쏟은 것은 하기아소피아와 사도교회였다. 로마에서는 320년대 후반에 산피에트로 성당이 착공되었으며, 콘스탄티누스는 이 성당 건축을 위해 많은 헌금을 했고 재산을 아낌없이 기부했다(→ 구성베드로 대성당). 한편 트리어와 아퀼레이아, 누미디아의 키르타, 니코메디아, 안티오크, 가자, 알렉산드리아를 비롯한 여러 지역의 교회들도 직접 또는 간접으로 그의 관심 덕분에 발전했다.

 
황제는 그리스도교를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기도 했다. 리키니우스를 무찌르기 전에도 그는 신학자이자 논쟁가인 락탄티우스를 트리어로 불러들여, 맏아들 크리스푸스의 가정교사로 임명했다. 말년에 그는 콘스탄티노플에서 갈수록 늘어나는 그리스도교도를 위해 성경을 새로 발간해 보급하도록 했다. 그는 군대를 위해 특별한 기도문을 만들었고, 원정중에는 막사 안에 이동 예배당을 설치했다. 그는 그리스도교 의식 및 그리스도교도가 특히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문제와 관련된 수많은 법률을 공포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기를 원했지만, 그럴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세례식을 연기했다. 그가 헬레노폴리스에서 병에 걸린 것은 아마 페르시아 원정을 준비하던 중으로 추측된다. 치료에 실패하자 그는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려 했지만, 니코메디아 근처에서 몸져누울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콘스탄티누스는 세례를 받고, 황제의 자줏빛 옷 대신 세례받는 사람이 입는 하얀 옷을 걸쳤다.
 
그는 337년 5월 22일 죽었으며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사도교회에 묻혔는데, 무덤 주위에는 사방에 각각 6개씩 기념물이 늘어서 있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적 과대망상증을 표현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확신, 즉 자신은 사도들의 후계자로서 그리스도교 전파를 위해 인생과 공직을 바쳤다는 믿음을 표현한 것이었다.
 
 
[평가]

콘스탄티누스의 통치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개인적 헌신이라는 배경에 비추어 해석해야 한다. 그러나 황제로서의 활동과 정책에 불명확한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로마의 여론은 황제들에게 혁신이 아닌 전통의 보존을 기대했다. 콘스탄티누스는 기존 관행에 경의를 표하면서 급작스럽고도 전면적 변화를 이룩해야 했기 때문에 그의 공공 정책에 일부 불명확한 점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콘스탄티누스는 시골의 전통적 주술에 대해서는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 이교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고전 문화와 교육은 계속 명성과 영향력을 누렸다.
 
그에 못지않게 시민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지방 신관들도 콘스탄티누스보다 오래 존속했다. 콘스탄티노플 자체는 주로 그리스도교 도시였으며, 도시 건설이 끝났을 때는 그리스도교 예배를 통해 신에게 도시를 헌납하고 완공을 축하했다. 유명한 이교도 예언자인 소파트로스도 이 축하 행사에 참석했다.

 
콘스탄티누스의 세속적 업적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황제 자신이 통치에 주로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종교 정책이 지나치게 불안정하고 혁신적이라고 생각하여 그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동시대인들이 그의 세속적 업적을 해석할 때도 이런 종교 정책의 특징을 그대로 적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콘스탄티누스의 업적 가운데 일부는 마지막 반 세기의 경향 속에 이미 내포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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