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 이야기

모세 이야기

가로수 0 3,399 2007.12.29 14:18
모세 이야기
 
 
구약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둘을 들라고 하면 필경 요셉과 모세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물론 성경에 자세히 나와 있지만,
 
성경을 떠나서 역사적인 안목으로 보고 성경의 내용과 비교해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창세기를 보면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열 한 번째로 오랫동안 막내였던 요셉은 형제들의 질투로 인해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 갔으며,
 
그는 이집트에 도착한 지 십여 년 만에 재상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 때가 기원전 1720년경이다.
 
그리고 후에 요셉은 가나안(팔레스타인)에 살던 아버지와 70여 세대의 형제 가족들을 기근에서 구출하여
 
이집트의 고센(Goshen)이라는 곳에 정착하게 한다.
 
이 곳은 람세스(Ramesses)의 땅 이라고 창세기 47장 11절에 설명하였다.
 
 
따라서 성경에 의하면 이 때가 유대인들이 이집트 땅에 정착하여 자손을 퍼뜨리기 시작한 때가 되고,
 
3백여 년 후 모세가 유대인들을 데리고 이집트를 탈출하는 것이기원전 1491년의 일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한 람세스의 땅이라고 하는 것은 람세스 2세(Ramesses II., c.1304~1237 B.C.)의 소유지를 말하는데,
 
카이로 출신 이집트 역사가 오스만(Ahmed Osman)에 의하면 기원전 1491년은 람세스 왕이 존재하기도 훨씬 전의 일이었고,
 
람세스 왕 때 고센이란 곳에 유대인들이 정착하여 이미 많이 살고 있었고
 
유대인들이 람세스 2세를 위해 고센이란 곳에 곡식을 넣어 두는 창고들을 건설했다고 기록돼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성경의 이야기와 약 3-4백여 년의 차이가 난다는 말이다.
 
 
이를 다시 정정하여 짝을 맞추면 요셉이 이집트에 간 것이 기원전 18세기가 아니라 기원전 15세기 초가 되는 것이고,
 
그는 투트모시스 4세(Tuthmosis IV., c.1413~1405 B.C.) 라는 파라오 밑에서 재상을 하게 되었으며,
 
이집트에서는 그의 이름을 요셉이라 부르지 않고
 
유야(Yuya: Yusuf the Vizier, 즉 재상 Yusuf에서 기인한 말. Yusuf는 요셉을 이집트화한 말)라고 불렀다 한다.
 
유야에 관련된 그의 설명은 아래와 같다.
 

파라오 투트모시스가 죽을 때,
 
그의 아들은 당시의 이집트 관례에 따라 왕위를 잇는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해 여자형제인 시타문(Sitamun)과 결혼하여
 
아멘호텝 3세(Amenhotep III.)라는 파라오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그는 유야(요셉)의 딸 티예(Tiye)와도 결혼하여 둘째 부인으로 맞았다.
 
그러나 티예의 아버지가 유대인으로서 재상이라는 높은 벼슬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이 권력을 너무 크게 잡는 것을 우려하는 이집트 사람들의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티예가 낳는 아들은 파라오가 될 수 없다는 규칙을 만들었고,
 
티예가 임신했을 때에는 만약 아들을 낳게 되면 그 아들은 죽이라고 파라오가 특별 칙령까지 내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티예가 해산할 때 즈음해서 자기의 친척이 많이 살고 있는 고센 땅 자루(Zarw) 강 상류에 별장을 짓고,
 
그 곳에 가서 기원전 1394년경 아이를 낳았는데, 과연 아들을 낳게 되었다.
 
 
이때 따라갔던 산파역 상궁에 해당하는 여자와 함께 티예는 아이를 바구니에 담아 강물에 띄워
 
유야의 배다른 형제 레위(Levi)의 집으로 가도록 하였다.
 
즉 삼촌에게 맡기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아이는 우여곡절을 거쳐 아미나답(Aminadab)이란 이름으로
 
당시 이집트의 태양신 라(Ra)를 섬기는 사원의 승려 밑에서 교육을 받으며 자라게 되었다.
 
 
한편 첫째 부인인 시타문은 네퍼티티(Nefertiti)라는 딸만 하나 낳고 아들을 낳지 못한 상태에서
 
반사적으로 티예의 영향력이 점차 확대되고 있었다.
 
한편 나일 강 델타의 동쪽 끝 지방에서 자라던 아미나답은
 
십대에 들어서면서 나일 강 상류 지방인 테베스(Thebes)로 옮겨 살게 되었는데,
 
자기가 유대인이라는 것을 십분 납득하고 있는 아미나답은
 
당시 테베스에서 주로 섬기고 있던 아문(Amun: 유대인들은 Amon 또는 Amen이라 불렀다)이라는 신을 섬기는 것을 거절하였다.
 
 
이 신에 대해서는 예레미야 46장 25절에 아몬(Amon)이란 신으로 소개?설명되었다.
 
이러한 사회조건에서 아미나답은 아문 신을 없애고 히브리 사람들이 섬기던 아텐(Aten: 원래는 페니키아 민족에서 유래한
 
신으로 이름 자체는 다만 주님이란 뜻이며, 이스라엘 민족이 이를 받아 융화시킨 것이다)이라는 형상이 없는 신을 소개하고,
 
자기 이름 아미나답을 악헤나텐(Akhenaten)으로 바꾸었다.
 
 
아미나답(Aminadab)이란 이름은 원래 유대계 이름으로 이집트어 아멘호텝(Amenhotep)과 같은 뜻을 가진 이름으로서
 
아몬(Amun) 또는 아멘(Amen) 신이 흡족해한다 는 뜻이었고,
 
새로 지은 악헤나텐은 아텐(Aten: 히브리의 Adon과 동일 신) 신의 종이란 뜻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파라오 아멘호텝 3세는 병으로 눕게 되었고,
 
왕위를 계승할 후계자가 없는 파라오는 딸 네퍼티티와 악헤나텐을 혼인시켜
 
악헤나텐을 응당한 파라오로 계승시키도록 하기 위해 죽을 때까지 함께 국사를 돌보도록 하였다.
 
드디어 아멘호텝 3세가 죽고 파라오가 된 악헤나텐은 아멘호텝 4세(Amenhotep IV., 재위기간 c.1367~1361 B.C.)가 되었다.
 
 
그는 딸 여섯과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아들의 이름은 투탕하텐(Tutankhaten)이라 하였다.
 
악헤나텐은 파라오가 되자마자 이집트 신을 섬기던 모든 사원을 폐쇄하고 아텐(Aten) 신을 섬기는 사원을 짓도록 명하였으며,
 
신앙에서부터 통치방법까지 대혁명을 일으켰다.
 
 
이러한 그의 과격한 변혁은 사면팔방으로 적을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우선 고대부터 섬겨 오던 태양신 라(Ra)와 아문(Amun)을 섬기던 승려부터 신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정치계에서도 엄청난 반발을 사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많은 위협과 탄원이 있었으나 끝까지 주장을 굽히지 않고 그의 결단을 고수하였다.
 
결국 무장 정변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들은 악헤나텐뿐 아니라 유대인 전반에 걸친 타도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 결과 파라오 아멘호텝 4세, 즉 악헨나텐은 40여 년 후에 피난에서 돌아와 위험에 처한 유대인들을 이끌고 피신하여
 
이집트를 떠나게 되었으며,
 
혁명세력은 잠시 악헤나텐의 조카 스멩카레(Smenkhkare-일명 아론Aaron)를 왕위에 앉혔으나
 
곧 11살 정도밖에 안 된 악헤나텐의 아들 투탕하텐을 왕위에 앉히고 이름을 투탕카멘(Tutankhamen) 으로 바꾸게 되었다.
 
 
이 어린 파라오는 왕위에 앉은 지 불과 9년 내지 10년 후, 아직 젊은 나이에 타살로 목숨을 잃게 되고,
 
오늘날 그의 무덤이 발굴되어 유품이 세계 여러 곳에서 순환 전시를 했던 것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집트를 떠난 악헤나텐이 그의 추종자들을 데리고 안전하다고 생각되어 도착한 곳이 시내(Sinai)라는 곳이었다.
 
그가 이집트를 떠날 때 갖고 간 것은 파라오를 상징하는 셉터라고 부르는 봉(棒)이었다.
 
셉터(sceptre)라고 부르는 이 봉은 군악대의 지휘자가 들고 흔드는 봉과 같이 생긴 것을 말하는데,
 
악헤나텐이 갖고 간 파라오의 봉은 머리를 놋쇠로 만든 뱀으로 장식한 것이었다.
 
 
이것은 마치 임금이 옥새를 갖고 있는 것과 비슷하여,
 
그를 따라 시내까지 함께 간 이스라엘 사람들은 악헤나텐이 당연히 파라오의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할 사람이라 믿고 있었다.
 
 
그리하여 당연한 계승자 또는 계승자로 태어났다는 뜻을 가진 별명이 붙게 되었는데,
 
그 별명이 모세(Mose, Moses 또는 Mosis) 라는 단어였다.
 
 
다시 말해서 모세 라는 이름의 말뜻은 계승자라는 것이다.
 
요셉이 처음 이집트에서 벼슬을 할 때 파라오의 이름이 투트모시스(Tuthmosis)라 하였다.
 
그 이름은 투트(Tuth) 와 모세(Mose) 또는 모시스(Mosis) 를 합한 이름으로 투트를 계승하여 태어난 사람 이란 뜻을 갖고 있는 것을 보면,
 
모세라는 이름의 어원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또 람세스(Ramesses)라는 이름도 태양신 라(Ra)를 계승 또는 대표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마찬가지 형식의 이름이다.
 
역사적인 기록을 보면 모세(악헤나텐)는 피라메세(Pi-Ramesses: Per Ramessu(페르 라메수) 고대 이집트 15, 19, 20대 왕조시대의 수도,
 
지금의 El Qantara 부근)라는 곳에서 떠나, 수에즈 운하 지역과 시내 반도를 거쳐 티마시(Timash) 호수 방향으로 갔다고 한다.
 
이 지역은 습지여서 사람은 걸어서 겨우 갈 수 있으나 말이나 수레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모세를 따라간 사람들은 야곱의 후예인 이스라엘 민족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시내 산 밑에서 예배소 성막(Tabernacle)을 짓고 언약궤(Ark of the Covenant)를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모세가 죽고 난 다음에는 이집트로 돌아가는 대신 선조의 고향인 가나안을 침공하기 시작하였다.
 
그 때는 가나안(팔레스타인) 땅에 페니키아(Phoenicians) 사람과 필리스티아(Philistines, 블레셋) 사람들이 주로 살고 있을 때였다.
 
기록에 의하면 많은 군대가 동원되었으며 바다에서도 많은 전투를 벌였고,
 
특히 여호수아(Joshua)의 지휘 아래 한때는 요르단을 건너 제리코(Jericho)까지 점령하여
 
소위 약속된 땅으로 돌아갈 든든한 근거를 만들기도 했다.
 
 
여호수아가 죽고 난 다음에는 판관(Judges)들을 임명하여 통치를 하였으나 혼란이 계속되는 상황이었고,
 
결국 얼마 후 사울(Saul)이란 사람에 의하여 히브리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통합되고
 
기원전 1048년에 사울을 시조로 하는 통합왕국을 건설하게 되었는데, 이때 가나안 땅을 거의 점령하게 되었다.
 
 
유명한 다윗(David)은 그 다음 세대의 사람으로 사울의 딸과 결혼하고 기원전 1008년에
 
팔레스타인 땅의 절반 정도의 영토를 가진 유다의 왕이 되고,
 
그 후 나머지 팔레스타인을 점령하여 유대인 전체를 대표하는 왕이 된다.
 
 
홀리 그레일(Holy Grail)의 혈통이란 이 때부터 시작된다.
 
이것이 역사가가 역사적인 사적을 기본으로 찾아본 모세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이다.
 
또 참고로 이야기해 두고 싶은 것은 이집트인과 유대인들 사이에는 많은 어휘를 서로 교환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사무엘상 7장 1~2절 또는 사무엘하 6장 3절에 아비나답의 집(House of Abinadab) 이란 단어가 나온다.
 
이것은 이집트어 아미나답(Aminadab)이 아문(Amun) 신이 만족했다는 뜻과 마찬가지로 조상이 만족하고 기뻐했다는 뜻이며,
 
아비나답의 집이란 말은 한국의 조상신, 신주(神主)를 모셔 놓은 것과 같은 일종의 사당(祠堂)을 말했던 것이다.
 
모세에 대한 이러한 주장은 천주교의 한 학자 신부도 동의하는 일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는 무어(Fr. Charles Moore)라는 신부는 원래 검사생활을 하다 신부가 된 사람으로
 
신학박사와 철학박사학위를 갖고 성서적 고전을 연구한 사람인데,
 
이 분도 위의 모세 이야기와 같은 설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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