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화를 벗겨낸 예수의 정체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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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화를 벗겨낸 예수의 정체 (1) ?

적 그리스도 0 7,262 2006.07.13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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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불트만(Rudoph Bultmann)의 양식비평에 따르면 복음서의 내용은 예수 추종자들에 의해 기록된 '신앙의 그리스도'(Christ of faith)이지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가 아니라는 것이다. 양식비평(Form criticism)이란 복음서가 형성되기 이전에 여러 구전(oral traditions)들이 전해졌다고 보고, 그 구전들을 여러 양식(forms)으로 분류하여 원래의 상황(Sitz)들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이러한 비평을 통해 불트만은 지금의 복음서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초대 교회 당시 예수에 관한 많은 구전들과 이야기들이 존재했었고, 교회라는 공동체가 이러한 것들을 그들 의도대로 편집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복음서에 나오는 "다음날". "즉시", "길 가실 때에" 등의 말들은 여러 다른 구전 자료들을 서로 잇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복음서 안에 있는 문서, 시간, 장소 등의 표시는 비역사적이며 믿을 수 없는 것이므로 이러한 것들은 다 떼어내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초대 교회의 인위적인 편집을 해체하여 이 기록에 들어있는 구전의 원 형태를 찾아 최초의 전승을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아무리 보수적인 복음주의 신학자라고 할지라도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이 이교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은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다소 진보적인 자유주의 신학계에서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부활을 신화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독일의 '종교사학파'를 비롯하여, '탈신화화'를 주창한 불트만과 미국의 '예수 세미나' 학파에게 이르기까지 예수의 일대기에서 신화를 걷어내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시도 되었다. 충격적이겠지만, 최근에 전세계적으로 기독교계를 강타한 '예수는 신화다' [티모스 프리크 & 피터 갠디/ 예수는 신화다 / <?xml:namespace prefix = st1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smarttags" />승영조 역/ 동아일보/ 2002 - 원제:  Timothy Freke & Peter Gandy / The Jesus Mysteries /Harmony Books. New York - 한국판이 출판된 적이 있으나 한기총의 협박으로 현재 출판정지! ]에서는 동정녀 탄생과 부활은 물론, 예수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이교도 신화와 헬라 철학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티모스 프리크와 피터 갠디는 예수에게서 이교도 신화와 헬라철학을 걷어내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주장한다! 필자는 대체적으로 이들의 주장에 동조하면서 다음 장에서는 예수에게 씌워진 신화의 장막을 걷어낼 것이다. 그러나 예수에게서 이교도 신화와 헬라철학을 걷어내면 정말로 아무것도 남지 않을까? 그 점에 대해서는 필자는 약간의 의구심이 남는다. 필자가 파악한 바로는 이교도 신화와 헬라철학을 걷어내고 남겨지는 것은 전혀 낯선 모습의 이상한 예수이다!

 

(1) 예수의 제자들은 유대혁명가?

가롯 유다는 예수를 은화 30냥에 팔아먹은 배신자로 모든 기독교인에게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행적에 대한 구체적 기록을 더듬어보면 석연치 않은 점이 적지 않다. 예컨대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이유가 실망감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예수가 베다니에 있을 때 마리아라는 여성이 예수에게 향유를 부었다. 당시 향유는 일반인은 만지지도 못할 엄청나게 비싼 것이었다. 그러자 가롯 유다가 "어째서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라고 꾸중하자, 예수는 그 여자의 행위를 옹호한다. [요한복음 12장 3~8절, 마가복음 14장 3~9절, 마태복음 26장 6~13절]. 가롯 유다는 이러한 예수에게 실망을 느낀 것이 아닐까? (반면에 누가복음 22장과 요한복음 13장에는 '악마' 가 들었기 때문이었다고 다소 엇갈리는 설명이 나와 있다. 덧붙여 이야기 하자면 한국목사들은 예수에게 아낌없이 바치는 이 구절을 악용하여 신도들의 고혈을 빨아먹는데 심심하면 이용하고 있기도 하다.)

 

유다 이름의 가롯(Iscariot: 이스가리옷)은 당시 열심당(Zealots)을 지칭하는 단어인 '자객'(sicarri)과 라틴어 '시카리우스'(sicarius) 발음상 매우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자객'(sicarri)은 열심당 계열의 엘리트로 직업적인 암살자를 칭하는 말이었다. 슐테스(Schulthess)와 벨하우젠(Wellhausen)은 '가롯'(이스카리옷)은 아람어로 암살자를 뜻하는 이스카르야아('isqarya"a)에서 파생된 말로 보고 있다. [정인찬 / 성서대백과사전 / 서울: 기독지혜사, 1992 / P.67] 그가 예수를 배반한 이유는 돈 때문이 아니라 예수가 로마의 식민통치로부터 해방시켜줄 정치적 메시아 이길 바라는 열심당원이었기 때문에 실망해서 배반했다는 설이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문제는 가롯 유다뿐만이 아니라 다른 제자들의 이름 역시 열심당원임을 시사해준다는 점이다. 마태복음 16장 17절에서 예수는 시몬 베드로를 가르켜 '무법자'라는 뜻으로써 열심당원들에게 흔하게 따라붙는 이름이었던 'baryona'에서 파생된 '바르요나'(Bar-jona)로 부른다. 예수는 마가복음 3장 17절에서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과 요한을 가르켜 '보아너게'(Boanerges) 즉 '천둥의 아들'(sons of thunder)이라 불렀다. 누가복음 9장 51~55절에서 야고보는 그런 별명을 얻기에 합당한 발언을 하는데, 예수를 환대하지 않는 사마리아 전역을 불로 태워버리자고 주장한다! 히브리어로 '천둥의 아들들'(benei ra'ash)역시 당시에 열심당을 부르는 또 다른 말이었다.

 

"마태와 도마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셀롯이라 하는 시몬과" [누가복음 6장 15절]

- 공동번역판에는 "혁명당원 시몬"

 

또 한 명의 제자인 시몬은 열심당(Zealots)이었다고 한다(시몬 베드로와는 또 다른 사람이다). 누가복음에서 등장한 '열심당원 시몬'이 마태복음 10장 4절에는 '가나안 사람 시몬'으로 등장하는데 원래 희랍어 원문의 '카나나이오스 시몬'의 오역이라고 한다. '카나나이오스'는 '열광적'을 의미하는 열심당에 대한 아람어 이다.

 

또한 예수와 함께 못박힌 두 강도는 열심당일 가능성이 크다. 당시 유대인의 무장투쟁으로 인해 로마는 질서 유지를 위해서 종종 십자가형을 사용했다고 한다. 요세푸스의 말에 따르자면 "십자가형은 사망의 모든 방법 중에서 가장 파멸적인 것" 이라고 했는데, 당시에 무장투쟁을 일으킨 수많은 유대인들이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 십자가 처형은 일반적인 범죄자보다는 반역죄인에게 주로 내리는 최고의 형벌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열심당원들은 당시에 강도라고도 불렸다.

 

앞서 필자가 '시대상황과 무관한 복음서'라는 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오늘날 전해지는 복음서 속에서는 당시 피 바람이 몰아치던 당시 유대사회의 상황을 파악하기 힘들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 제자들의 이름 속에서 열심당의 흔적이 무수히 발견되는 것은 무엇일까?

 

(2) 칼을 뽑아 든 예수!

예수에 대해 일반인들이 갖고 있는 이미지는 '사랑과 평화의 예수'이다. 그러나 4복음서를 살펴보면 숨겨진 예수의 또 다른 단면을 살펴보고 있다. 알려진 것과는 달리 또 다른 예수의 단면은 우리가 보아온 예수 영화 속에 표현된 그런 성품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또 다른 예수의 모습은 다분히 독단적이고 위협적이며 권력자를 연상케 하는 언행을 거침없이 사용하여 인자하거나 후덕해 보이지 않는다. 안티 기독교 운동가들은 납득하기 힘든 이러한 예수의 언행을 지적한바 있다. 마찬가지로 필자도 안티 기독교 활동을 하던 예전에는 예수의 납득하기 힘든 언행을 지적한 바 있으나, 곰곰이 따져본 결과 무엇인가 감이 잡히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납득하기 힘든 이러한 예수의 언행을 지적하는 차원을 넘어서 분석을 시도 해보고자 한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니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리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마태복음 10장 34~39절]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이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2장 51장~53절]

 

일반인들이 예수에 대해 갖고 있는 평화의 이미지와는 너무도 대비되는 구절이다. 위의 구절을 음미해보면, 예수는 화평을 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분쟁을 일으키려고 왔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위와 같은 예수의 말은 오늘날의 사이비종교 교주가 지껄일 법한 말이지만, 당시의 시대상황과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보면 상당히 다른 의미가 될 수가 있다!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찌어다" [누가복음 22장 36절]

 

예수는 여러 차례에 걸쳐 제자들에게 검을 소유하고 사라고 명령한다.

그러자 제자들은 재빨리 품에서 검 두 자루를 내어 보인다.

 

"저희가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 [누가복음 22장 38절]

 

예수는 제자들이 품속에 지녔던 검을 꺼내 보이자 만족해 한다.

4복음서 모두 검을 숨기고 있는 제자가 있었다는 사실과 예수의 체포 당시 제자들이 저항했다는 점을 말해준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田土)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마태복음 1장 29절]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 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마태복음 10장 21절]

 

예수는 자신의 추종자들이 핍박을 받게 될 것을 말하면서, 부모도 형제도 버리라고 말하고 있다. 여러 배를 상속받고 또 영생을 상속받기 위해서 모든 예수의 추종자들은 부모 형제도 재산도 모두 버려야 한다. 예수는 뻔뻔하게도 자기 자신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만을 강요하고 있다.  그러한 예는 또 있다. "부친의 죽음에 대하여 장례식을 거행할 수 있도록 시간을 허락하여 주소서"라고 제자가 간청하자, "죽은 자들로 하여금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누가복음 9장 59~60절]라고 예수는 대답한다.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예수의 모습이다. 오늘날의 사이비교주가 신도들에게 집도, 가족도 버리고, 맹목적인 신앙을 요구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게다가 예수는 자기 스스로 분쟁을 일으키고 검을 주려고 왔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당시 가정과 재산을 포기하자고 주장하며 유대민족을 선동한 사람이 있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테우다스(Theudas)라는 자는 사막에서 가정과 재산을 포기하자고 주장하며 추종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는 무리들을 모아 서쪽 예루살렘으로 진군을 시도했지만, 로마 총독 쿠스피우스 파두스(C. Cuspius Fadus)에 의해 무참히 살육되었다고 한다.

 

물론, 테우다스(Theudas)와 예수를 동일시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당시 유대사회에서 무장독립투쟁을 선동했던 지도자들이 "가정과 재산을 포기하자"고 주장했던 것을 고려해 보면 예수의 납득하기 힘든 말도 이해가 될 수 있다. 당시의 유대사회의 집권층이었던 사두개파들이 지독한 현실주의자였던 반면에, 무장독립투쟁을 선동했던 사람들은 '제4의철학'과 같은 영혼불멸과 부활의 사상을 설파하면서 무장투쟁을 벌였던 것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또한 예수는 오로지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복음을 전파하라고 가르쳤다. 그는 열두 제자를 사방에 보내면서 말한다.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마태복음 10장 5∼6절]

 

기독교인들은 이 구절에서 등장하는 이방인과 사마리아인을 가리켜, 타락한 사람 혹은 비 기독교인들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독교 교리적인 관점에서 보면 타락한 사람 또는 비 기독교인들은 전도의 대상이지 회피대상이 아니다. 또한 그것이 은유적인 표현이라면 이방인이라는 단어 하나로도 충분한데 어째서 사마리아인까지 집어 넣었을까?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극도로 혐오 했다.

 

비슷한 또 다른 구절이 있다. 한 가나안-팔레스타인 여자가(그와 동일한 이야기가 마가복음에도 나와있는데, 마가복음에서는 '수로보니게 여인' 즉 오늘말로 하면 '시리아-페니키아 여인'이라고 등장한다)자기 딸에 씨인 마귀를 쫓아달라고 하자,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마태복음 15장 24절]

 

고 예수는 대답했다. 그러자 그 여자는 포기하지 않고 예수의 발목을 붙잡고 애원을 한다. 그러자 예수가 대답한다.

 

"자녀들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마태복음 15:26]

 

예수는 이스라엘과 사이가 좋지 않은 팔레스타인 여자에게 "개"라는 용어도 서슴지 않았다!

그래도 그 여인이 계속해서 애원하자,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마태복음15장 28절]

 

라고 대답하며 그 여자의 딸을 고쳐주기는 하지만, 이방인을 차별하며 개라는 용어도 서슴지 않는 예수의 행동은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물론, 복음서의 맨 끝에 승천하는 예수가 "너희는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러나, 가장 오래된 마가복음에는 예수의 장례를 치른 동굴(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 하는 장면에서 끝을 맺는다! 예수의 부활과 승천은 후대에 첨가된 대목이다. 카톨릭 성경은 주석에서 이점을 밝히고 있는데, 마가복음에는 두 종류가 있는 데 짧은 것, 긴 것 두 개를 다 소개 하며 고본에는 없었다고 색인 난에서 밝히고 있다. 대부분의 기독교에서는 주로 긴 것을 쓰고 있는데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주석 난에 "어떤 사본에는 9-20 절까지 없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카톨릭 백과사전에는 이렇게 언급되어 있다.

" 마지막 16:9-20 의 12 절은 그 진위에 문제가 있다. 마가는 그 끝 맺음에 3 가지가 있는데 8절에서 끝나는 짧은 version, 9-20 절을 포함한 긴 version, 그리고 중간 길이의 version..... 이 셋 중 중간 길이의 것은 쉽게 제거 되는 바 .... 아무도 이 중간 것을 진본으로 채택 하지 않는다. ......... 긴 것과 짧은 것 중 어느 것이 진본인가 보면 .....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긴 것은 모든 고본에 없었다고 되어 있는바........ 모든 마가 고본이 8 절 에서 끝 나고 있다고 이 역사가는 서술 하고 있으며....... 성 '제롬'도 서술 하기를 거의 모든 그리스 고본에 9-20절 구절은 포함 되어 있지 않다고 하였으며.......... 3 세기, 4 세기의 교부들도 이 구절에 대해 침묵 하는 것으로 보아 동 구절을 모르고 있었던지, 또는 제외 시킨 것으로 해석 되어 진다...... "

 

성경통신대학 제1권에서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마가가 기록한 부분은 16:8에서 끝난다.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어도 그 뒷부분은 오늘까지 보존되어 있는 두 개의 가장 오래된 사본에도 16:8로 끝나있다.후에 어떤 사람이 다른 복음서의 내용을 참고하여 9~20절을 보충 첨가하였다고 본다." [성경통신대학 제1권 /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 교육부]

 

다시 말해 "땅끝까지 전하라"는 구절이 포함된, 예수의 부활과 승천은 AD 4 세기 경이 지나서야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술 더 떠서 사도 행전에 의하면 예수가 승천한 후, 11 제자들은 땅 끝까지 선교 하러 나가는 대신 예루살렘에 모여 있었다고 한다. 남겨진 제자들은 "땅 끝까지 전 하라"는 예수의 마지막 지상 명령을 전혀 들은 적이 없는 것 같이 행동 하는데, 예를 들어 사도행전 10 장을 보면 베드로는 처음으로 이방인 '고넬료'의 초청을 받고 거부감을 표시한다. 완강히 거절 하다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보따리 환상을 통해서야 베드로는 자신의 결심을 바꾸게 된다. 그러나 이어지는 사도행전 11 장에서는 사도들과 신도들이 베도로의 전도행각을 전해 듣고는 "왜 할례 받지 않은 자의 집에 들어가서 식사대접까지 받았느냐?" 며 베드로의 이방 선교를 비난 한다.

 

(3) 두 얼굴의 예수!

복음서들을 읽다 보면 예수가 남긴 말들은 상당부분 헬라철학에 기인한 듯하다. 문제는 복음서 안에서 예수와 예수가 서로 대립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예수는 자신이 한말도 실천하지 못하고 떠벌리고 다닌 인간이라고 볼 수 있는데, 뺨 맞은 예수의 반항을 예로 들 수 있겠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앙갚음을 하지 말아라.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고,또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 주어라." [마태복음 5장 39~40절]

 

예수는 이와 같이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재미있는 점은 예수가 정말 뺨을 맞은 적이 있었다. 유대인들에게 체포되어 대제사장에게 심문을 받을 때, 예수가 대답하는 말이 좀 공손치 못했던지 그의 옆에 있던 경비병 한 사람이 

 

"대사제님께 그게 무슨 대답이냐?"

라고 말하며 그의 뺨을 때렸다.  그러자 예수는

 

"내가 한 말에 잘못이 있다면 어디 대 보아라. 그러나 잘못이 없다면 어찌하여 나를 때리느냐?"[요한복음 18장 22~23절]

라고 대답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는 한쪽 뺨을 때리거든 다른 쪽 뺨마저 돌려대라고 가르쳤지만, 자신은 뺨을 맞자 즉시 항의했던 것이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것을 뛰어넘어서, 예수가 남긴 말이 서로 대치되는 경우도 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마태복음 18장 15~17절]  

 

위에서 남긴 예수의 가르침은  "일곱 번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 찌니라"[마태복음 18장 22절] 라는 유명한 예수의 용서의 가르침과 바로 대치된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마가복음 9장 40절] 라는 예수의 말은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마태복음 12장 30절] 말과 서로 상치되고 있다.  

 

그리고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마태복음 5장 9절]"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오 검을 주러 왔다"[마태복음 10장 34절]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검을 가진 자는 검으로 망하리라"[마태복음 26장 52절]"검이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검을 살지니라"[누가복음 22장 36절], 또한 "네 원수를 사랑하며 너를 미워하는 자를 선하게 대하라" [누가복음 6장 27절]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환전상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요한복음 2장 15절]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엄연히 말해서 이것은 성경의 오류이다! 그러나 돋보기를 들고 좀더 깊이 관찰해보면 복음서 속에는 2가지 모습의 예수가 서로 대립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바울은 예수의 탄생에 대하여 "예수는 육신은 다윗의 혈통에서 나왔고 영(靈)은 하나님에게서 왔다."[로마서 1장 3~4절]라고 말하고 있다. 반면에 복음서의 내용대로 라면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났을 뿐, 아버지 요셉과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 지간이다!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아버지 요셉의 다윗 왕가 족보를 꼬박꼬박 대 수를 헤아려가며 열거한 이유는 무엇인가? '다윗의 혈통'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오늘날 우리에게 흔히 알려진 예수는 사랑과 관용의 예수, 동정녀 잉태와 부활과 같은 신화적 예수의 모습이다. 이런 신화와 헬라철학을 걷어내 버리면 전혀 낯선 모습의 예수가 우리에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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