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무신론 서설(無神論序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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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무신론 서설(無神論序說)

가로수 0 5,811 2007.06.04 19:07

원저: 매튜(meta@pobox.com)

번역 및 주석: 김도형

역주

  • 번역은 직역을 원칙으로 했다. 그것이 번역에 대한 어렵지만 바른 태도라고 본다.
  • 원문에 있는 구두점은 비록 영어와 우리말의 차이가 엄연히 존재하지만 가능한 한 그대로 살렸다. 원문의 구조를 흐트리기 싫어서이다.
  • 이 번역의 원문은 <URL:http://www.infidels.org/news/atheism/intro.html>이다.
 

이 글에서는 무신론에 대한 일반적 소개를 하고자 한다. 논쟁의 여지가 많은 주제들에 대해서 가능한한 중립적이고자 노력은 했으나, 이 글이 단지 하나의 관점을 나타낼 뿐이라는 것을 독자들은 항시 기억해야 한다. 필자는 여러분들이 폭넓게 읽고 자신 나름대로의 결론을 이끌어내도록 권유하고 싶다; 몇 가지 관련 서적들은 첨부된 다른 글에 정리되어 있다.

집중적이며 진행되는 느낌을 주기 위하여 필자는 이 글을 무신론자와 유신론자(有神論者) 간의 가상적 대화 형식으로 서술했다. 가상의 유신론자가 던지는 질문들은 모두 alt.theism 뉴스 그룹이 만들어진 이후 거기서 반복적으로 수집된 것이다. 몇몇 단골 질문들(FAQ)에 대해서는 첨부된 다른 글에 답해져 있다.

이 글은 기독교적 시각에서 제시되는 질문들에 대해 답하는 것으로 확실히 편중되어 있음을 아무쪼록 유의하기 바란다. 그 이유는 FAQ 화일이 실제로 던져진 질문들을 반영하고 있으며, alt.theism 뉴스 그룹에서 전도하는 사람들은 대개 기독교인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가 종교에 대해 말할 때는 주로 기독교나 유대교, 회교와 같이 인간을 초월한 어떤 신성한 존재를 수반하는 종교를 말하는 것이다. 논의의 상당 부분은 다른 종교에도 적용될 것이나, 어떤 부분은 그렇지 못하다.

 

 

"무신론이란 무엇인가?"

무신론(無神論)은 신(神)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의도적으로(즉, 스스로 선택하여) 갖지 않는 것으로 특징지워진다. 어떤 무신론자들은 나아가서 특정 신이나 혹은 모든 신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신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을 종종 `약(弱) 무신론'적 자세라고 부른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혹은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 것은 `강(强) 무신론'으로 알려져 있다.
`신(神)'이라는 개념에 전혀 접해보지 못한 사람들에 관해서는: 그들이 `무신론자'인지 아닌지는 토론할 문제이다. (그러나) 종교에 전혀 맞닥뜨리지 않았던 사람을 여러분이 만날성 싶지는 않으므로 그것은 그리 중요한 토론은 아니리라...
그러나 강 무신론과 약 무신론 입장의 차이를 유념하는 것은 중요하다. `약 무신론'은 단순한 회의론(懷疑論)이다; 즉, 신의 존재에 대한 불신(不信)이다. `강 무신론'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적극적 믿음이다. 아무쪼록 모든 무신론자들이 `강 무신론자'라고 가정하는 함정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강'한 입장과 `약'한 입장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단순히 정도(程度)의 문제가 아니다.
일부 무신론자는 어떤 신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다른 이들은 전면적인 부정보다는 기독교의 신과 같은 특정한 신에 대해 자신의 무신론을 한정시킨다.
 

"그러나 신을 믿지 않는 것은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과 같지 않느냐?"[역주: 원문에는 신을 가리키는 데 `그'라는 남성 대명사를 사용하고 있으나 이 번역문에서는 `그것'이라는 중성 대명사로 통일했다.]

분명히 다르다. 어떤 명제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이 참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어떤 것이 참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일과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믿는 일은 동일하지가 않다; 어떤 이는 단순히 그것이 참인지 아닌지의 여부에 대해 모를 수도 있다. 이 입장은 불가지론(不可知論)이 된다.
 

"그러면 불가지론은 무엇인가?"

`불가지론(不可知論)'이라는 용어는 티. 에이취. 헉슬리(T. H. Huxley) 교수에 의해 1876년의 형이상학회(形而上學會) 모임에서 만들어졌다. 그는 불가지론자를 정의하기를, (강) 무신론과 유신론을 모두 부인하고 보다 높은 힘이 존재하느냐는 질문은 해결되지 않았으며 불가해(不可解)하다고 믿는 사람으로 하였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불가지론자는 신이 존재하는지의 여부는 우리가 확실하게 알지도 못하고 또한 알 수도 없다고 믿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불가지론자라는 용어는 그 이후, 이 문제가 본질적으로 불가지(不可知)의 것이라고 믿지는 않지만 대신 신의 존재 혹은 부재에 대한 증거가 결정적이지 못해서 그것에 대해 마음을 정하지 못한 사람들을 묘사하는 데도 사용되어 왔다.
불가지론이라는 용어의 사용에 대한 혼란을 줄이기 위해, 원래의 정의에 바탕을 한 사용은 `순수 불가지론'이라고 하고 두번째 정의에 근거한 사용은 `경험적 불가지론'이라고 수정할 것을 권한다.
용어란 불안정한 것이고 언어는 부정확하다. 어떤 사람이 자신은 무신론자 혹은 불가지론자라고 부르는 사실만으로 그의 철학적 관점을 당신이 알아냈다고 상정하는 것을 경계하라. 예를 들어, 많은 이들이 이 글에서 `약 무신론'이라고 부르는 것을 뜻하려고 `불가지론'을 사용하며, `강 무신론'을 지칭할 때만 `무신론'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무신론자'라는 용어가 이렇게 많은 미묘한 의미의 차이를 가지고 있으므로, 무신론자들을 일반화시키는 것이 매우 어려움을 또한 주의하라. 무신론자들은 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 당신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거의 전부이다. 예컨대, 우주에 대해 탐구하는 최선의 방법이 과학이라고 모든 무신론자들이 믿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자유사고자(自由思考者)'란 무엇이냐? 무슨 뜻이냐?"

자유사고자(freethinker)란 자유롭게 생각하는 사람이다―어떤 가능성이든지 고려할 각오가 되어 있고, 과학적 방법과 같이 모순이 없는 규칙들에 의거하여 이성(理性)을 사용함으로써 어떤 생각이 옳고 그른지를 결정하는 사람이다.
<종교로부터의 자유 재단(Freedom From Religion Foundation)><URL:http://www.infidels.org/org/ffrf/nontracts/freethinker.html>에 자유사고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소책자(non-tract)'[역주: `tract'란 주로 종교상의 소책자나 팜플렛을 뜻한다. <종교로부터의 자유 재단>에서 나온 팜플렛에 `tract'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부자연스러움을 이용한 장난이다]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무신론을 위한 철학적 정당성 혹은 논거는 무엇인가?"

무신론에 대한 철학적 정당성은 많이 있다. 특정인이 왜 무신론자가 되기를 택했는지 알기 위해서는 본인에게 묻는 것이 최선이다.
많은 무신론자들은 주요 종교에서 제시된 신이라는 개념이 본질상 자기모순적(自己矛盾的)이며 그러한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느낀다. 다른 사람들은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회의로 인한 무신론자이다.
무신론의 철학적 정당성을 펼친 책들은 많이 있다. 엠. 마틴(M. Martin)의 `무신론: 철학적 정당성(Atheism: A Philosophical Justification)'과 지. 에이취. 스미쓰(G. H. Smith)의 `무신론: 신의 부재에 대한 변론(Atheism: The Case Against God)' 같은 것들이다. 그러한 책들의 몇 개가 `무신론자 매체'를 나열한 문서에 있다.
물론 어떤 이들은 자신의 무신론을 뒷받침할 어떠한 특별한 논리적 논증도 가지지 않은 무신론자이다. 일부에게는 이것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편안하고 상식적인 입장이다.
 

"그러나 어떤 것의 부재를 증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그러한 말에 대한 반례(反例)가 다수 존재한다. 예를 들어, 다른 모든 솟수(素數)들보다 큰 하나의 솟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은 매우 간단하다. 물론 이것은 명확히 정의된 규칙을 따르는, 정의가 분명한 객체들을 취급하고 있다. 신이나 우주가 (이와) 유사하게 명확히 정의되었는지의 여부는 논의할 문제이다.
그러나 일단 신의 존재가 불가능함이 증명될 법하지 않다고 가정하더라도, 신의 부재를 추정할 만한 미묘한 이유들이 여전히 있다. 만약 우리가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면, 단 하나의 반례를 찾음으로써 이 가정이 가치 없음을 보이는 일은 항상 가능하다.
반면에 우리가 어떤 것이 존재하며 문제의 그것의 불가능함은 증명될 법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이 가정의 무효를 보이기 위해서는 그것이 없다는 것을 보이도록 그런 것이 발견될 수도 있는 모든 가능한 곳을 빠짐없이 탐색하는 일이 요구될 수 있다. 그렇게 빠짐없이 탐색하는 일은 종종 비실제적이거나 불가능하다. 가장 큰 솟수에 대해서는 그런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우리가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없는 한 우리는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해야 한다는 것을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유신론자들조차 대개는 이 규칙을 따른다; 비록 그들이 일각수(一角獸)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정적으로 증명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각수를 믿지는 않는다.
신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아마도 검증될 수 없는 가정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신이 어디에도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그것이 있을 법한 모든 곳을 빠짐없이 탐색할 수는 없다. 그래서 회의적 무신론자는 기본적으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 그것이 우리가 시험할 수 있는 가정이기 때문이다[역주: 이러한 태도는 과학에 대한 칼 포퍼(Karl Popper)의 정의를 우리에게 연상시킨다].
강 무신론을 표방하는 사람들은 보통 어떤 종류의 신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여러 종교의 추종자들이 묘사하는 종류의 신들에 적용되도록 자신들의 주장을 제한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어떤 신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적으로 증명하는 일은 불가능할 지 모르지만, (예컨대) 특정 종교의 경전에서 묘사하는 하나의 신은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은 가능할 수도 있다. 오늘날의 어떠한 종교에서 묘사하는 신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까지도 가능할 지 모른다.
실제적으로, 어떠한 종교에서 묘사되는 신이든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은 어떤 신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과 대단히 유사하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신을 빠짐없이 반증(反證)하는 것의 불가능성에 근거한 반론이 사실 적용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다르다.
 

"하지만 만약 신이 본질적으로 검출이 불가능하다면?"

만약 신이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의 우주와 영향을 주고 받는다면, 그 상호 작용의 영향은 측정이 가능해야만 한다. 그러면 그것과 우리 우주와의 상호 작용은 검출이 가능할 것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만일 신이 본질적으로 검출이 불가능하다면, 그것은 신이 어떤 방식으로도 우리 우주와 상호 작용하지 않는 경우여야만 한다. 만일 신이 우리 우주와 상호 영향을 전혀 주고 받지 않는다면 그것이 존재하는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고 많은 무신론자들은 주장할 것이다.
만약 성서를 믿어야 한다면 신은 유태인들에게는 쉽사리 검출이 가능했다. 분명히 오늘날에도 그것은 여전히 검출이 가능해야 하지 않은가? 왜 상황이 바뀌었는가?
과학적으로 검증이 가능한 물리적 방식으로 신이 상호 작용해야 한다고 내가 요구하는 것이 아님을 유의하라. 내가 어떤 계시, 어떤 직접적인 신에 대한 체험을 받는 일도 잠재적으로 있을 법하다. 그와 같은 경험은 타인에게 전달될 수 없을 것이고 과학적 검증이 곤란하다―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어떤 다른 증거만큼이나 절대적이리라.
하지만 직접적인 계시이건 혹은 관찰에 의해서건, 신의 존재에 의해 일어나는 어떤 효과를 감지하는 것이 분명히 가능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어떻게 신을 모든 다른 존재하지 않는 것들과 구별할 수 있겠는가?
 

"신은 독특하다. 그것은 하나님이고, 우주의 창조자이다. 그것은 정의(定義)상 존재해야만 한다." [역주: 신의 정의를 `우주의 창조자'라고 내렸고, 우주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므로 그것을 만든 신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주장이 예리한 것인 양 통용되는 곳도 있다.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다.]

사물은 단지 그것이 존재하도록 정의되었다고 해서 존재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산타 클로스의 정의에 관한 많은 것―그가 어떻게 생겼으며, 하는 일은 무엇이고, 어디에 살며, 그의 (썰매를 끄는) 순록이 뭐라고 불리는지 등등―을 안다. 그래도 그것이 산타가 존재함을 뜻하는 것은 여전히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신이 존재한다고 논리적으로 증명을 해 낸다면?"

당신의 증명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당신이 `신'이라고 할 때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분명하고 엄밀한 정의를 생각해 내야만 한다. 논리적인 증명은 증명하려고 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정의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두 안다!"

상이한 종교들은 `신'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매우 다른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 그 종교들은 신이 몇이나 있는지, 그것들이 남성인지 여성인지 등등과 같은 기본적 사안에 관해서조차 일치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신'이라는 용어로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무신론자의 생각은 당신의 견해와는 매우 다를 수도 있다.
 

"좋다. 그러면 만약 내가 `신'이라고 할 때 의미하는 바를 정의한 뒤 그것이 존재함을 논리적으로 증명한다면 당신에게 충분하겠느냐?"

수 세기(世紀) 동안의 노력이 지난 후에서조차, 신의 존재에 대한 물샐 틈 없는 논리적 증명은 누구도 생각해 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종종 자신들이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여긴다.
불행하게도 현실은 논리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신이 존재함을 당신이 엄밀하게 증명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실제로는 그리 별일이 되지 못할 것이다. 당신의 논리 규칙이 항상 참을 유지하지는 않을―당신의 논리 체계에 결함이 있을―수 있다. 당신의 전제가 틀렸을 수도 있다. 심지어 현실이 논리적으로 일관되지 않을 수조차 있다. 결국,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관찰하는 것이다. 논리는 단지 어디를 찾아야 할지 혹은 어떻게 봐야 할지에 대해 당신에게 알려 줄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신에 대한 대부분의 논리적 논증은 이 일조차 달성하지 못한다.
논리란 자료를 분석하고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추론(推論)하기에는 유용한 도구이다; 그러나 만약 논리와 현실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현실이 이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에게는 어떤 것도 당신에게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납득시키지 못할 것 같다."

`신'의 분명한 정의에다 객관적이면서 어쩌지 못할 약간의 뒷받침하는 증거가 추가되면 많은 무신론자들을 납득시키기에 충분할 것이다.
허나 그 증거는 객관적이어야 한다; 다른 이의 종교적 체험에 대한 일화적(逸話的) 증거로는 충분치 못하다. 그리고 강력한, 어쩔 수 없는 증거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신의 존재라는 것은 평범한 주장이 아니기 때문이다―그리고 평범치 않은 주장에는 평범치 않은 증거가 요구된다.
 

"좋다. 무신론에 철학적 정당성이 있다고 당신이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종교적 믿음이 아니냐?"

철학적 토론 형식을 띤 가장 흔한 소일거리들 중 하나가 `재정의(再定義) 놀이'이다. 이 놀이를 비꼬아서 보면 다음과 같다:
갑(甲)이라는 사람이 논쟁의 여지가 많은 진술(陳述)을 함으로써 시작된다. 그것이 참일 수 없다고 을(乙)이라는 사람이 지적할 때, 갑은 을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에 도달할 때까지 자신의 진술에서 사용된 용어들을 조금씩 재정의한다. 그런 뒤 갑은 그 진술과 을이 그것에 동의했다는 사실을 함께 기록하고는 계속 진행한다. 종국에 가서는 갑은 그 진술을 `동의한 사실'로 사용하되, 그 속에 포함된 용어들은 을의 동의를 구하는 데 필요했던 그 모호한 재정의 대신에 모두 그의 처음 정의대로 사용한다. 겉보기에 일관성이 없게 비칠까봐 을은 그 놀이를 계속 하기 십상이리라.
이 여담의 요점은 "무신론은 종교적 믿음이 아니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종교적'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바에 결정적으로 좌우된다는 점이다. `종교'는 일반적으로 인간을 초월한 권능(權能)―특히 어떤 종류의 신―에 대한 믿음과 신앙 및 숭배로 특징지워진다.
(불교의 어떤 종파들은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종교'가 아니라는 점은 이왕 말하는 김에 지적해 둘 가치가 있다.)
분명히 무신론은 인간을 초월하는 어떤 종류의 힘에 대한 믿음이 아니며, 진지한 의미가 있는 어떤 점에서도 숭배로 분류되지는 않는다. 무신론을 포함하도록 `종교적'이라는 것의 정의를 넓히면 인간 활동의 다른 많은 측면들이 졸지에 역시 `종교적'인 것으로 분류되어 버리는 결과를 낳기 쉽다―과학, 정치, 그리고 텔레비젼 시청과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좋다. 아마도 그것은 단어의 엄격한 뜻에서는 종교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무신론(혹은 과학)에 대한 믿음은 종교가 그러한 것처럼 여전히 신앙 행위이지 않느냐?" [역주: 어떻게 해서든 무신론을 유신론과 마찬가지로 종교 내지 `믿는 행위'로 만들려고 하는 것은 유신론자들의 대체적 경향으로 보인다. 1996년도에 키즈 전자 게시판(KIDS BBS)의 `자유 표현' 보드에서 있었던 `진화론-창조설 논쟁'에서 창조설의 한 지지자가 진화론의 지지자가 쓴 글 중에서 "이러저러한 지금까지의 증거에 의하여 현재로는 진화론이 맞다고 `믿는다'"는 표현에서 `믿는다'는 단어를 꼬투리로 해서 "진화론도 창조설과 마찬가지로 역시 과학이 아닌 `믿는 것'일 뿐이다"는 황당한 주장을 한 적이 있다. 바로 전의 질문과 현재의 질문은 그때를 연상시킨다.]

첫째, 회의적 무신론이란 것이 사람이 실제로 믿는 그 무엇인지는 전적으로 분명한 일은 아니다.
둘째, 우리가 경험하는 지각적 자료로부터 어떤 의미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얼마간의 핵심(核心)이 되는 믿음이나 가정을 채택하는 것이 필연적이다. 대부분의 무신론자들은 가능한 한 적은 수의 핵심적 믿음을 채택하려고 한다; 그리고 만약 경험이 그것들을 의심스럽게 하면 그것들마저도 검증을 필요로 한다.
과학은 얼마간의 핵심적 가정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물리 법칙은 모든 관찰자(혹은, 적어도 관성계(慣性系) 내의 모든 관찰자)에게 동일하다고 일반적으로 가정한다. 무신론자들이 하는 핵심적 가정이란 이와 같은 것들이다. 만약 그런 기본적 생각이 `신앙 행위'라고 불린다면 우리가 아는 거의 모든 것이 신앙 행위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해야 될 것이고, 따라서 그 용어는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신앙이란 어떤 것에 대한 완전하고 확신에 찬 믿음을 지칭하는 데 보다 자주 사용된다. 그러한 정의에 의하면 무신론과 과학은 확실히 신앙 행위가 아니다. 물론 어떤 것이 `확실하다'고 주장할 때, 개별적인 무신론자나 과학자가 종교적 추종자만큼이나 교조적(敎條的)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 경향은 아니다; 우주가 존재한다고 확신을 가지고 진술하는 데 내켜하지 않을 무신론자들도 여럿 있다.
신앙이란 또한 지지하는 증거나 증명이 없는 믿음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다. 회의적 무신론은 믿는 것이 없으므로, 분명히 이 정의에 들어맞지 않는다. 강 무신론은 (이 정의에) 보다 근사(近似)하기는 하나, 가장 교조적인 무신론자조차도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때 실험 자료(혹은 그것의 결여)를 언급하는 경향이 있을 것이므로 여전히 꼭 들어맞지는 않는다.
 

"무신론이 종교적이지 않다면 분명히 그것은 반종교적(反宗敎的)이겠지?"

모든 사람을 `지지' 아니면 `반대', `친구' 아니면 `적'으로 분류하려는 것은 인간의 불행한 경향이다. 진실은 그렇게 명쾌하지가 않다.
무신론은 논리적으로는 유신론에 반대되는 입장이다; 그런 뜻에서는 `반종교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적 신자가 무신론자를 `반종교적'이라고 얘기할 때는, 그들은 대개 무신론자가 유신론자에 대해 어떤 반감(反感)이나 적의(敵意)를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말한다.
무신론자가 종교에 대해 적대적이라고 이렇게 분류하는 것은 지극히 공평치 못하다. 사실 유신론자에 대한 무신론자들의 태도는 넓은 범위에 걸쳐져 있다.
대부분의 무신론자들은 "나도 살고 너도 살자"[역주: 원문은 "live and let live"로서 "세상은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 혹은 "세상은 서로 의지하고 살게 마련"이라는 속담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원문의 직역이 보다 맥락에 어울린다고 생각된다]는 자세를 취한다. 질문을 받지 않는 한, 어쩌면 가까운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그들은 대개 자신의 무신론을 언급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많은 나라에서 무신론이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일부 무신론자들은 대단히 반종교적이고, 가능할 때는 심지어 타인을 `전향'[역주: 원문에서 해당 단어는 `convert'로서 주로 `기독교로 개종(改宗)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따옴표를 붙인 것이다]시키려고 시도할 지도 모른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그러한 반종교적 무신론자들은 동구권 국가들을 빼고는 사회에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잠시 여담을 하자면: 소비에트 연방은 바로 미국처럼 원래는 정교 분리(政敎分離)로 출발했다. 소비에트의 시민들은 법적으로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자유롭게 예배를 볼 수 있었다. `국가 무신론'의 성립은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주민에 대해 완전한 통제력을 획득하기 위해 교회를 파괴하려고 시도할 즈음 이루어졌다.)
어떤 무신론자들은 자신의 믿는 바에 대해서 매우 말이 많지만, 그것은 종교가 자기 영역이 아닌 문제들―예컨대 미국 정부―에 침범하는 것을 볼 때뿐이다. 통상적으로 그러한 사람들은 정교 분리가 유지되어야만 한다고 염려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국가의 운영에 종교가 참견할 권리를 허용치 않는다면, 분명히 그것은 국가 무신론과 동일한 것이겠지?"

종교적 믿음의 문제와 관련하여 국가가 법률을 제정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 정교 분리의 원칙이다. 특히 이것은 국가가 한 종교를 희생시켜 다른 종교를 장려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어떤 믿음도 고무(鼓舞)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여전히 종교도 순수히 세속적인 문제의 논의에 간섭할 권리를 가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역사적으로 종교 신자들은 많은 정치적 개혁의 촉진을 주도해 왔다. 심지어 현재도 대외 원조의 증액 운동을 하는 많은 단체들이 종교적 운동 단체로서 설립된다. 그들이 비종교적 문제와 관련해 운동을 하는 한, 그리고 종교적 근거로 차별하지 않는 한, 대부분의 무신론자들은 그들이 참견할 권리를 가지는 것을 보면서 매우 기뻐한다.
 

"학교에서의 기도는 어떤가? 만약 신이 없다면 당신은 왜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을 상관하는가?"

기도하는 사람들이 유권자이고 입법자(立法者)이며,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냥 모르는 체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학교 내에서의 기독교인들의 기도는, 비록 참여할 필요가 없다고 비기독교인들에게 알렸다 할지라도 위협적이다. 그 기도가 교사에 의해 인도(引導)되거나, 아니면 공식적으로 지원된다면 특히 나쁘다.
종교적 그리고 비종교적 믿음의 다양성이 뜻하는 바는, 어떤 공식적 행사이든지 거기에 참석한 모든 이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의미있는 기도를 공식화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미국의 공립학교 체계가 학교 내에서의 공식적 기도 시간을 통해 특정한 종교적 믿음의 지원을 금지한 이유 중 하나이다. 물론 어린이들은 자유 시간에는 자기가 원하는대로 기도하는 데 있어서 완전히 자유다; 학교에서 기도하는 것을 막으려 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는 없다.
 

"당신은 대외 원조의 증가를 위해 운동하는 기독교인들을 언급한 바 있다. 무신론자들은 어떤가? 왜 무신론자 자선 단체나 병원은 없는가? 무신론자들은 종교적 자선 사업에 반대하는 것은 아닌가?"

무신론자들이 기부할 수 있는, 종교적 목적이 없는 자선 단체들도 많이 있다. 어떤 무신론자들은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을 위하여 종교 자선 단체에도 역시 기부를 한다[역주: 문맥이나 논조로 봐서, "비록 종교 자선 단체에 기부를 하더라도 결국은 그것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갈 것"이라고 생각되므로 바로 그 점 때문에 종교 자선 단체임에도 꺼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또 다른 가능한 해석은 "실제적인 선행(善行) 그 자체를 위해서 기부를 한다"고 볼 수도 있는데, 무신론자의 철학적 배경을 유추해 볼 때 전자가 보다 그럴 듯한 표현이라고 여겨진다]. 어떤 무신론자들은 심지어 일신교(一神敎)적 바탕 위에 설립된 자선 단체를 위해서 자원 봉사 활동을 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무신론자들은 무신론을 자선과 연관시켜 떠들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에게 무신론은 그저 단순하고 명백한 일상적 일이며 자선 또한 그러하다. 많은 이들은 간단한 자선을 특정한 종교적 믿음들을 끈덕지게 선전하는 것에 대한 하나의 핑계로 이용하는 일이, 혼자 잘난 체 한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좀 인색하다고 느낀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기 위해 병원을 세우는 일은 `약' 무신론자들에게는 좀 괴상한 생각이다[역주: 그러기에 무신론자 병원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은 내 생일이 아니다"라고 말하기 위해 잔치를 벌이는 것과 다소 유사하다. 왜 그런 법석인가? 무신론은 별로 복음주의적(福音主義的)이지 않다.
 

"당신은 무신론이 반종교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마도 어떤 이의 교육에 대한 역작용, 일종의 반항이겠지?"

어떤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그럴 것이다. 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어떠한 종교적(혹은 무신론자의) 생각도 강요하려 하지 않는 부모를 모시고 있으며, 그 중 많은 이가 자신들을 무신론자라고 부르기를 선택한다.
일부 종교적 사람들이 무신론자의 훈도(薰陶)에 대한 역작용으로, 달라지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서 종교를 선택한 경우가 있음도 또한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반면에 많은 사람들은 타인의 기대에 순응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종교를 선택한다.
대체적으로 우리는 무신론이나 종교가 반발인지 순응인지에 대해 확실히 결정할 수는 없다; 비록 일반적으로 사람은 독자적으로 행동하거나 생각하기 보다는 단체와 함께 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무신론자들은 종교적 사람들과 어떻게 다른가?"

그들은 신을 믿지 않는다. 그것이 전부다.
무신론자들은 헤비 메틀을 들을 수―심지어 거꾸로―도 있고, 가사를 알면서도 베르디의 진혼곡(鎭魂曲)을 선호할 수도 있다. 그들은 하와이 셔츠를 입을 수도 있고, 몽땅 검정색으로 차려 입을지도 모르고, 심지어 주황색 가사(袈娑)를 걸칠 수도 있다. (많은 불교도들은 어떤 종류의 신에 대한 믿음도 없다.) 어떤 무신론자들은 성경을 가지고 다니기까지 한다―물론 반박을 위해서다!
당신이 누구이든지 간에 깨닫지도 못한 채로 여러 무신론자들을 만났을 가능성이 있다. 무신론자들은 대개 행동과 외양에서 별다르지 않다.
 

"별다르지 않다고? 그러나 무신론자들은 종교적 사람들보다 덜 도덕적이지 않느냐?"

그것은 경우와 상황에 달렸다. 만약 당신이 도덕성을 신에 대한 복종으로 정의한다면 물론 무신론자는 어떤 신도 따르지 않기 때문에 덜 도덕적이다. 그러나 보통 도덕성에 관해 말할 때 사람들은 사회 내에서 용인되는(`옳은') 행동과 용인되지 못하는(`그른') 행동에 관해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최대한 성공하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과 협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대부분의 무신론자로 하여금 순수히 자기 보존의 목적으로라도 `반사회적'이거나 `부도덕적'인 행위를 못하도록 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된다.
많은 무신론자들은 단순히 다른 사람들과 감정을 공유하려는 자연스런 성향을 느끼기 때문에 `도덕적'이고 `동정적'으로 행동한다. 그런데 왜 그들이 타인에게 일어난 일을 염려하느냐고? 자신들도 모른다. 그저 그런 것이다.
`부도덕하게' 행동하면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무신론을 이용하려는 사람들도 당연히 있다. 그러나 `부도덕하게' 행동한 뒤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종교적 신념을 이용하려는 사람들도 똑같이 많다. 에를 들자면:
"여기 전적으로 받아들여야 마땅할, 신뢰할 수 있는 말씀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헌데 바로 그 이유로,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믿고 영생(永生)을 얻으려는 자들을 위한 본보기로서, 그 분의 한없는 인내를 나 안에서... 보여주시는 은총을 받았다. 이제 영원하고, 불멸인, 모습을 보이지 않는 왕이신 유일한 하나님께 경모(敬慕)와 영광이 영원히 언제까지나 있기를."
위의 인용문은 위스컨신주 밀워키시의 악명높은 식인(食人) 연쇄 살인범 제프리 다머(Jeffrey Dahmer)에 의해 1992년 2월 17일 법정에서 행한 진술에서 가져 온 것이다. [역주: 위의 인용문 자체만으로 그것을 정확하게 이해하기는 좀 어렵지만, 자신과 같이 잔인하고 죄많은 인간까지 구원할 정도로 예수의 인내심이 강하다는 뜻으로 한 말 같다.] 무신론자인 살인마가 있으면 종교적 살인마도 있는 것 같다. 그러면 보다 평범한 도덕에 관해서는 어떨까?
로우퍼 기구(Roper Organization)가 행한 조사에 따르면 `거듭난(born again)' 경험 이후 행동이 퇴보했음이 발견되었다. `거듭나기' 이전에는 응답자의 단지 4%만이 음주 운전을 했다고 말한 반면, 개종 후에는 12%가 그랬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개종 이전에는 5%가, 개종 이후에는 9%가 불법적인 약물을 사용했다. 구원 이전에는 2%가 부정한 성관계를 했다고 시인했다; 구원 이후에는 5%였다.
[`오늘의 자유사고(Freethought Today)', 1991년 9월호, 12쪽]
따라서, 아무리 잘 봐줘도 종교가 도덕적 행동에 있어서 독점을 하고 있지는 못하다고 여겨진다.
물론 매우 많은 사람들이 청소년기와 20대 초반에 기독교 신앙으로 (그리고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전향을 한다. 이 시기는 사람들이 술을 마시기 시작하고 성적(性的)으로 활발해지는 때이기도 하다. 위의 숫자들은 단지 기독교 신앙이 도덕적 행동에 별 영향이 없거나 부도덕한 행동의 전면적인 감소를 일으키기에는 영향력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뿐일 수도 있다[역주: 겸손한 태도다. 이 조사의 결과가 반대로 나왔을 때 기독교도들이 보였을 자세를 상상해 보면...].
 

"무신론자 도덕 체계같은 것도 있나?"

당신이 "무신론자를 위한 도덕같은 것이 있는가?"를 의미한다면 위에서 설명된 것처럼 대답은 `그렇다'이다. 많은 무신론자들은 도덕에 대해 적어도 종교적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것만큼은 강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역주: 무신론자들의 도덕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URL:http://www.infidels.org/news/atheism/sn-morality.html>에 있다].
만약 당신이 "무신론은 어떤 특징적인 도덕률(道德律)을 가지고 있는가?"를 뜻했다면 대답은 `아니다'이다. 무신론 그 자체는 어떤 사람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관해 별로 시사(示唆)하는 바가 없다. 많은 무신론자들은 다른 이유에서이기는 하나 유신론자들과 동일한 `도덕 규칙들'을 많이 따른다. 무신론자들은 도덕이란 것을 어떤 초자연적 존재가 명한 규칙들의 집합으로서가 아니라 세상이 돌아가`야 한다'고 느끼는 방식에 따라 인간이 만든 어떤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무신론자는 그저 신을 거부하는 유신론자가 아니냐?" [역주: 여기서의 `거부(拒否)'는 가치 중립적인 표현이 아니라,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떼를 쓰는 아이와 같은 태도'라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종교로부터의 자유 재단>에 의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한 무신론자들의 90% 이상이 종교가 자신들에게는 듣지를 않았기에 무신론자가 되었음이 밝혀졌다. 그들은 종교적 믿음들이 자신이 주변을 관찰한 바와 근본적으로 모순된다는 점을 발견한 것이다.
무신론자들은 무지(無知)나 거부로 인한 불신자가 아니다; 그들은 선택을 통한 불신자이다. 그들의 절대 다수는 하나 이상의 종교를 때로는 매우 심도 있게 공부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종교적 믿음의 각하(却下)라는, 조심성 있고 숙고(熟考)한 후의 결정을 내린 것이다.
물론 이 결정은 개인 성격의 불가피한 결과일 수도 있다. 타고나기를 회의적인 사람에게 흔히 무신론이라는 선택은 이치가 닿는 유일한 것이며, 따라서 그 사람이 정직하게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선택이다.
`거부하다'는 단어는 `어떤 것이 참임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뜻으로 사용될 수 있다. 무신론자는 그런 의미에서만 신의 존재를 거부한다. 그들은 증거를 일부러 무시하면서 `거부를 해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들은 반드시 신의 부재를 자신 있게 단언(斷言)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신을 논의한다는 것이야말로 확실히 그것이 존재한다는 암묵적(暗默的)인 인정이 아니냐?"

천만에. 사람들은 크리스마스마다 산타 클로스에 대해 얘기한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굴뚝을 타고 내려와서 우리 모두에게 선물을 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팬터지 게임을 하는 사람들은 오르크[역주: 상상 속의 바다 괴물]와 고블린[역주: 악귀(惡鬼)]으로부터 타이탄[역주: 거인족]과 미노타우르스[역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우두인신(牛頭人身)의 괴물]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괴상한 생물들에 대해 논의한다. 그것들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신론자들은 신을 믿고 싶어하지 않느냐?"

무신론자는 아무도 자신을 감시하지 않는 듯이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은 아무리 `대형(大兄)'이라는 존재의 마음씨가 좋다고 할지라도 감시당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어떤 무신론자들은 신을 믿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그런데 그래서 어쨌다는 것이냐? 어떤 것이 사실이기를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은 그것을 믿어야 하느냐? 그런 접근 방식의 위험들은 명백하다. 무신론자들은 흔히 어떤 것을 믿고 싶어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결론 내린다; 그 믿음을 위한 증거가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무신론자들은 당연히 신의 존재에 대한 증거를 보지 못한다―그들은 그러기를 자신들의 영혼에서 내켜하지 않는다!" [역주: 유신론자들의 가장 전통적이면서 또한 역겨운 오만스런 발언들 중 하나이다. 어떻게 이런 말을 논리적 토론에서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말을 할 바에는 애시당초 토론을 시작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현재도 여전히 가장 애용되는 것들 중 하나이다.]

대부분은 아닐지라도 많은 무신론자들은 이전에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앞에서 설명되었다시피 절대 다수는 신이 존재한다는 가능성을 심각하게 숙고해 보았다. 많은 무신론자들은 신에게 이르기 위하여 기도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물론 어떤 무신론자들은 열린 마음이 부족하다; 그러나 모든 무신론자들이 편견(偏見)을 가지고 있으며 성실치 못하다고 억측하는 일은 무례하고 편협하다. "신은 당연히 존재하며 당신이 제대로 보지 않을 뿐이다"와 같은 비평은 오만한 것으로 보이기 쉽다.
만약 당신이 무신론자들과의 철학적 토론에 참여하기를 바란다면, 의심되는 것이라도 그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하여 그들이 신을 간구(懇求)했다고 말할 때 그들이 진지했음을 가정하는 것이 분명히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들이 기본적으로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믿으려 하지 않는다면 토론은 쓸데 없다.
 

"무신론자에게는 전 인생이 완전히 무의미하지 않느냐?"

많은 무신론자들이 의미 있는 인생을 산다.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컨대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결정하고 그 목표들을 추구한다. 그들은 영생을 기원함으로써가 아니라 계속 살아갈 타인들에게 하나의 영향을 줌으로써 자신들의 인생을 가치있게 만들려고 한다. 예를 들면 어떤 무신론자는 역사에 자취를 남기기를 희망하여 자신의 생을 정치 개혁에 바칠 수도 있다.
우연한 결과에서 `의미'나 `목적'을 찾으려는 것은 인간의 타고난 경향이다. 그러나 `인생'이 `의미'를 가지는 어떤 것인지는 전혀 분명치 않다.
달리 말하면, 질문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이 실제로 질문할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무신론자들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일까?"라고 묻는 것은 "한 잔 커피의 의미는 무엇일까?"라고 묻는 것 만큼이나 어리석다고 믿는다. 그들은 인생이 어떠한 목적이나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저 있을 뿐이라고 믿는다.
또한 인간의 존재에 `의미'를 주기 위해 일종의 초자연적인 외적 힘이 필요하다면, 이것은 분명히 어떤 가상적 신의 존재도 의미가 없게 만들지 않겠는가? [역주: 외적 존재인 신만이 인간의 존재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뿐이라면, 그 신의 존재에는 무엇이 의미를 부여하겠느냐는 반박이다.]
 

"그러면 무신론자들은 어려울 때 어떻게 위안을 찾느냐?" [역주: 신기할 정도로 유신론자들의 말은 비슷비슷하고 되풀이되는 경향이 있다―사실 그것은 어설픈 무신론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이긴 하다. 1996년도라고 기억되는데, 키즈 전자 게시판의 `개신교' 혹은 `자유 표현' 보드에서 어떤 개신교도가 이런 내용의 말―어쩌면 표현은 거꾸로였는지 모르겠다. 예컨대 "무신론자들은 기쁨을 도대체 누구와 함께 할 수 있겠는가!"와 같은―을 하여 여러 사람들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위안을 얻는 방법은 많이 있다:
  • 가족과 친구들
  • 애완 동물들
  • 음식과 술
  • 음악, 텔레비젼, 문학, 예술, 그리고 오락
  • 스포츠 혹은 운동
  • 명상(暝想)
  • 정신 요법
  • 약물
이것은 어려움에 대처하기에는 다소 공허하고 허약한 방법처럼 들릴 지도 모르겠으나, 그러면 또 어쨌단 말이냐? 어떤 것들이 위안을 주기에 사람들이 그것을 믿어야만 하느냐? 아니면 현실이 아무리 가혹하다고 할 지라도 그것을 직면해야만 하느냐? [역주: 사실 이 마지막 반문은 무신론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유신론자들이 무신론자들에게 물어야 마땅한 것이다. 무신론자들이 보기에, 존재하지 않을 성 싶은 신에게 의지함으로써 현실을 회피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유신론자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힐난성 질문에 대해 유신론자들이 방어용으로 쓸 만한 반문이다. 이 반문은 어느 입장에서 보더라도 정당성을 가진다. 그러나 무신론자와 유신론자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가혹한 현실로부터 눈을 돌려서 위안을 구하는 그 대상을 유신론자는 `숭배하고', 무신론자는 `숭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신론자들은 단지 그것을 즐기거나 그것으로부터 위안을 얻을 뿐이지 신앙의 대상이 아니다.]
결국 그것은 당사자의 결정이다. 대부분의 무신론자들은 단지 그것이 편안하게 느끼게 해준다고 해서 그렇지 않았으면 믿지 않았을 것을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위안보다 진실을 우선시 하며,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 때로 자신들을 불행하다고 느끼게 한다면 그것은 단지 불운(不運)일 따름이다. 진실은 종종 상처를 주는 것이다.
 

"무신론자들은 갑자기 자신들이 틀렸음이 밝혀질까 봐 걱정하지 않느냐?"

짤막한 대답은 "아니, 당신은 그러냐?"이다.
많은 무신론자들은 여러 해 동안 무신론자였다. 그들은 신의 존재에 대한 많은 논증과 상상된 증거들에 마주쳤지만, 그 모든 것들이 가치 없고 결정적이지 못함을 발견했다.
수 천년 동안의 종교적 믿음은 신의 존재에 대한 좋은 증명 하나 만들어 내지 못했다. 따라서, 무신론자들은 가까운 장래에 자신들이 틀렸다고 증명될 것 같지 않다고 느끼는 경향이 있으며 그것에 관한 걱정은 끊고 있다.
 

"그렇다면 왜 유신론자는 자신들의 믿음에 의문을 제기해야 하느냐? 동일한 논법이 적용되지 않느냐?"

아니다. 왜냐하면 의문이 제기되는 믿음들이 같은 종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약 무신론은 회의적인, 취해야 될 `기본 입장'이다; 그것은 아무 것도 단언하지 않는다. 강 무신론은 소극적 믿음이다[역주: 왜 강 무신론이 소극적 믿음인지는 앞에서 토론이 되었다. 증명의 과학성 때문에 무신론이 보다 조심스러운 선택이라는 것이었다]. 유신론은 매우 강한 적극적 믿음이다.
때로는 무신론자들도 유신론자들이 끼칠 수 있는 매우 실제적 해악(害惡)―단순히 신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이들에게―때문에 그들이 스스로의 믿음에 대해 의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종류의 해악?"

종교란 인류에 대한 엄청난 재화(財貨)와 노동력의 부담을 상징한다. 그것은 교회 건축에 자신들의 돈을 낭비하는 종교 신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교회 건축, 기도 등등에 소모되는 그 모든 시간과 노력을 생각해 보라. 그 노력이 얼마나 보다 잘 쓰일 수 있었겠는지를 상상해 보라.
많은 유신론자들은 영유(靈癒; miracle healing)를 믿는다. 성직자에 의해 `치료'를 받으면서 의사에 의해 처방된 약의 복용을 중지한 뒤 그 결과 사망한 수많은 환자들이 있어 왔다. 어떤 유신론자들은 종교적인 동기에서 수혈을 거부하여 사망하고 있다.
산아 제한―특히 콘돔―에 대한 로마 카톨릭의 반대가 많은 제삼세계 국가에서의 인구 과잉 문제를 확대시키고 전세계적인 후천성 면역 결핍증(AIDS)의 확산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은 논증이 가능하다.
종교 신자들은 자기 자녀들이 무신론자가 되거나 다른 종교의 신자와 결혼하는 것을 허용하느니 차라리 죽여버린다고 알려져 있다[역주: 역주자 개인적인 견해로서 유신론자들의 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행태들 중의 하나가 자신의 자식들에게 자기가 믿는 신앙을 강요하는 것이다. 자식을 부모에게 종속된 하나의 부속품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스스로 생각한다면, 그럴 권리는 부모들에게 없다는 데 동의하리라고 본다. 어떤 사람에게 종교는 일종의 레크리에이션과 비슷하여 아무 종교를 선택하든지 별 영향이 없는 경우도 있지만, 마찬가지로 다른 어떤 여린 영혼에게 종교는 막대한―부정적인 것을 포함하여―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스스로 책임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는 나이에 이를 때까지 부모의 종교를 자식의 머리에 주입하는 `폭거(暴擧)'는 삼가해야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종교 지도자들은 신성 모독(神聖冒瀆)을 구실로 살인을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역주: 샐먼 루시디(Salman Rushdie)가 그의 작품 `악마의 시(The Satanic Verses)'로 인해 이란의 종교 지도자 아야툴라 호메이니로부터 살해의 표적이 된 것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과연 이것이 회교만의 특징일까? 회교는 미신 혹은 `사이비' 종교―사실 이것들과 `정통' 종교의 차이란 것이 모호하기 짝이 없지만―라고 근거를 가지고 공개적으로 주장할 만한 타종교인이 있는가? 그렇다면 이 일이 회교만의 특징으로 기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흑인들은 게으르고, 황인들은 탐욕스럽고, 백인들만 사람답다고 주장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대부분의 종교인들이 다른 종교가 사악(邪惡)해질 수 있다―또는 적어도 사악해 보일 수 있다―는 데 대해서 쉽사리 동의를 한다는 것은 사실 놀라운 일이다. 바로 자신의 종교가 그렇게 보일 수 있다는 데 동의하는 것이기에. 뒤늦게 이 점을 깨닫는다면―이 간단한 이치를 거의 깨닫지 못하지만―소스라치게 놀랄 것이다].
많은 종교 전쟁이 있어 왔다. 종교가 그 전쟁들의 진정한 원인이 아니었다는 주장을 우리가 받아들인다고 할지라도, 종교는 역시 그것들을 효과적으로 정당화시키는 데 사용되었다.
 

"그들은 진정한 신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일종의 핑계로서 신자라고 주장했을 뿐이다."

이것은 마치 <진짜 스코틀랜드 사람은 아니다(No True Scotsman)>라는 오류와 비슷하다. [역주: 이 오류에 대해서는 <URL:http://www.infidels.org/news/atheism/logic.html>에 나와 있다. 간단히 언급하자면, 위의 질문에서 나온 `신자'라는 단어의 의미는 `진정한'이란 수식어를 통해 원래 `신자'가 의미하는 바에서 변화했음을 유의하라.]
무엇이 진정한 신자를 만드느냐? 구별하기 어려운 <유일한 진짜 종교>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 기독교계를 보라: 자신들만이 유일한 진짜 기독교인이라고 확신하는 많은 경쟁 집단들이 있다. 때로는 그들은 서로 싸우고 죽이기까지 한다. 로마 카톨릭과 영국 국교회와 같은 주류 기독 교회들 조차 자기들끼리 결판을 내지 못하고 있는 판에 어떻게 무신론자가 누가 진정한 기독교인이며 누가 아닌지를 결정해야 하느냐?
결국 대부분의 무신론자들은 실용주의적 관점을 취하여,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기독교 신앙이나 교리를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키는 데 사용하는 누구든지 기독교인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결정한다. 어쩌면 이 기독교인들 중 일부는 단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기독교적 가르침을 악용하고 있을 뿐일 지도 모른다―그러나 분명 성경이 비-기독교적 행동을 뒷받침하는 데 그토록 쉽사리 이용될 수 있다면, 그것은 대단한 도덕률일 수는 없지 않을까? 만약 성경이 신의 말이라면, 왜 신은 그것을 오해하는 일이 좀 덜 쉽게 만들 수 없었을까? 그리고 당신의 믿음이 당신의 신이 의도한 바를 곡해한 것이 아님을 당신은 어떻게 아느냐? [역주: 이 마지막 질문은 키즈 전자 게시판에서 `포항은 사탄의 도시'이고 `카톨릭은 음녀(淫女)의 종교'라고 주장하는 hbh, 이미 앞에서 언급된 `재정의 놀이'의 변형을 즐겨 사용하면서 카톨릭 교인들에게 개신교 교리를 설파하는 coramdeo와 개신교 보드의 몇몇 전사(戰士)들 및 그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면서 침묵을 지키는 대다수 개신교인들, `사리는 독신 남성에게 생기는 결석의 일종'이라는 기상천외한 이론을 점잖게 하교(下敎)한 뒤 시치미를 떼며 반문에는 귀를 막고 이곳 저곳에서 세상 모든 정의의 수호자인 양 활약하는 모(某) 씨에게 들려주어야 마땅할 것이다―이 마지막 모씨는 신분을 확인하는 질문을 묵살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부정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Symond가 이 모씨로 여겨진다.]
성경에 대한 모호함이 없는 해석이 유일하게 존재하지 않는다면, 왜 당신의 독단만으로 어떤 무신론자가 하나의 해석보다 다른 해석을 취해야만 하느냐? 미안하지만, 어떤 사람이 자기가 예수를 믿고 예수와 성경이 그렇게 하라고 했기에 다른 사람을 살해했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를 수 밖에 없다.
 

"명백히 그러한 극단적인 종류의 믿음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어야 한다. 그러나 아무도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 적이 없으므로, 모든 신앙이 공유하는 보다 기본적인 종교적 믿음이 무의미할 리는 결코 없다."

종교는 사회적 산물이라는 시각을 당신이 받아들인다면, 많은 기본적인 종교적 믿음들의 공통성은 별로 놀랍지가 않다.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종교는 안정된 사회에 기여하는 생각들을 차용(借用)했다―권위자에 대한 존경, 살인의 금지 등과 같은 것들이다.
그 외에 많은 공통되는 종교적 주제들이 이후의 종교들에 전해졌다. 예를 들자면, 구약 성서의 십계명은 실제로 함무라비 법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시사되어 왔다.
어떤 것이 거짓이라고 증명되지 않았기에 그것이 무의미할 것 같지 않다는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 대화의 앞 부분에서 지적되었다시피, 개체의 존재에 관한 긍정적 주장은 부정적 주장보다 반증하기가 본질적으로 훨씬 더 곤란하다. 아무도 일각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증명하지는 못했고 그것들에 관한 많은 얘기가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일각수가 신화가 아닐 것 같다고 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긍정적 주장을 취하는 것보다는 기본적으로 부정적 주장을 취하는 것이 훨씬 더 타당한 것이다. 물론 `약' 무신론자들은 아무 것도 주장하지 않는 것이 한결 낫다고 주장할 지도 모른다.
 

"글쎄, 만약 무신론이 그렇게 좋다면 왜 유신론자들이 그렇게 많으냐?"

불행하게도 어떤 믿음의 인기와 그것이 얼마나 `옳은'가 혹은 그것이 `도움이 되는' 지의 여부는 별로 관계가 없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점성술, 필적 관상법(graphology), 그리고 다른 의사(擬似) 과학들을 믿는지 생각해 보라.
많은 무신론자들은 신을 믿고 싶어하는 것은 단지 인간의 나약함일 뿐이라고 느낀다. 분명히 많은 원시적 인간 사회에서 종교는 인간이 자신이 적절히 이해하지 못하는 현상들을 처리하도록 해 준다.
물론 종교에는 그것 이상이 있다. 산업화된 세상에서 우리는 완벽하게 적절한 자연적 설명이 있을 때조차 현상에 대한 종교적 설명을 믿는 사람들을 발견한다. 종교는 세상을 설명하려는 수단으로 시작했을지 모르나, 오늘날에는 다른 목적들에도 역시 소용이 되고 있다. 예를 들면, 많은 사람들에게 종교는 공동체 의식과 소속감을 제공하면서 사회적 기능을 다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문화들이 여러 종교들을 발전시켰다. 분명히 이것은 무언가를 말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느냐?"

꼭 그렇지는 않다. 많은 종교들은 단지 표면적으로만 비슷할 뿐이다; 예를 들어 불교와 도교(道敎)같은 종교는 기독교적 의미에서는 어떤 종류의 신이라는 개념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기억할 만하다. 요컨대, 신이 실제로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종교들 간에 의견 일치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신이 무신론자와 신에 관해 토론하기를 원한다면 마주칠 문제들 중 하나가 당신이 그 용어로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정의하는 것이다.
또한 대부분의 종교들은 경쟁 종교를 고발하는 데 재빠르다. 그래서 어떤 종교를 시험하고 정당화하기 위하여 다른 종교를 이용한다는 것은 다소 기이하다.
 

"신이 존재한다고 결론을 내린 그 모든 저명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어떻게 된 것이냐?"

우선, 조사에 따르면 대개 과학자들의 약 40%가 신을 믿는다는 것에 유의하라; 따라서 신자가 소수이다. (가장 최근의 조사는 에드워드 제이. 라슨(Edwards J. Larson)과 래리 위덤(Larry Witham)에 의한 것으로 1996년도에 수행된 것이며 `자연(Nature)' 지(誌)에 발표되었다.)
신을 믿는 과학자 혹은 철학자에 대해서 같은 수의 믿지 않는 과학자 혹은 철학자가 존재한다. 게다가 이미 지적된 바와 같이 어떤 믿음의 진실성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믿느냐에 의해 결정되지는 않는다. 또한, 무신론자들은 유신론자들이 자신들의 종교적 지도자를 보는 식으로 저명 과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저명 과학자도 인간일 뿐이다; 그는 어떤 분야에서는 전문가일 수 있으나, 다른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그의 말은 어떤 특별한 무게도 가지지 않는다. 존경받는 많은 과학자들이 자신의 전문 분야 외의 문제에 대해 말함으로써 스스로를 어리석어 보이도록 만들곤 했다.
또한, 저명 과학자들의 견해조차 과학자 공동체에 의해 의심을 가지고 취급된다는 점을 유의하라. 특정 분야의 정평 있는 전문가들도 자신의 이론에 대한 증거를 여전히 제시해야만 한다; 과학은 재현 가능하고 독립적으로 검증된 결과들을 신뢰한다. 다수의 기존 과학 지식과 모순되는 새 이론은 특별히 세밀한 조사를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작업이 흠이 없고 실험 자료가 재현 가능하다면, 이 새 이론은 옛 이론을 대치할 것이다.
예를 들면, 특수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은 둘 다 매우 논란을 일으켰고 많은 기존 과학 이론들의 폐기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허나 광범위한 실험이 그 정합성(整合性)을 증명한 이후 두 이론 모두 비교적 신속하게 수용되었다. 창조설(創造說)과 같은 의사 과학 이론들은 그것들이 논란의 여지가 있어서가 아니라 기본적인 과학적 조사를 견디지 못했으므로 기각(棄却)된 것이다. (추가의 정보를 위해서는 talk.origins 뉴스 그룹의 FAQ를 보라; <URL:http://www.talkorigins.org/>.)
<논리적 논증의 구성> 문서가 과학적 검증과 권위에 의한 증명에 관해 더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그래서 당신은 정말로 종교에 대한 광범위한 믿음이 아무 것도 나타내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냐?"

완전히는 아니다. 그것은 확실히 그 해당 종교가 그것이 그토록 널리 확산되는 데 도움이 되는 특징들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밈 이론(theory of memetics)은 유전자에서 유추(類推)하여 `밈(meme)'―인간의 마음들 사이에서 번식할 수 있는 생각들의 집단―에 관해 얘기하고 있다. 어떤 무신론자들은 종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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