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글] 나는 왜 더이상 기독교인이 아닌가? 켄달 홉스 - 4부-2



나의 기독교 경험담

[답글] 나는 왜 더이상 기독교인이 아닌가? 켄달 홉스 - 4부-2

오디세이 0 1,819 2003.07.23 09:15
너무 길어서..읽다 보니 호흡을 놓치게 되어 제가 임의로 나누었습니다.... (^^)


---------------------------------------------------------------------------------------


이를 나타내는 또 다른 방법은 이성(reason)만으로는 존재하는 것을 다 설명할 수 없다, 사실 이성 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순수 형식 논리는 단지 논쟁의 구조에 관한 것으로, 그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이성은 당신에게 만일 이 조합의 전제들이 사실이라면, 이러이러한 결론들이 뒤따른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당신은 여전히 이 전제들의 증명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이성을 이용한다면, 그러면 그 전제들은 또 다른 조합의 전제들에 근거한 또 다른 논쟁에 결론이 된다. 만일 그 전제들이 사실이라면, 그러면 당신의 초기 논쟁에서의 전제들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 하나의 ‘만일’, 또 하나의 조건적인 것이다. 어떻게 그 전제들이 사실임을 논증할 것인가? 당신은 조건적 논쟁에 대한 끝없는 소급을 하던지 혹은 무언가가 단지 특별한 이유 없이 존재한다라는 비이성적 사실에 호소해야 하던지 둘 중의 하나이다. 이성은 자신의 한계들을 밝힌다. 이성은 당신에게 증거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결론들, 어느 세계관을 그것으로부터 모순 없이 끄집어 낼 수 있는 지, 당신이 수집한 증거들에 의해 어떤 해석들이 모순이 없고 지지할 만하지 그리고 어떤 해석들이 현실과 모순이 있는지를 말해줄 수 있지만, 그 존재가 무엇인지를 궁극적으로 결정하거나 그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줄 수 없다. 현실은 세계관의 대상이 아니다; 차라리, 세계관이 현실의 대상이다. 현실이 이성을 결정하지, 그 반대가 아니다.

궁극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던, 그러면, 극히 무조건적이고, 전적으로 임의적이며, 그것의 존재를 필요로 하거나 금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있을 수 없거나 혹은 그 존재의 특성을 규제하는 것이, 즉 그것에 찬성하는 아니면 반하는 이유가, 없다. 그것은 단지 맹목적이고, 궁극적으로 임의적인, 사실이다. 따라서, 기독교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이런 저런 형태를 필요로 하던지 혹은 금지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없다. 혹은 그 어떤 다른 신(들), 혹은 정신이 그 안에서 진화할 수 있는 자존하는 물질적 우주를 필요로 하거나 금지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없다. 궁극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의 본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은, 따라서 이성이나 사전 논쟁들을 통해서 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그것은 실험적 사실의 문제이며,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관심을 갖고, 조사하고 연구함으로써 답해질 수 있다. 만일 당신이 현실을 검사하고 한 하나님을 발견한다면, 좋다, 하나님은 존재한다. 만일 당신이 그 안에서 정신이 진화할 수 있는 한 물질적 우주를 발견하고 그의 신자들 마음 바깥에 존재하는 어떤 하나님에 대한 객관적 증거를 찾지 못하면, 당신은 무신론적 우주 안에 있는 것이다.

신자들의 마음 바깥에 존재하는 신에 대한 신뢰할 만한 객관적 증거가 없음을 보면서, 나는 개관적으로 존재하는 신이 있다는 타당한 이유가 없고, 내가 우주의 창조자인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하고 개인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는 이전의 지극한 확신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전적으로 부모, 설교가, 주일학교 교사들의 영향 하에 있던 내 마음의 산물이었다고 결론지을 수 밖에 없었다. 나는 “하나님”이 “저 바깥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무가 아니라 우리의 가장 높고 깊은 주관적 포용력의 오칭(mislabelling) 혹은 오해라고 결론 내릴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이라 언급되는 현상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실히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내 주장은 “하나님/신”이 그것들의 심각한 오칭이자 오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면에서는 나는 여전히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체험들이라고 부르는 것들의 경험들이 존재함을 믿는다. 그것들은 깊고, 심오하고 강력한 감동을 주는 경험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하나님, 혹은 신들의 체험이라 부르는 것은 이러한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경험들에 대한 사회적으로 학습된 해석이다. 나는 이 경험들의 실제에 대한 증거를 보고 느낀다. 하나님-믿음들이 이러한 경험들에 대해 사회적으로 학습된 해석이라는 증거로서, 대다수 사람들이 그들이 자라면서 함께 한 종교의 특정 교파(혹은 종교들 중의 하나 혹은 어떤 조합으로)를 믿는다. 전혀 다른 종교적 전통으로의 개종도 있으나, 그러한 경우는 상대적으로 드물고, 모든 방향으로 다 간다. 그렇다, 회교도가 기독교도가 되지만, 기독교도가 회교도가 되기도 하고, 둘 다 불교도가 되기도 하고, 불교도가 … 되기도 한다. 대부분의 개종(혹은 전환)은 같은 종교의 다른 교파로, 혹은 대부분의 거듭난 기독교인들에서와 같이, 그들이 자라면서 함께 한 종교에 의식적이고 고의적 개인적인 헌신과 진지한 결단이다. 그러나 경험자들의 마음 바깥에 있고 이러한 경험들을 일으키거나 유도하는 의식적 존재의 신뢰할 만하고, 시험 가능하고, 입증 가능한 증거를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이 경험들이 그러한 존재에 호소함에 의지하지 않고 설명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나는 그 존재의 실존을 단정할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어떻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것에 대해 틀릴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내가 그들이 틀렸다고 주장할 만큼 대범할 수 있는가? 자, 앞서 지적했듯이, 하나님 혹은 신들에 대한 대부분의 해석들이 적어도 어느 정도 오류가 있음에 틀림없으니, 그들이 틀렸다는 주장을 하기까지 연장하는 것은 그리 큰 일이 아니다. 게다가, 하나님이 누구인가 혹은 무엇인가에 관해 어떤 주장을 하려는 그 누구도 다르게 믿는 모든 타인들보다 더 잘 안다고 하는 이 같은 대범함을 갖고 있다. 따라서 나는 그러한 주장을 함에 있어서 아주 특이한 짓을 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당신이 하나님에 관해 이야기하려 한다면 그러한 주장을 함은 정말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유신론자들과 토론을 하는 중에 종종, 그들은 이성, 논리 그리고 증거가 그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음을 알아서, 믿음에 의지한다. 그들은 내가 잘못된 방법으로 하나님에 접근한다고 말한다. 하나님, 그 존재를 믿음 그리고 그를 따르는 것은 믿음이 관건이다. 히브리서 11:1은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바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확신함이다”라고 말한다. 과장된 성경은 이를, 번역시 원본의 모든 미묘한 차이들(nuances)을 다 포함하려고 애쓰는데,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의 확증(확인, 주제 행위)이고,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의 증명이며 그것들이 사실임의 신념[감각들에 드러나지 않는 것을 실존 사실로 인식하는 믿음]”이라 간주한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방법이다.

이것은 내게 심오하게 들리곤 했다. 지금은 근거 없는 희망-충족처럼 들린다.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맞지 않는다. 첫번째로 이러한 의미의 믿음은 단지 어느 것에 대한 믿음이건 “정당화하는데” 쓰일 수 있다. 그것은 진리로의 악명 높은 저질 지침이다. 개인 자신의 주관적 감정들 외에는 잘못에 대한 수정 장치가 없고, 이것들은 객관적 진리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잣대가 결코 되지 못함을 보여주었다. 반대로, 오직 몇 개의 믿음들만이 증거와 이성에 의해 충분한 지지를 받을 수 있다; 많은 수가 규정 탈락이고, 잘못된 믿음들은 신뢰할 만하게 수정될 수 있다. 증거와 이성의 조합을 이용함이 실제에 대한 훨씬 더 신뢰할 만한 결론에 이르는 수단으로서 훨씬 더 효과적인 것으로 입증 되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믿음이 산을 움직인다고 말해지나, 경험은 불도저가 더 효과적임을 보여준다.”

백 명의 과학자들이 한 문제에 대해 연구하게 해봐라, 그러면 맞다 그들은 모두 다른 가설들을 가지고 출발하여 연구 중에 다른 방법으로 사실들을 발견하고, 해석하고 그리고 재해석 할지는 모르나, 그들은 결국 하나의 해답에 대해 의견 일치를 보고, 그 해답이 우리가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이 될 것이다. 전 세계에서 온 과학자들은, 종교적 믿음들 혹은 문화적 관습들 혹은 과거 과학적 결론들 조차에도 무관하게, 태양중심설(heliocentricism, 지구가 태양 둘레를 돈다, 반대가 아니고)에 의해, 평판 지질 구조론(대륙 평판들이 떠 다니고, 이것이 산맥들과 화산들을 생성한다)에 의해, 진화론에 의해, 등등, 확신을 얻었는데, 이는 그들이 시험하고 입증할 수 있는 증거 때문이다. 그러나 백 명의 신학자들이 한 문제에 대해 믿음을 이용하여 연구하게 해봐라, 그러면 똑 같은 종교적 관점에서 출발한다 할지라도, 적어도 일백 개의 분파, 교파 그리고 새로운 종교들로(모두 그들 자신의 분파와 교파를 갖고) 결국 끝날 것이고, 그들 사이에는 결정할(번역자주-누가 맞는지) 객관적이고 신뢰할 만한 수단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 과학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정말로 계속 변한다. 주간 뉴욕 타임스 과학 섹션은, 예를 들면, 항상 새로운 발견들 그리고 논쟁들 그리고 도전들 그리고 그런 것들을 게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자들이 그들 지식의 첨단에서 연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해결한 사안에 대해서 계속하지 않는다. 맞다, 과학은 변화한다, 그러나 개선에 의해서 변화한다. 오늘 과학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 어제 이야기한 것이 아닌데, 이는 과학이 어제보다 더 많고, 더 좋고, 더 잘 이해된 증거를 오늘 갖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적 믿음과는 달리, 과학은 스스로 수정한다. 과학은 우리에게 완벽한 혹은 완벽하게 신뢰할 수 있는 지식을 주지 못한다, 아마 못 줄 것이다, 그러나 과학은 경쟁자들보다는 훨씬 더 신뢰적이다. 우리가 이상적으로 원하는 바가 아닐지도 모르나,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과학이 우리가 실제로 얻은 최선이라는 것이다. 신학은, 반대로, 대개 우리 부모가 믿은 모든 것을, 종종 약간 사소한 차이를 갖고, 이따금 큰 차이를 갖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적은 일치, 그리고 특정 신자에게 옳게 “느껴지는” 것, 즉 주관적 해석들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모든 종류의 방향들을 향하는 전환들과 함께, 우리에게 이야기 한다. 그러한 비교할 추적 기록들을 갖고, 나는 증거 없는 종교적 확신 보다 확신 없는 과학적 증거와 함께 살겠다.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는 믿음에 의지하지 않는 두 번째 이유는 이 “믿음”의 지각이 이치에 조차 맞지 않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사람의 성격 같은 것에 있지, 사람의 실존에 있지 않고, 그리고 그 믿음 조차도 증거에 근거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내 아내에 대해 믿음이 있는데, 그 뜻은 그녀가 내가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믿음을 의미한다. 그녀가 존재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지 않다. 나는 그녀가 존재함을 안다. 나는 또한 그녀가 과거에 어떻게 행동했는지 알고, 그녀의 성격에 대해 많이 안다. 그리고 그 지식에 근거하여, 나는 미래에도 그녀가 의지할 만 하다고 신뢰할 수 있음을 믿는다. 하나님의 경우, 당신은 그가 존재한다는 믿음을 가질 수 없다. 그의 실존은 앎의 문제일 것이다. 믿음은 그의 실존과 성격을 안 후에야 실현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그가 실존하는지를 먼저 안 후에야 올 수 있다; 그 후에 성격에 대한 믿음이 올 수 있다. 그리고 그것 조차도 일종의 객관적이고 공개적으로 입증될 수 있는 증거가 요구된다. 내 안에서 혹은 주위에서 혹은 다소 내게 영향을 미치는 신성한 존재의 체험으로 해석될 수 있는 주관적 경험들은 객관적 실제의 증거로는 너무도 비신뢰적이다. 그러한 해석들을 객관적으로 확증하는 어떤 수단이 없으면,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단지 몇몇 종교적 전통의 차이에 따라 해석되는 따른 주관적 경험을 갖는 유신론자 뿐이다.  

내가 종종 들어온 믿음에 대한 방어는 우리 모두가 몇 가지에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종류의 믿음은 필연적이다. 어느 누구도 사람이 믿는 모든 것을 전부다 증명할 수 없다. 그리고, 예를 들어, 의자에 않는 단순한 행위 조차도, 의자가 이번에 망가지지 않는다고 확신 할 수 없으므로, 믿음의 행위이다. 그러나 그것은 같은 방향이지만 증거를 약간 더 요하는, 그 증거를 넘어 조금 더 가는 믿음의 한 예이다. 의자는 항상 제구실을 해왔고, 내가 테이블에서 그것을 잡아당길 때 구조적으로 튼튼하게 느껴지고, 다리가 모두 제자리에 붙어있고, 그리고 나는 의자가 더 이상 제구실을 못할 것이라는 어떠한 증거도 보지 못한다. 따라서 나는 증거로부터 의자가 이상 없다고 결론 내린다. 내가 그 증거로부터 온 결론에 믿음을 갖고 있다고 당신이 말하기를 원한다면, 좋다, 나는 그것이 지시하는 방향으로 약간 더 간 증거를 요하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러나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증거에 역행하는 믿음이다. 만일 하나님이의 실존에 대한 증거가 있다면, 그 실존에 대한 믿음은 필요하지 않을 텐데, 왜냐하면 우리는 그가 존재함을 알 테니까. 하나님이 실존함을 믿기 위해 하나님의 실존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는 바로 그 사실이 이 믿음이 증거에 역행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지시하는 방향으로 조금 더 나아가면 하나님을 가리킬 증거로 해석될 수도 있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것에 관함이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체험들로 지칭되는 깊고 심오한 주관적 경험들이다. 그리고 너무나도 흔히 “신성함”이라 지칭되는 것을 느끼는 것, 그것을 그렇게 부르는 것, 나를 넘어서는 객관적 실제의 경험이라 믿는 것이 무엇 같은지 나는 안다. 하나님 자신과 교통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 어떠한지 나는 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매일 살고 있다고 전심을 다해 믿는 것이 어떠한지 나는 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러한 깊은 감동을 주는 경험들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이제 그것들에 대한 나의 이해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경험들에 대한 모든 다른 종교적 해석들 하에서, 그리고 이 경험들을 일으키는 우리 마음 바깥에 존재하는 어떤 다른 의식적 실체의 객관적 증거의 부족 하에서, 나는 더 이상 과거와 그것들을 과거와 같이 해석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체험들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 경험들에 대한 내 해석의 변화, 그것들을 이해하는 방법의 변화가 그것들을 체험하는 방법을 변화시켰다. 내가 삶을 체험하는 방식이 다르다. 나는 여전히 그 깊고 심오한 주관적 경험들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마치 하나님의 체험인 것처럼 경험하는 것이 이제는 내게 너무도 낯설다. 내가 함께 대화했던 수 많은 전유신론자들처럼, 나의 파종 경험은 마치 생생한 꿈에서, 내가 경험하고 있었을 때에는 너무도 내게 진짜처럼 느껴졌지만, 깨어나자 그 꿈 같은 본성이 너무도 명백하고, 꿈 꾸고 있었을 때 어떻게 그렇게도 진짜처럼 느껴졌는지 모르는 그런 꿈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그런 꿈처럼, 내가 아직도 깨어나면서 어쩌면 사실이고 강요 받는 것처럼 여전히 느껴졌지만, 더 많이 깨면 깰수록, 점점 덜 사실 같고 더 꿈같이 보였다. 이제, 그것은 늦은 오후에 그러한 꿈을 기억하며 생각하길, “우와, 거참 묘한 꿈이었군” 하는 것 같다.

Building a New World 새로운 세상을 세움 (마지막 장)

Comment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추천
2264 편견을 벗고.. 메이드 2002.08.05 2226 2
2263 외국과 한국 교회 답사기.....-십일조를 깐다- 댓글+2 엑스 2002.07.22 3566 2
2262 이게 정상적인 가정입니까?<네이버 어느분의 하소연> 댓글+10 반고호니 2007.03.27 4025 2
2261 변리사 지망생과 먹사의 사기극. 댓글+4 전차부대장 2007.04.08 2879 2
2260 한 모태신앙인의 간증(?) 댓글+4 마르스 2003.09.10 2535 1
2259 나는 왜 더이상 기독교인이 아닌가? 켄달 홉스 - 4부-1 인류애 2003.07.23 1641 1
열람중 [답글] 나는 왜 더이상 기독교인이 아닌가? 켄달 홉스 - 4부-2 오디세이 2003.07.23 1820 1
2257 구양봉스토리 리로디드 구양봉 2003.07.19 1763 1
2256 구양봉스토리 구양봉 2003.07.19 1548 1
2255 기도 응답 자유인 2003.07.12 1635 1
2254 [답글] 저도 최근 죽음이라는 사건에 고통받고 있습니다. 땟국물 2003.06.27 1518 1
2253 결혼전은 꿈 결혼후는 현실 - 유령의집 엑스 2003.04.04 1890 1
2252 저도한땐환자였습니다.........(펌) 댓글+1 어쩌라고 2003.03.11 2109 1
2251 [경험담]하회마을의 기독교화.. (by 의립당) 댓글+1 오디세이 2003.03.04 2083 1
2250 [re] [보충자료] 하회마을과 교회 오디세이 2003.03.04 1465 1
2249 어처구니 없는 목사의 만행 너바나 2003.02.24 1774 1
2248 [인용]더이상 좌시 할수 없는 기독교인들의 독선 (by 거푸집) 댓글+1 오디세이 2003.02.19 1700 1
2247 내가 고등학교 다닐때 아는 개독인이 있었다 엑스 2003.02.19 1462 1
2246 [경험담] 안티가 된이유 (by 한잔) 오디세이 2003.02.18 1648 1
2245 &lt;무식한건지 정신이 없는건지...&gt; -by 박상옥 엑스 2002.09.26 1495 1
Category
State
  • 현재 접속자 105 명
  • 오늘 방문자 698 명
  • 어제 방문자 4,940 명
  • 최대 방문자 5,411 명
  • 전체 방문자 1,536,937 명
  • 전체 게시물 14,416 개
  • 전체 댓글수 38,042 개
  • 전체 회원수 1,668 명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