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를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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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를 넘어서

가로수 0 4,877 2007.07.07 19:40
 
아래의 글은 ‘십일조를 넘어서’(베틀북 출간, tel.3450-4050)에서 저자와 출판사의 동의 하에 일부를 인용한 내용입니다.
십일조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십일조를 넘어서’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변질된 십일조의 역사
바리새인과 랍비들에 의해 십일조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이 내려짐으로 인하여 변질되기 시작한 십일조는 로마제국 교회 시대와 중세 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변질되어 갔다.
무엇보다 바리새인들이 십일조의 대상에 화폐를 끌어들이고 모든 소득에 대해 십일조를 적용하게 된 것이 가장 큰 변질이라고 할 수 있다.
 
바리새인들은 어느 정도까지 십일조를 치켜 세웠느냐 하면,<십일조를 잘 내면 악한 자가 지옥에서 받는 열두 달 동안의 형벌에서 면제된다>고 하였다. 
마치 중세 시대의 면죄부 역할을 십일조가 한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에 기술하는 십일조 역사에 관하여는 주로 『종교와 윤리 대백과사전』을 번역하여 참조하였음을 밝혀둔다.
 
1)초대교회 시대
초대교회 시대에는 교회에 재정적인 도움이 필요하기도 하였지만, 수세기에 걸쳐 십일조를 헌금의 방편으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4세기 무렵에 이르기까지도 십일조에 관한 논의는 교회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다.
몇몇 저자들이 십일조에 관하여 이야기한 적은 있지만 그 십일조는 나중에 교회에서 채택한 그런 십일조와는 차원이 달랐다.
이레니우스 교부는 유대교의 십일조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다음과 같이 권면하였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으로부터) 해방을 얻은 자들로서 이제 주님을 위하여 (십일조가 아니라) 우리의 모든 소유를 구별하여 떼어놓습니다.
그리고 상당한 분량을 기쁜 마음으로 자유롭게 연보로 드립니다.> 
 
오리겐 교부는 십일조라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헌금으로서는 너무 분량이 많은 것으로 여겼다.
신정 일치가 되어 있지 않은 나라에서 여러 가지 세금을 감당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십일조를 교회에 바친다는 것은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오리겐 교부는 바로 그 점을 지적한 것이었다.
 
에피파니우스 교부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십일조라는 것은 할례보다도 구속력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어거스틴 교부는 십일조를 하나님께 대한 그리스도인의 의무로 여기긴 하였지만, 본인과 주위 사람들은 십일조의 차원보다 더 나은 자유함 속에서 연보를 감당하였다.
 
2)로마제국 교회 시대 및 중세 시대
기독교가 로마 국교로 인정되고 황제의 권력을 배경으로 교회가 점점 확장되어 감에 따라 여러 가지 원칙을 정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게 되었다.
십일조와 관련하여서는 암브로스를 비롯한 많은 교부들이 십일조를 거두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으나 그들의 의견이 동방 교회들에 널리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 십일조가 받아들여진 서방 교회들조차 상당한 반대에 부딪치기도 하였다.
십일조를 내어야 하는 도덕적인 의무가 널리 가르쳐져 십일조가 하나의 원칙으로 정해지고 나서도 사람들은 마지못해 가끔 가다가 내곤 하였다.
드디어 A.D 585년 마콘(Macon) 교부 회의에서 십일조가 채택되었다. 
 
그 당시 십일조는 주로 가난한 자들을 돕고 포로들을 풀어주는 데 사용되고 있었다.
이제 십일조를 내지 않는 자들은 교회에서 쫓겨나야만 하였다.
다른 교부 회의들도 십일조들을 속속 채택하였다.
그러다가 A.D 800년 경 샤를레망(Charlemagne) 대제 때 와서야 비로소 십일조가 정식 법령으로 공포되었다.
샤를레망 대제는 참사회의에서 십일조는 교회와 사제들에게 주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설교자들은 때를 만났다는 듯이 신자들에게 십일조에 대하여 열렬히 설교하면서 십일조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이르는 첩경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십일조들이 걷히게 되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여기서 교회법에 의해서 시민들로부터 십일조를 거두었을 뿐 아니라 로마법에 의해서도 식민지들로부터 십일조를 거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로마법에 의해 식민지들로부터 거둔 십일조 중에서 많은 부분이 교회로 활당되었다.
샤를레망 대제는 십일조를 세 종류로 구분하여 쓰이게 하였다.
첫째는 주교와 사제를 위한 십일조였고,
둘째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십일조였고,
셋째는 교회 조직을 위한 십일조였다.
이것은 전통적인 십일조 정신을 살리려는 배려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중에는 특별한 몇몇 교회와 수도원에서 십일조를 횡령하여 거의 독차지하는 일이 자주 벌어졌다.
일단 십일조 의무가 법령으로 공포되자 십일조 납부를 거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파문(excommunication)이나 형벌이 가하여졌다.
그러는 가운데 십일조가 횡령되고 남용되는 일이 더욱 많아졌다.
 
십일조가 하나의 엄청난 기득권 내지는 치부의 수단으로 자리잡는 곳에서는 반드시 십일조를 횡령하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말라기 시대나 요세푸스 시대나 로마제국 시대나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지주가 십일조를 횡령하여 개인 재산으로 돌리고 십일조를 팔아 먹기까지 하였다.
이와 같이 평민이 십일조를 차지하거나 다른 평민에게 십일조를 양도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1179년 제3차 라테란(Lateran) 회의에서 통과시켰다.
 
그 회의는 이 법을 어기는 사람은 자신의 영혼을 멸망에 빠뜨리는 자로서 교회 묘지에도 묻힐 수 없다고 결정하였다.
말하자면 십일조는 절대로 교회를 떠나서 개인이 처분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요즘 한국교회에서 십일조를 교회에 바치지 않고 개인적으로 어려운 친족을 돕는다든지 자선단체 같은 데 기부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3세기에 이르기 전까지는 십일조의 대상이 모세 오경의 그것처럼 주로 토지 소산물이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교회마다 십일조를 보관하는 ‘십일조 곳간(tithe’s barn)’을 따로 만들어둘 정도였다.
그러나 13세기에 이를 즈음, 십일조의 대상이 토지 소산에서 ‘모든’ 종류의 이득과 임금에까지 확대되기 시작했다.
 
바리새인과 랍비들의 십일조에 대한 해석을 1,500여년 후에 다시 끌어들인 셈이었다.
왜 이렇게 십일조의 대상이 순수한 토지 소산에서 ‘모든’ 소득 쪽으로 확대되는 것일까.
그것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십일조라는 방편을 이용하여 최대한 물질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십일조의 대상을 ‘모든’ 소득으로 확대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 이후로 교회법 학자들에 의해 십일조는 새롭게 세 종류로 구분되었다.
 
첫째는 토지 소산에 대한 십일조였고,
둘째는 좀더 정교한 인간의 기술로 재배된 특수작물에 대한 십일조였고,
셋째는 무역이나 장사 등을 해서 벌어들인 소득에 대한 십일조였다.
 
이것은 그대로 유대인의 탈무드(Talmud) 규정을 따르고 있는 구분법이었다.
중세 시대 교회법은 어느 것이 십일조의 대상이 되는지, 안 되는지, 그리고 누가 십일조 의무에서 면제되는지, 평신도가 십일조를 개인적으로 사용해도 되는 특별한 경우는 어느 때인지, 십일조와 국세 중 어느 것이 우선인지 등등에 대하여 세세하게 규정을 하고 있다.
 
요즈음도 ‘십일조 내는 법’이라는 지침서들이 나와 있고 십일조 내는 법에 정통하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사람들은 결국 중세 시대 교회법을 전파하고 있는 셈이다.
 
3)영국에서의 십일조
 
영국은 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십일조에 대한 법령 제정 움직임이 일어났다.
아드리안 교황이 A.D 785년에 앵글로 색슨 교회에 대하여 십일조를 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여러 교회 회의를 거쳐 확정되었고 어떤 때는 왕이 직접 명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어떤 경우에도 십일조의 대상은 토지 소산이었지 일반 생산품은 아니었다.
A.D 950년 경 에드가 왕이 통치할 때는 십일조를 내지 않을 경우 법률에 의하여 처벌을 받았다.
이 무렵 교구 교회들의 성장은 지주들이 바치는 십일조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할 수 있었다.
그 지주들은 대개 교회 건립자들이기도 했다.
 
교구 제도가 발달됨에 따라, 지방 교구의 십일조는 그 교구 목사의 몫으로 돌려야 한다는 주장이 합법성을 내세우며 제기되었다.
많은 교구들에서 십일조들이 수도원 조직의 재산으로 돌려졌다.
그리하여 십일조를 거두고 관리하는 일만을 맡는 특별 목사가 임명되기도 하였다.
요즈음 말로 한다면 ‘십일조 목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엄청난 변화가 있게 되었다.
수도원들이 해체됨에 따라 수도원 조직으로 들어갔던 십일조들은 왕의 재산으로 돌려졌다.
또한 십일조들이 교회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부자들에게로 돌려지기도 하였다.
이것은 명백히 십일조의 원래 목적과는 어긋나는 일이었다.
 
영국에서는 십일조를 ‘큰 십일조(the greater tithe)’와 ‘작은 십일조(the
smaller tithe)’로 나누어 구분하였다. 큰 십일조는 교구 목사에게 돌려지는 것을 말하였고,
작은 십일조는 교구 목사 밑에 있는 다른 목사들에게 돌려지는 것을 말하였다.
 
큰 십일조는 주로 토지 소산의 십일조였고, 작은 십일조는 인간의 기술로 재배된 특수작물들과 일반 소득에 대한 십일조였다. 
이런 구분이 있을 무렵에는 이미 영국에서도 십일조의 대상을 ‘모든’ 소득으로 확대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구분들은 1836년에 제정된 십일조 개정법(The Commutation Act)에 의해 사실상 의미가 없게 되었다.
그 법이 제정되기 오래 전부터 이미 십일조는 돈의 형태로 지급되고 있었는데,
그 법은 더 나아가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는 모든 십일조를 정액 소작료의 형태로 개정하였다.
 
그 액수는 7년 동안의 곡물(옥수수, 밀, 보리, 귀리 등) 가격을 기초로 평균을 내어 산출하였다.
그러나 이런 산출법을 둘러싸고 이해당사자들 간에 수십년 동안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렇게 십일조가 개정됨에 따라 그 동안 십일조 혜택을 누려오던 집단이 손해를 보게 되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스코틀랜드의 십일조 역사를 살펴보아도 영국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변질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1537년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의에서 추밀원에 호소하기를 목회자들의 항구적인 생활 대책을 세워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추밀원은 교회로 들어오는 모든 수입의 3분 1를 왕과 목회자들이 나눠 갖도록 해주었다.
 
그러니까 목회자들은 교회 수입의 6분의 1을 자기 생활비로 쓸 수가 있게 되었다.
물론 교회 수입에는 십일조가 중요한 부분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식으로 정치적인 이해관계와 얽히면서 십일조는 더욱 변질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먹음직한 먹이를 놓고 돼지들이 꿀꿀거리며 싸우는 꼴이었다. 
 
십일조 수입으로 인한 교회의 타락은 면죄부와 마찬가지로 마틴 루터 종교개혁의 계기가 되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십일조는 종교개혁의 철퇴를 맞고 비실거리다가 19세기를 지나면서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20세기에 들어서 교회 부흥이 일어나 교회 세력이 커지기 시작하면서 다시 십일조가 머리를 들게 된 것이었다.
이런 현상을 가리켜 켄덜 목사는 『십일조』라는 책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처럼 이야기 한다.
 
<그러나 십일조는 최근에 하나의 교리로보다는 실천 사항으로서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 주제에 관한 분명한 진술이 장차 쓰여져야 할 것이다.
이 실천 운동은 교파와 지역과 신학적 노선 등을 초월해서 퍼지고 있다.
주로 침례교인들과 웨슬리 신성 운동의 일부 추종자들 그리고 일부 오순절주의자들이 이 성경적 진리를 현대에 다시 부흥시킨 자들로서 모범을 세웠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서는 다른 교파들은 물론이며 성공회, 루터교, 장로교 등에 의해서 십일조 진리가 가르쳐지고 있다.>(p.51, 같은 책)
 
이상하지 않은가?
신학적인 노선과 교리의 차이로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워 온 여러 교파들이 십일조 부분에 있어서는 약속이나 한 듯이 완전한 일치를 보고 있으니 말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나름대로 십일조 교리에 대한 확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이해관계가 서로 일치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 아닌가.
십일조 교리가 언제 머리를 들기 시작했는가 살펴보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기독교가 로마국교로 인정되어 교회 세력이 확장되고 있을 즈음 4백년 동안이나 잠잠했던 십일조 교리가 머리를 들고 일어나 활발하게 논의되다가 드디어 로마 황제에 의해 법령으로까지 공포되었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잠잠하던 십일조 교리가 왜 그때 다시 논의되었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교회가 확장되고 커지면서 교회에 많은 재정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 재정을 충당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편으로 구약 시대의 십일조를 끌어온 것이었다.
교회는 성전이요, 목회자는 제사장이요 하는 식으로 성경을 알레고리 비유 해석법으로 풀어서 말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통하여 면죄부와 아울러 십일조의 거짓된 정체가 폭로되고 그 힘을 잃게 되었다.
그러다가 교회 부흥이 일어나 교회 조직들이 비대해지고 막대한 재정이 필요하게 된 20세기에 와서 다시 십일조 교리가 머리를 들고 일어서게 된 것이다.
 
켄덜 목사는 십일조 교리가 아니라 십일조 실천운동이라고 말을 돌렸지만,
지금 그 어느 교리보다도 더 강조되고 있는 것이 십일조 교리라고 할 수 있다.
 
로마 제국 시대와 중세 시대 동안 막대한 십일조 수입으로 온갖 비리를 다 저질러 온 로마 가톨릭은 이제 십일조 교리를 버리고 자율적인 헌금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데 반하여,
로마 가톨릭을 개혁한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의 후예들이 이제 와서 오히려 십일조를 강조하고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개신교가 구교가 되고 구교가 신교가 되어가고 있는 것인가.
이제는 가톨릭 쪽에서 개신교를 개혁하려고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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